2014. 늪지대
여태껏 큰일이 닥칠 때마다 낙관적으로 살아왔는데 2013의 캄캄한 기운은 상반기 내내 더 깊어진다. 1월에는 좋은 기회로 미국에 다녀오기도 했는데, 귀국하니 그 모든 게 꿈처럼 느껴질 정도로 좋았다. 8월 졸업 즈음엔 허무함이 밀려와 대학생활이 후회스럽기도 했다. 학창 시절 동안 금이 간 적 없던 자존감이 동반해 추락한다. 급기야 개인의 취향과 호불호가 분명했던 장점마저 상실해, 희미하게 느끼던 방향마저 다 잃고 헤매었다.
하반기에는 생판 모르는 지역인 '판교'에서 일을 시작한다. 대학생활을 하면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분야에서 사회에 첫 발을 내딛고는 잔뜩 움츠려 들어서 회사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고슴도치처럼 지냈다. 일 년 내내 늪 속을 걸으며 때로는 수심이 깊어져서 늪의 물이 내 키만큼 찼다. 우울하고 힘든 감정에 완전히 압도당한 날도 많았다. 그렇게 늪지대를 걷다가 12월 즈음 들려온 넥스트 합격소식이 없었다면, 아직도 늪에서 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지독히도 우울하고 고립된 한 해였다. 나중에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봤을 때, 이 시기를 떠올릴 정도로 사는 게 팍팍했다. 이때부터 판교까지 장거리 대이동이 시작된 뒤로 아직도 이 동네를 벗어나지 못했다. 지금은 대학 캠퍼스보다 더 오랜 시간을 보낸 지역이 되었다.
2015. NEXT
넥스트에 입학했다. 돌이켜보니 그야말로 다음 페이지였다. 이전 해까지는 배경이 인천이었다면 2015를 기점으로 전반전을 완전히 접고, 판교로 설명될 후반전으로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3월에 'Programming' 이란 걸 처음 배우고, 'Hello, World!'를 찍어 본 이후 내 멘탈과 당시의 학교 상황은 3개월 단위로 휘청 휘청거렸다. 20대에 쓸 수 있는 에너지가 한정되어 있다면, 남은 모든 에너지를 여기서 거의 다 쏟아부은 셈이었다.
한국에서 만나본 것 중 가장 강력한 자아와 개성을 가진 다양한 캐릭터들을 한꺼번에 이 공간에서 만난다. 이때 이 곳에서 만난 독특하고 특별한 것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람과 만나서 아직까지도 평화롭게 잘 지내고 있다.
넥스트는 2015를 끝으로 더 이상 정규 신입생을 받지 못했다. 한국에서는 이런 교육기관과 교육방식을 처음 경험해봐서 외부 사람들에게 설명하기가 어려운, 그렇지만 너무 좋은 교육을 받는 행운에 내가 막차를 탄 것이다. 막차를 탄 행운의 대가였을까? 한 학기 단위로 학교 상황이 바뀌다 보니 나도 학교와 운명을 같이하면서 흔들거렸다. 학기가 지날수록 내가 알아야 할 것이 너무 많고, 부족하다는 생각에 '배우는 것 까진 좋은데 직업으로 삼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깊어졌다. 그때 에너지를 다 쓴 탓인지 후반전 끝에 가니 에너지가 남아나질 않았다.
2016. 마법사
마법사 같다고 느꼈던 개발자가 나도 되었다. 상반기에는 학교 안의 수면실에서 잘 때마다 그 공간이 해리포터의 벽장이라 생각했다. '언젠가는 내가 머글세계를 떠나서 마법을 쓸 수 있겠지...' 하면서 약간의 폐소공포가 있는데도 거기서 자고 깼다. 하반기에는 전혀 예상치 못하게도 학교와 같은 건물에 위치한 곳에서 일을 시작하게 된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개발자인지 마법사인지 모를 일을 시작한다. 무사히 입사 첫 해를 보내나 싶었는데, 이직보다 더 큰 선택의 기로에서 새해를 맞는다.
초등학교 때부터 해리포터 팬인 나에게 마법사는 큰 의미이다. 작지만 그동안의 사회생활에서 마주하거나 스쳐간 다른 어른들과 비교불가급의 훨씬 좋은 어른들을 입사 후에 만나게 된다. 개발자가 된 것 만큼이나 이것도 마법같은 행운이었다.
2017. 평화로운 대모험
동갑 친구들보다는 조금 뒤늦게 어느 한 곳에 정착한 정직원이 되어서, 처음으로 재정적 안정상태를 1년 이상 누려보게 된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평화롭고 따뜻한 시간으로 기억된다. 후반기에는 갑자기 '잠깐만, 이거 제목이 초보 마법사의 대모험인가? 왜 이러지?' 싶도록 회사가 무섭도록 성장한다.(나 말고 회사가...) 나중엔 내가 도저히 그 속도에 맞추기가 힘들어져서 막판에는 거의 정신적으로 해탈 수준이 되고 만다. 여름에는 맹장수술 사건으로 병가를 쓰게되어 회사의 전쟁 난리통 상황에 있던 나에게, 그나마 급 브레이크 역할을 해주었다. ‘나 혼자 산다’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평화로운 일상을 누린 것 같지만,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눈 감고 뜨면 달라져 있는 회사에서 영문도 모른 채 대모험을 하였다.
2018. 0.1g 정도의 성숙
문득 지나온 발자국들의 의미를 알게 되고, 이해가 안 되던 주변 사람들이 뒤늦게 이해되는 신기한 현상을 겪는다. 스트레스로 심신이 약해질 때마다 해결하는 방법을 달리 해보면서 대처하는 법을 배워나갔다. 그리고 쉼과 일에 대해 계속 생각해보고 있다. 늘 에너지가 많고 진취적인 상태였다가, 사소한 일상이 힘에 부치는 상황을 자주 겪어보니 사실 당황스럽다. 에너지 보존 법칙이 나에게도 적용된다고 믿으며, 여태까지 소진해버린 에너지를 생각하면 지금쯤 좀 힘들 때도 되었다 하고 인정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일상을 구성하는 공간, 집, 동네, 취미, 산책, 자연 등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나 일상을 잘 유지하는 법은 아직 모른다. 여전히 외향적이지만 6인 이상의 단체활동, 아는 사람보다는 새로운 사람들이 더 많은 장소에 가는 것, 사람이 아주 많은 곳에 가는 것은 확실히 이젠 별로다.
남들의 확고한 취미가 부러웠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도 모른다는 게 한심하게 느껴졌다. 외부세계가 나의 일상을 망가뜨리려 할 때 어떻게 막아내야 할지 잘 몰랐다. 일 년 내내 호되게 당하면서, 막판에야 어렴풋이 깨닫는다.
여러 해를 함께 해준 고마운 사람들이 많지만, 개인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일부러 등장시키지 않았다.
같은 이유로 20대에서 빼놓으면 섭섭한 개인의 연애사도 skip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