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민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
2021년 4월 18일, 서울 성수의 그라운드시소에서 진행 중인 <무민 오리지널: 무민 75주년 특별 원화전>에 다녀왔다. 그곳에서 만난 각 무민 시리즈와 그 감상을 몇 편의 글로 나눠 적어보기. 전시는 올해 11월 14일까지 같은 장소에서 열린다.
<보이지 않는 아이>
어른에게 받은 상처 탓에, 모습이 보이지 않은 채 몸에 달린 방울만으로 자신이 존재함을 드러내는 아이 '닌니.' 무민 가족은 닌니가 다시 눈에 보일 수 있도록 돕는다. 무민 마마는 닌니의 침대 머리맡에 사과 한 알, 주스 한 잔, 줄무늬 캐러멜 세 개를 나란히 놓아두며 말한다. "닌니, 이제 자려무나. 늦잠 자도 괜찮단다. 아침 커피는 식지 않게 보온 덮개 아래에 놓아둘게. 혹시 무섭거나 뭐가 필요하면 내려와서 방울 소리만 내렴." 네가 원하는 대로 해도 괜찮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이야기 해달라. 사랑을 정의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닌니는 모습을 되찾았을까. 되찾았다. 무민 가족과 닌니가 하루는 바닷가로 향했는데 이때 무민 마마에게 장난을 치다 바다에 빠진 무민 파파를 본 닌니가 크게 웃는다. 그러면서 닌니는 모습을 드러낸다. 난로에 언 손이 녹듯 얼어 있던 마음이 무민 가족의 따뜻한 환대로 서서히 녹다가 마침내 '찐 웃음'과 함께 다 풀린 닌니. 보이던 걸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도 사람이고 보이지 않던 걸 보이게 만드는 것도 사람이라면, 나는 두 가지 모두에 해당하는 사람이었다. 앞으로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상처를 줄 수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상처를 주는 것, 즉 누군가를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지워버리는 건 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이다. 잘못한 기억이 많다. 그런 기억이 떠오를 때면 미안하다는 말도 감히 못할 만큼 죄스럽다. 앞으로도 다르지 않을 것이란 문장이, 그렇다면 앞으로도 잘못하겠다는 뜻인지 묻는 이에게 설명하고 싶다. 상처를 주는 건 내 모든 최선을 쏟아 피할 것이다. 그럼에도 어떤 이가 나의 말과 행동으로 상처를 받았다면 '의도는 없었지만' 같은 말 없이 사과할 것이다. 드러내 보이는 사과도 그 사람에게 상처일 때는 내 안에서 더 오래 사과할 것이다.
상처를 받는 것. 이 영역은 다짐이나 준비라는 것이 애초에 소용이 없다. 지금껏 나에게 온 상처 중 대기 번호표 뽑고 내가 부를 때 온 건 없었으며 예지몽 같은 것에 먼저 나와 준 것도 없었다. 한번 상처를 입으면 다시는 사람 같은 건 믿지 않겠다고 했다. 상처에다 현미경을 대고 눈의 실핏줄이 터지도록 그걸 보거나 포클레인을 끌고 와 그걸 또 와장창 헤집었다. 상처를 낫게 하고 싶은 게 아니라 외려 상처가 나에게 계속 붙어 있기를 바라는 사람 같았다. 자기가 받은 상처로밖에 자기를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은 남에게 주는 상처에도 무감해진다.
내가 인정해야 할 것은 두 가지였다. 상처는 원래 부지불식간에 온다는 사실, 상처는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 인정이 곧바로 일상의 변화를 가져오는 건 또 아니어서 변화를 위해서는 분투에 가까운 나홀로의 애씀이 필요했다. 이를테면 이런 것. 금방 온 상처는 툭, 가볍게 툭 쳐 내 몸에서 떨어뜨려내기. "뭐야, 꺼져." 하면서. 묵은 상처는 어찌하나. 이 상처가 왜 나에게 왔는지, 내가 잘못해서인지 되묻지 않기. 남이 잘못한 경우라면 정당하게 언어로 이야기하기.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내 손으로 만들기. 차마 이야기할 수 없는 어떤 이유가 있다면, 그건. 그건 나도 적지 못하겠다. 발화되지 못할 이유에 판단이 개입할 수는 없다.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노력이 '긴장' 수준에 가깝다면 나에게 찾아온 상처를 대하는 자세는 '이완'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긴장과 이완의 반복이 하루를 메꾼다. 긴장해야 할 때 이완하기도, 이완해야 할 때 긴장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언제쯤 삶에 능숙해질지 궁금해하기보다 이 문장과 같은 태도를 나에게 답으로 전한다. '내게 삶은 여전히 어렵지만 그런 난해함을 삶의 일부로 껴안고 살아간다. 또다시 내 앞에 물살 거센 긴 강이 놓일 수 있다는 것을 긍정하면서 말이다.' -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은유, 서해문집, 2016년, 12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