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울린 친구의 메시지.
"나는 왜 이렇게 힘든거냐, 사회생활이."
친구의 톡을 받았다. 회사에서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단다. 무슨일이냐, 누가 울렸냐고 묻는 내게 친구는 울분을 쏟아냈다. 이직한 회사에서 그간 이래저래 힘들다는 이야기를 종종 하곤 했는데 오늘은 그 쌓인 것이 터져버렸다고 했다. 너무 울어서 화장실 거울을 보다가 깜짝 놀랐단다. 사람이 힘들고 일이 힘들고 자기는 왜 이렇게 사회생활이 힘드냐고 했다. 친구는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사회 초년생이 아니었다. 회사 화장실에서 숨죽여 눈물을 쏟았을 마음이 오죽했을까.
어디 이것이 친구만의 이야기일까.
사회 초년생 시절, 사회생활 하면서 회사 화장실에서 남몰래 눈물 훔쳐보지 않은 사람 없을 거란 말을 흔히 듣곤 했다. 모든 것이 낯선 신입 시절엔 화장실의 그 좁고 좁은 칸이 모든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안식의 공간일 때도 있었다. 초년생 때는 초년생대로, 경력이 쌓였을 땐 또 그것대로 사연만 다를 뿐 언제나 고충은 따라왔다. 그런 서러움은 꼭 누군가의 눈초리나 가시박힌 말 때문만은 아니었다. 스트레스의 요인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수많은 것들이 나라는 사람과 얽히고설켜서 만들어내는 복합적인 것이었으므로 늘 예측할 수 없는 범위에서 불쑥불쑥 등장하곤 했다. 이것은 어떤 특정한 사람의 유난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취약한 부분과 감정의 흐름이 다를 뿐 힘들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세상 편해 보이는 사람이라고 힘든 것 하나 없을 거라고 속내를 단정짓는 것만큼 섣부른 생각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힘들고 너만 힘든 것 아니니 유난 떨 것 없다고 말할 필요도 없었다. 애초에 누가 누구보다 더하고 덜하다는 생각은 어디까지나 자기 중심적일 수밖에 없다. 누구나 자기가 겪는 경험 안에서 가장 큰 감정을 느끼는 것이니까. 그래서 나는 오늘 힘든 하루를 보낸 친구가 내민 손을 기꺼이 덥석 잡는다. 그것은 친구만의 이야기가 아니었으므로. 그것은 친구의 이야기, 나의 이야기, 내 앞에 앉은 동료의 이야기이며 우리의 이야기였으므로. 우리는 저마다 스트레스를 극복하는 노하우 혹은 버틸 수 있는 이유 하나씩을 품고서, 또는 그 방법들을 찾아가면서 살아간다. 자신이 선택한 길 위에서 계속 갈 것인지 다른 길로 돌아설 것인지에 대한 선택지는 결국은 자신이 쥐고 있으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을 걷는 각자의 이유를 품안에 가지고서 살아가는 것일테다.
한참동안 울분을 쏟아내던 친구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내 몇 년 경력, 그 시간동안 내 얘기 들어주느라 네가 더 고생이네."
그래서 나는 말한다.
"네가 겪는 고생에 비하면 이건 고생도 아니지."
그리고 우리의 대화는 계속됐다. 나는 힘이 빠진 친구에게 비도 오는데 얼른 집에 가서 맛있는 거 먹으면서 털어내라고 말했고 그 말 어딘가에서 또다시 울컥했던 친구는 니가 날 또 울리냐며 툴툴거렸고, '하늘도 울고 너도 울고'라고 던진 농에 '아 슬프다'로 화답하던 친구는 이게 무슨 노래 가사였더라 하면서 노래를 찾기 시작했고 기어이 노래를 찾아낸 우리의 대화는 DJ. DOC의 <여름이야기>가 이렇게 슬픈 가사였냐는 이야기로 흘러 눈물로 시작된 대화는 엉뚱한 곳에서 마무리 되었다.
그렇게 또 하루의 위로를 건네고 받는 오늘이 지난다. 별것 아닌 것 같은 오랜 벗의 수다가 오늘은 위로의 역할을 맡는다.
누구나 그렇다. 나름의 방식으로 위로를 건네고 위로를 받으면서 살아간다. 그렇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하루의 설움을, 고단함의 고개를 넘어간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삼천포로 흘러간 이야깃자락을 잡고 한바탕 웃으며 설움을 털어낸다.
* 사진은 서울의 하늘을 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