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아름다운 주말
Mai 12, 2012 Freitag
어제 요리를 할 힘은 없어서 퇴근길에 맥도날드로 향해 혼자 햄버거를 두 개나 먹고, 집에 와서는 샤워를 하고 한국 드라마를 보고 잠깐 잠든 것 같은데 벌써 출근시간이다. 다리를 다친 이후 좋은 점이라면, 뛰고 싶어도 뛸 수가 없어서 아침마다 기차를 잡으려고 전력 질주하는 일이 없다. 다음 기차를 타야 할 운명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매주 금요일마다 많은 동료들이 'Schönes Wochenende'를 외치고는 2, 3시에 집에 갔었는데, 오늘은 금요일마다 출장이나 휴가였던 보스가 오랜만에 출근한 날이다 심상치 않다.
오전에 또 추가로 업무를 받고, 새로 온 루시와 함께 연체대금 관리업무에 대한 의의와 과정까지 보스에게 다시 설명을 들었다. 그동안엔 전임 인턴이 하고 간 일을 그대로 따라 했고, 그가 덜 가르쳐 주고 간 모든 SAP의 기능들은 모르는 독일어로 구글링 해가며, 차가운 독일 동료들한테 물어보곤 했었는데 드디어 내가 하는 일의 목적과 action plan을 들으니 속이 다 시원했다.
오늘은 정말 불금인지 이상하게도 칼 답장이 오는 고객사들이 많았다. 그리고 업무 요청이 계속 이어졌다. 30개가 넘는 invoice 를 일일이 클릭하고 저장하는데 (한꺼번에 저장하는 기능을 수 없이 시도해봤는데 안돼서, 결국 분노하면서 일일이 저장했다.) 오늘까지 다른 일도 해달라고 하는 헬레나 아주머니까지 진짜 이상한 하루였다. 아무것도 몰랐던 내가 그새 할 줄 아는 일이 많아졌다는 게 새삼 뿌듯하기도 했지만, 오늘은 금요일! 정말 집에 가고 싶었다. TGIF는 세계 공통이다.
점심시간에는 동료들 모두 다음 주에 있을 휴가 얘기로 가득했다. 동료들이 유럽에서 유명한 휴가지는 어딘 지 알려주었다. 프랑스 사람들은 프랑스에 산과 바다 모두 있기 때문에 다른 나라로 여름휴가를 잘 안 떠난다는 독일인들 약 올리는 것 같은 답변을 들었다.(독일의 악천후와 따뜻한 해변 없음 때문에, 독일인들은 늘 해가 쨍쨍한 다른 나라로 많이들 휴가를 간다.) 오늘 혹시 일찍 끝나면 루시와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바쁜 와중에 멍청하게 SAP 비번 3번 이상 틀려서 접근이 막혀서 다시 IT부서에 찾아가서 비밀번호를 새로 받아왔고, 영국 클라이언트와 계속 통화했는데 도저히 못 알아듣겠다. 도대체 영어 쓰는 거 맞냐고ㅠㅠ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업무를 끝내니 오후 4시 반, 업무 프로세스 미팅을 하자고 했던 보스에게 지금 할 건지 물어봤다. 오후 5시에 하자고 해서 루시와 함께 좌절했다. 월요일에 하면 안 되나요...... 보스의 열정적인 미팅 덕에 6시가 넘어서야 드디어 회사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오늘은 기욤, 루시와 함께 퇴근했는데, 여름도 아닌데 30도의 찌는 더위에 우릴 기다리는 것은 15분 기차 연착 소식이었다. 그 와중에 호기심 많은 기욤은 '한국에는 왜 박 씨가 많냐?'는 어려운 질문을 해 주셨다. 박지성과 내 성이 같아서 이상하다고 한다. 휴...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할까 하다가, 다시는 어려운 것을 못 물어보도록 우리나라에서 많은 성씨 김, 이, 박과, 조선시대의 신분제도와 조선 후기 족보를 사고팔게 된 배경까지 다 설명해주었다. 기욤은 질문한 것을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유난히 긴 금요일을 끝낸 기념으로, 시내에 도착해서 루시와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공원을 산책했다. 그녀가 채식주의자라는 걸 알게 됐고, 독일인 남자 친구가 있고 스위스에 살고 있어서 가끔만 볼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얼마 전에 한국에 갔지만 공항에서 차이고 돌아왔다는 내 얘기에 같이 속상해 하고, 군대에 있는 동생을 걱정해주는 루시의 모습에 그동안 내가 프랑스 친구들을 차갑게 느꼈던 건 편견이었다는 걸 느꼈다. 영어로 대화하는 건 둘 다 서툴렀지만, 아주 오랜만에 직장동료나 룸메이트가 아닌 친구와 대화하는 느낌이 들어서 행복했다.
그리고 루시에게 회사에서 집세를 내줄 수 있다는 조언을 들었는데, 세상에 이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니. 월요일에 집 계약서를 회사에 가져가야겠다. 루시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 혜택을 모르고 놓칠 뻔했다. 저녁에는 기숙사에 돌아와 위경련 때문에 죽을 뻔하다가 약 먹고 잠이 들었다. 연체와의 전쟁이 유난히 힘들었던 불금이었다.
2020.7.7
'Schönes Wochenende!' 제일 빨리 습득한 독일어이자, 스펠도 모른 채로 배운 말이었다. 왜냐면 금요일만 되면 기숙사에서, 마트에서 온갖 곳에서 평범한 작별인사인 '츄스' '챠오' 대신 'Nice weekend'에 해당하는 저 말을 했기 때문에 나도 뜻도 모른 채 그대로 따라 하면서 습득하게 되었다. 금요일이 되면 딱딱했던 표정 대신 미소를 지으며 'Schönes Wochenende!'를 외치고 각자 집으로 향하던 사람들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히 기억난다.
루시가 온 뒤로 나는 정서적으로 많은 것을 나눌 수 있는 동료이자 친구가 생겼다. 독일어를 나보다 잘했던 그녀는 내가 한국에 돌아오는 날까지 생활에 필요했던 많은 것들을 도와주었다. 회사에서 일을 하기 위해 이주한 직원에게 집세의 일부를 보조해주는 제도가 있었는데, 나는 몰랐기 때문에 회사에 관련 서류를 제출한 적이 없어서 혜택을 못 받고 있었다. 루시가 내가 어디에 사는지 물어봐준 덕분에 나는 그동안 못 받았던 집세 보조금까지 모두 받을 수 있었고, 그 비용은 인턴을 마친 뒤 유럽여행 경비로 아주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유럽에서 좋았던 제도 중 하나는 아직 직업을 갖기 전이지만 이미 성인이 된 상태의 youth에게 공간의 독립을 보장해 주기 위해 사회가 애쓴 다는 것이었다. 파리나 런던은 다른 얘기겠지만, 적어도 독일에서 기숙사는 최소한의 독립된 개인 공간과 룸메이트와 공유하긴 하지만 충분히 괜찮은 컨디션의 주방과 욕실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한국 기숙사에서 4인 1실에서 지내면서, 너무 좁아서 기숙사에 4명이 모이는 건 잠잘 때뿐인 것에 비하면 훨씬 '집'이라고 느낄 수 있는 공간이었다.
독립된 공간은 곧 사생활을 의미한다. 혼자 의, 식, 주를 해결하는 것을 배우는 과정이 될 뿐 아니라 휴식하고 일하는 자신만의 일상생활 사이클과 여러 가지 삶의 취향을 발견해 나가는 기반이 된다. 다른 사람을 초대하고, 또 타인의 공간에 초대받기도 하면서 타인과 어떤 관계를 설정할 것인지를 결정하고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는 성인으로 성장해나가는 연습을 해나갈 수 있다.
부모님의 도움 없이 온전히 독립된 공간을 구할 수 있는 우리나라 스무 살이 몇이나 될까? 좋아하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잘 모르겠는 것이 전부 요즈음 이십 대의 탓일까? 스무 살 남짓의 youth들이 경제적, 공간적으로 독립할 수 있도록 사회가 도와준 적도 없으면서,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선명하길 바라고, 서른 즈음엔 성숙한 어른의 모습이 되어 있길 바라는 것은 무슨 욕심일까? 충분히 혼자 지내는 연습을 해보고 자기 자신조차 탐색해 보지 못한 사람이, 하루아침에 그냥 몇 살이 되었다고 해서 세상과 다른 사람에 관심을 갖고 뭘 하고 싶은지 생각해내는 것이 오히려 신기하고 그 자체로 대견한 일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