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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요일엔 이가체프 May 08. 2016

가장 가깝고 커다란 이름, 엄마


 우리집에서 나는 영락없는 막내딸 노릇을 한다. 어릴적부터 엄마가 주방에서 요리를 하거나 주방일을 하실 때면 엄마 옆에서 재잘재잘 수다를 떨었고, 종종 엄마 품에 포옥 안겨서 엄마 냄새를 맡으며 잠이 드는 걸 좋아했다. 나이가 들었다고 달라지는 건 빈도수의 차이일 뿐 여전히 나는 엄마의 가장 가까운 수다쟁이 딸이고, 재롱둥이 막내이다.


 엄마가 좋다고 엄마 팔에 매달리며 온갖 애교를 부리던 나는 어릴적 엄마에게 종종 이런 질문을 했다. '엄마는 외할머니랑 따로 사는데 엄마가 보고싶지 않아?' 하루라도 엄마 곁을 떠나 있으면 엄마가 보고 싶어 울었던 어린이에게 그것은 커다란 의문사항이었다. 엄마 없인 못 살 거라고, 결혼해도 엄마랑 같이 살 거라고 말하던 어린 아이에게 내리사랑이란 말 또한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럴때마다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 지금은 엄마 없으면 못 살 것 같지? 그런데 결혼해서 애를 낳고 하면 네 아이가 제일 우선이 되는거야. 안 그럴 것 같지? 엄마도 그랬어.' 그러면 나는 또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나는 안 그래. 애를 낳아도 엄마가 우선일걸.' 이렇게 말하는 어린 나를 바라보며 엄마는 나중에 엄마 모른 척 하지나 말라고 웃었고 나는 그 말이 그렇게 서운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출산이라는 것을 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알 수 없는 딸들의 물음표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어린 아이의 내가 조금씩 커 가면서, 똑같은 질문과 똑같은 대답이 반복되면서 나에게 '나의 엄마'는 엄마가 보고싶다고 울지 않는 어른의 모습으로 자리잡았고, 엄마보다는 자식을 먼저 챙기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것이 엄마라는 존재의 어른스러움과 같이 인식되었다.



 10년 전, 엄마의 생신일이었다. 가족이 퇴근하고 모이는 시간이 늦어 늘 생일파티는 전날 자정에 하는 우리집 나름의 방식이 있었다. 그날도 우리는 자정이 되어 생일 케이크에 촛불을 밝혔다. 엄마는 우리가족의 행복과 건강을 기원하며 '후'하고 힘껏 촛불을 껐다. 그리고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받은 엄마는 울음을 터뜨렸다. 외할머니가 위독하다는 전화였다. 이제 막 꺼진 초의 불씨가 마지막 남은 힘으로 심지를 태우는 동안 엄마는 눈물을 흘리면서 할머니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날, 외할머니는 돌아가셨다. 그렇게 엄마의 생일은 외할머니의 기일이 되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몇 달이 지나 엄마와 산책을 하던 날이었다. 벤치에 앉아 엄마와 이야기를 나눴다. '엄마, 그래도 사람들은 참 강한 것 같아. 가족을 잃은 슬픔에 아무 일도 하지 못할 것 같은데도 장례를 준비하고 조문객을 맞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게 말이야.' 엄마는 말씀하셨다. '장례를 치를 때는 돌아가셨다는 실감이 안 나. 슬퍼할 겨를도 없이 해야할 일들이 많아서 오히려 정신없이 지나가지.'  '그런데 진짜 힘든 게 언제인지 아니?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 그냥 어느날 갑자기 엄마가 보고 싶은데, 엄마 얼굴 딱 한 번만 봤으면 좋겠는데 엄마 목소리가 너무 듣고 싶은데 어떻게 해도 이제 그럴 수가 없잖아. 그때가 너무 힘든거야.' 엄마의 목소리가 흔들렸고, 나는 엄마를 따라 펑펑 흐르려는 눈물을 애써 삼켰다. 내가 그 앞에서 더 크게 울면 엄마의 울음도 커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방안에서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오랜시간 '나의 엄마'라는 존재로만 박혀있던 엄마가, '엄마가 보고 싶은 딸'이 되어 흘리는 눈물이 너무도 커다랗게 내 마음에 와서 부딪쳤다. 너무도 당연하게도 엄마도 딸이라는 것이, 세상의 존재들이 언젠가는 겪어낼 '엄마의 부재'라는 것이 엄마의 그 한 마디에 고스란히 담겨 와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아무리 효를 행한다고 애를 써도 불효한 것만 생각날 것 같은 부족한 자식으로 살면서도 우리는 평생을 얼마나 커다란 내리사랑을 받으며 사는지 모른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야속한 말이 우리의 인생에 녹아 있다는 것도 참 부끄러운 일이다. 세상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나를 안아주는 사람, 두 글자의 이름만으로도 가슴을 울리는 사람. 오늘은 좋아하는 엄마 냄새를 맡으면서 엄마를 꼭 끌어안고 포근한 품에서 잠이 들고 싶다.


* 메인 사진은 꽃다발을 선물한 날에 찍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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