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비해 게임 산업이 커지고 영역의 분화가 늘어났으며 업계에서 차지하는 위상도 달라지는등 그저 애들만 하는 단순한 놀이 차원을 넘어선 지 오래지만, 게임을 접한 적이 없는 20세기 어른들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게임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더 많다.
게임에 관한 여러 사회현상 이야기는 차치해두고, 단지 내가 관심이 있던 것은 '왜 어린아이일수록 게임을 좋아하고 빠져드는 것일까?'에 대한 것이었다. 이점은 생각지 못한 전혀 다른 상황에서 답을 구할 수 있었다.
내가 회사에서 팸플릿 표지 디자인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었는데 나는 디자인 전공도 아니고 어쩌다 떠맡은 일이라 빨리 털어버리려고 대충 4개 도안을 일러스트레이터로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만들어놓고 퇴근했다. (이게 화근이었다. 2개만 보여줬어야 하는 건데...)
어차피 결재하는 임원들은 일러스트레이터는커녕 컴퓨터도 제대로 못 다루는데 당연히 결재가 빨리 날것이라 생각하고 아무거나 선택되면 그대로 인쇄업체에 주문만 넣고 넘기려 했다.
그런데 다음날 출근해보니 의외로 내가 만들어간 디자인들이 괜찮았던 것인지 형편없었던 것인지 계속 재수정 의뢰만 들어와서 아침 회의시간부터 퇴근할 때까지 하루 종일 각각의 시안을 고쳐가며 몇 번씩 다시 결재를 맡느라 진땀을 뺐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회의에 참여한 각 임원들이 자기 의견이 반영된 수정안을 볼 때마다 상당히 재미를 느낀 것 같다. "이번에는 여기 색을 바꿔볼까? 문구에 박스를 추가해볼까? 뒤에 선을 빼는 건 어때?" 하며 이런저런 주문을 계속 쏟아 내는 것이었다. (답답하면 니들이 뛰던가...)
임원 입장에서는 말로만 아무렇게나 지껄여대면 알아서 내가 수정해주고 빠르게 결과물을 보여주니 이처럼 재밌는 게 없었나 보다. 마치 게임하듯이 (말로만)적극 개입해서 이리저리 조종해댔다. (덕분에 결과물은 엉망이 되었다.)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해도 되는 일보다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더 많다.
그런 상황에서 게임 안에서는 내가 누르는 대로 조종이 가능하며 그것으로 결과가 바뀌니 재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실제의 공부나 운동은 결과가 바로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데 반해 게임은 즉각 반응이 나타나니 빠져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른이 낙서로 가득 찬 종이라면 아이는 빈 종이라서 어느 곳 에라도 쓸 수 있다. 그만큼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데 유리한 것이다. 그 종이에 새로운 게임이 쓰여간다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임원들에게 팸플릿 표지 디자인은 종이 한 귀퉁이 빈 공간에 새로운 것을 쓰는 일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