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시(同一視)
국가대표 간 대항전 혹은 올림픽 같은 대형 스포츠 이벤트들을 보다 보면 예전에는 생각지 못한 불편함이 느껴진다. 전에는 뭣도 모르고 그냥 우리 팀, 즉 우리나라가 이기면 좋겠다고 생각되어 맹목적으로 응원하고, 승리에 환호하며 패배에 마음 아파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내가 응원하는 팀이 꼭 국가대표 팀일 필요도 없고, 오히려 그런 편협한 시선으로 대회를 바라보기 때문에 스포츠 경기를 즐기지 못하고 승패에만 강박적으로 대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이런 일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그건 지금까지 우리가 동일시하는 삶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동일시하는 삶이란, '나와 너는 같다'라고 여기는 태도인데 여기에는 굉장한 오류가 있다.
이미 흘러가버린 전근대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지금도 간혹 독재를 꿈꾸는 정권에서는 이러한 시도가 엿보인다. 2차 세계대전 이전의 군국주의, 전체주의 국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국가를 나와 동일시(국가 = 나, 이는 태양왕 루이 14세가 했던 얘기랑 다른 맥락임.)하게 되면 국가가 하는 일에 내가 기꺼이 동조하게 되고, 국가의 영광이 혹은 패배가 곧 나의 영광과 패배인 것이다. 앞선 두 번의 세계대전에서 보았듯이 이는 굉장히 무서운 가치관이다. 개인을 국가가 조종할 수 있는 안드로이드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도 국가주의 안드로이드의 관념을 벗어나지 못한 개인을 TV 뉴스에서 혹은 온라인에서 혹은 모 집회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동일시로 인한 폐해는 사회 전반에 걸쳐 야기되는 문제다.
부모-자식 간의 갈등의 한 원인으로도 지적된다. 부모가 자식을 다른 인격체로 인식하고, 타자화하면 아무 문제없었을 텐데, 동일시해버리기 때문에 자식의 생각이나 자유는 반영되지 못한 채 부모가 원하는 것(부모가 자식 나이일 때 하고 싶었던 것)을 해야 한다. 자식도 이에 대해 독립을 하는 등 타자화하는 노력 없이 부모 그늘에 있는 것이 편하기 때문에 자신이 원치 않는 것을 억지로라도 하게 된다. 더 나아가서는 부모가 대기업 가고 싶었기 때문에 자식은 대기업에 다니면서 행복한 연기까지 해야 한다.
남녀 사이에서도 '너와 나는 다르다'라는 생각으로 출발하면 분쟁의 여지가 줄어들 텐데 이를 동일시해버리면 '너는 내 거야'가 되어버리니 나의 기대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순간 '너는 내 건데 왜 내 맘대로 안되나!'라며 화를 내게 된다. 이 외에 직장에서도 상사-부하직원(나와 너는 다르지 않으므로 야근, 회식은 당연히 해야 한다 vs 나와 너는 다르므로 업무 외의 지시는 부당하다) 간에도 동일시화하는 오류는 너무나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기본적으로 인간이 사회적인 동물인지라 집단을 형성하려 하는 습성이 있어서 그 집단의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 필연적으로 '우리 집단은 하나'라는 동일시화하는 과정을 겪게 마련이다. 하지만 21세기 현대사회에 있어서 이러한 동일시화의 문제가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은 다양성을 기반으로 한 연결된 사회이기 때문에 인터넷을 통해서 집단을 형성할 수천, 수만 가지 경우의 수를 만들 수 있고 또한 시공간의 제약 없이 얼마든지 만났다 헤어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로 인한 대면 접촉이 줄어드는 문제는 또 다른 이야기이지만 그 와는 별개로 이전 시대와는 패러다임 자체가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말이다.
언제까지 전근대적으로 '우리는 하나!'라고 외치며 함께 취하면 '너와 내가 같아졌구나'라고 생각할 것인지, 이제는 그런 개념을 버리고 '나와 너는 다르다'라는 생각에서 출발한 새로운 세상을 맞이할 것인지는 개인이 선택할 몫이긴 하지만 대세는 전체주의에서 개인주의로 넘어가고 있다는 자명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