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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안 May 19. 2021

무민 파파는 말했다

무민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

2021년 4월 18일, 서울 성수의 그라운드시소에서 진행 중인 <무민 오리지널: 무민 75주년 특별 원화전>에 다녀왔다. 그곳에서 만난 각 무민 시리즈와 그 감상을 몇 편의 글로 나눠 적어보기. 전시는 올해 11월 14일까지 같은 장소에서 열린다. 


<혜성이 다가온다> 


무민 가족은 혜성이 다가온다는 소식이 조금은 두렵기도 했지만 의연히 자신들과 타인들을 이끌고 몸을 피한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춤을 춘다. "우리 모두가 춤을 출 시간은 지금뿐이야 .제발! 지구는 이틀 뒤에나 멸망한다고!" 지구가 멸망할 정도의 큰 사건이기에 오히려 '뒷일' 생각 안 하고 춤 출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본질은 외력으로 벌어지는 어떤 사건이 아니다. 통제할 수 없는 외력 앞에서 내가 선택할 내력과 그 강도, 거기에 주목하고 싶다. '인생도 어떻게 보면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내력이 있으면 버티는 거야.'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대사처럼. 무민 가족은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후회 없이' 하기로 했다. 그게 무민 가족의 내력이었다.


다행히 크게 위험한 혜성이 아니었고, 무민은 집으로 돌아와 생각한다. '세상 모두를, 숲과 바다와 비와 바람과 햇빛과 풀과 이끼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그리고 그 모든 것 없이는 한시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내력으로 외력을 버텨낸 무민 가족은 선물처럼 일상을 맞이한다. 무민 가족이 위기에서 보여줬던 내력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었던 듯 싶다. 무민이 사랑한다고 언급한 저 모든 것들이 오랫동안 내력의 뿌리가 되어준 게 아닐까.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사회의 그럴듯한 기준과 거리를 두는 것, 일어날지 아닐지 모를 어떤 일에 대해 신경을 끄는 것이 나도 이전의 나보다 더 가능해진 배경에 실은 자연, 책, 아침 그런 것들이 있다. 내 곁에 늘 있어왔지만 보지 못했던 작은 것들.


<무민파파의 회고록> 


무민 파파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감행한 모험을 무민과 무민의 친구들에게 전하기 위해 회고록을 쓴다. 깊은 밤, 정원을 나는 반딧불이를 보며 펜을 잡는 무민 파파. 모험 중에 만났던 친구 호지스, 요스터와의 대화는 문장들이 더없이 멋졌다. 바다, 하늘, 구름이 내 눈앞에 선명히 그려졌다. 그런 것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얼마나 행복한 지, 나도 경험해봐서 안다고 말할 수 있어서 좋다.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어둠은 빛이 쉬러 갈 시간을 충분히 주느라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자리를 차지해 갔다. 서쪽 하늘에 불그스름한 생크림 덩어리가 던져진 듯 떠 있는 작은 구름이 바다에 비쳤다. 바다는 빛나는 거울 같았고, 전혀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무민파파: 구름을 가까이에서 본 적 있어?
호지스: 응 책에서.
요스터: 구름은 거품을 낸 달걀흰자 같아.

우리는 바위에 나란히 걸터 앉았다. 해초 냄새가 기분 좋게 풍겨왔고, 아마도 바다 냄새일 다른 어떤 향도 났다. 나는 너무 행복한 나머지 이 행복이 사라진다 해도 전혀 두렵지 않았다.'


궂었고 맑았고, 아프고 그리운 시절이 펜 끝을 스쳐갈 때 나라면 어떤 감정일까. 회고록까지는 아니더라도 요즘은 지난 시간과 지난 시간이 될 현재의 시간을 글로 쓸 때면 먹먹한 감정, 미안한 감정이 잦다. '떠난다'는 것이 '상수'가 되고 보니 '변수'로 작용하는 건 떠난 이후의 상황, 즉 '미래'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떠나기 전의 시긴이라고 말하고 싶다. 2020년 하반기 아이엘츠를 본격적으로 준비하는 동안에도 학교 최종 합격 후 떠날 날을 상상하면 그리움을 미리 당겨 쓰는 것 같았지만 상상하던 날이 현실로 가까워질수록 '과거'와 '현재'는 예상한 것보다 더 힘 센 변수로 다가왔다. 


변수 앞에서는 유연해지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다. 힘을 빼고 버릴 것은 버리고. 그렇게 해서 남는 단 하나, '나 자신의 마음'을 한 번이라도 더 들여다 보고 한 번이라도 더 보듬어주는 수밖에. 클리셰지만 마음이 시키는 대로, 충실히 움직이고 충실히 멈추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래서인지 무민파파가 전하는 이 문장도 뭉클하게 와닿았다. 앞으로의 가능성이 많든 적든, 의미는 도처에 있고 중심에는 내가 있다.


'내가 보기에 문제는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 끊이지 않아서 끝없이 경험하고 고민하고 정복해야 하고, 가능성이 무궁무진해서 생각하려고 들면 뒷목의 털이 곤두설 정도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중심에 내가 있고 당연히 내가 가장 중요하다. 요즘은 전처럼 가능성이 많지 않아 걱정이다. 무엇 때문인지 의문이다. 어쨌든 나는 여전히 중심에 있고 그래서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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