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tranger Jan 03. 2019

나의 20대와 작별인사 -후반전

2014. 늪지대

여태껏 큰일이 닥칠 때마다 낙관적으로 살아왔는데 2013의 캄캄한 기운은 상반기 내내 더 깊어진다. 1월에는 좋은 기회로 미국에 다녀오기도 했는데, 귀국하니 그 모든 게 꿈처럼 느껴질 정도로 좋았다. 8월 졸업 즈음엔 허무함이 밀려와 대학생활이 후회스럽기도 했다. 학창 시절 동안 금이 간 적 없던 자존감이 동반해 추락한다. 급기야 개인의 취향과 호불호가 분명했던 장점마저 상실해, 희미하게 느끼던 방향마저 다 잃고 헤매었다.

하반기에는 생판 모르는 지역인 '판교'에서 일을 시작한다. 대학생활을 하면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분야에서 사회에 첫 발을 내딛고는 잔뜩 움츠려 들어서 회사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고슴도치처럼 지냈다. 일 년 내내 늪 속을 걸으며 때로는 수심이 깊어져서 늪의 물이 내 키만큼 찼다. 우울하고 힘든 감정에 완전히 압도당한 날도 많았다. 그렇게 늪지대를 걷다가 12월 즈음 들려온 넥스트 합격소식이 없었다면, 아직도 늪에서 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지독히도 우울하고 고립된 한 해였다. 나중에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봤을 때, 이 시기를 떠올릴 정도로 사는 게 팍팍했다. 이때부터 판교까지 장거리 대이동이 시작된 뒤로 아직도 이 동네를 벗어나지 못했다. 지금은 대학 캠퍼스보다 더 오랜 시간을 보낸 지역이 되었다.
 

2015. NEXT

넥스트에 입학했다. 돌이켜보니 그야말로 다음 페이지였다. 이전 해까지는 배경이 인천이었다면 2015를 기점으로 전반전을 완전히 접고, 판교로 설명될 후반전으로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3월에 'Programming' 이란 걸 처음 배우고, 'Hello, World!'를 찍어 본 이후 내 멘탈과 당시의 학교 상황은 3개월 단위로 휘청 휘청거렸다. 20대에 쓸 수 있는 에너지가 한정되어 있다면, 남은 모든 에너지를 여기서 거의 다 쏟아부은 셈이었다.

한국에서 만나본 것 중 가장 강력한 자아와 개성을 가진 다양한 캐릭터들을 한꺼번에 이 공간에서 만난다. 이때 이 곳에서 만난 독특하고 특별한 것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람과 만나서 아직까지도 평화롭게 잘 지내고 있다.


넥스트는 2015를 끝으로 더 이상 정규 신입생을 받지 못했다. 한국에서는 이런 교육기관과 교육방식을 처음 경험해봐서 외부 사람들에게 설명하기가 어려운, 그렇지만 너무 좋은 교육을 받는 행운에 내가 막차를 탄 것이다. 막차를 탄 행운의 대가였을까? 한 학기 단위로 학교 상황이 바뀌다 보니 나도 학교와 운명을 같이하면서 흔들거렸다. 학기가 지날수록 내가 알아야 할 것이 너무 많고, 부족하다는 생각에 '배우는 것 까진 좋은데 직업으로 삼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깊어졌다. 그때 에너지를 다 쓴 탓인지 후반전 끝에 가니 에너지가 남아나질 않았다.


2016. 마법사

마법사 같다고 느꼈던 개발자가 나도 되었다. 상반기에는 학교 안의 수면실에서 잘 때마다 그 공간이 해리포터의 벽장이라 생각했다. '언젠가는 내가 머글세계를 떠나서 마법을 쓸 수 있겠지...' 하면서 약간의 폐소공포가 있는데도 거기서 자고 깼다. 하반기에는 전혀 예상치 못하게도 학교와 같은 건물에 위치한 곳에서 일을 시작하게 된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개발자인지 마법사인지 모를 일을 시작한다. 무사히 입사 첫 해를 보내나 싶었는데, 이직보다 더 큰 선택의 기로에서 새해를 맞는다.


초등학교 때부터 해리포터 팬인 나에게 마법사는 큰 의미이다. 작지만 그동안의 사회생활에서 마주하거나 스쳐간 다른 어른들과 비교불가급의 훨씬 좋은 어른들을 입사 후에 만나게 된다. 개발자가 된 것 만큼이나 이것도 마법같은 행운이었다.

 

2017. 평화로운 대모험

동갑 친구들보다는 조금 뒤늦게 어느 한 곳에 정착한 정직원이 되어서, 처음으로 재정적 안정상태를 1년 이상 누려보게 된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평화롭고 따뜻한 시간으로 기억된다. 후반기에는 갑자기 '잠깐만, 이거 제목이 초보 마법사의 대모험인가? 왜 이러지?' 싶도록 회사가 무섭도록 성장한다.(나 말고 회사가...) 나중엔 내가 도저히 그 속도에 맞추기가 힘들어져서 막판에는 거의 정신적으로 해탈 수준이 되고 만다. 여름에는 맹장수술 사건으로 병가를 쓰게되어 회사의 전쟁 난리통 상황에 있던 나에게, 그나마 급 브레이크 역할을 해주었다. ‘나 혼자 산다’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평화로운 일상을 누린 것 같지만,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눈 감고 뜨면 달라져 있는 회사에서 영문도 모른 채 대모험을 하였다.


2018. 0.1g 정도의 성숙

문득 지나온 발자국들의 의미를 알게 되고, 이해가 안 되던 주변 사람들이 뒤늦게 이해되는 신기한 현상을 겪는다. 스트레스로 심신이 약해질 때마다 해결하는 방법을 달리 해보면서 대처하는 법을 배워나갔다. 그리고 쉼과 일에 대해 계속 생각해보고 있다. 늘 에너지가 많고 진취적인 상태였다가, 사소한 일상이 힘에 부치는 상황을 자주 겪어보니 사실 당황스럽다. 에너지 보존 법칙이 나에게도 적용된다고 믿으며, 여태까지 소진해버린 에너지를 생각하면 지금쯤 좀 힘들 때도 되었다 하고 인정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일상을 구성하는 공간, 집, 동네, 취미, 산책, 자연 등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나 일상을 잘 유지하는 법은 아직 모른다. 여전히 외향적이지만 6인 이상의 단체활동, 아는 사람보다는 새로운 사람들이 더 많은 장소에 가는 것, 사람이 아주 많은 곳에 가는 것은 확실히 이젠 별로다.


남들의 확고한 취미가 부러웠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도 모른다는 게 한심하게 느껴졌다. 외부세계가 나의 일상을 망가뜨리려 할 때 어떻게 막아내야 할지 잘 몰랐다. 일 년 내내 호되게 당하면서, 막판에야 어렴풋이 깨닫는다.


Outro

여러 해를 함께 해준 고마운 사람들이 많지만, 개인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일부러 등장시키지 않았다.

같은 이유로 20대에서 빼놓으면 섭섭한 개인의 연애사도 skip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20대와 작별인사 -전반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