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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안 Jul 28. 2021

무민이 겨울을 보내는 방법

무민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

2021년 4월 18일, 서울 성수의 그라운드시소에서 진행 중인 <무민 오리지널: 무민 75주년 특별 원화전>에 다녀왔다. 그곳에서 만난 각 무민 시리즈와 그 감상을 몇 편의 글로 나눠 적어보기. 전시는 올해 11월 14일까지 같은 장소에서 열린다.


무민들은 겨울잠을 잔다. 그래서 겨울을 모른다. 잠들어 있는 동안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는 것. 무민들 중에서는 처음으로, 우리가 아는 그 주인공 '무민'이 겨울이 지나기 전에 겨울잠에서 깨고 만다. 무민 마마를 깨워보지만 반응이 없고 바깥으로 나가보니 태어나 처음 보고 느끼는 감각들이 몰아친다. 새롭거나 낯선 환경을 받아들이기 전의 그 '정신없음'이 무민을 에워싼다. 이렇게 시작되는 이야기가 무민 시리즈 중 하나인 <무민의 겨울>이다. 1957년 토베 얀손이 무민 시리즈 중 다섯 번째로 출간한 이야기.


<무민 오리지널> 전시에서는 전시의 큰 부분 중 하나를 '무민의 겨울' 관련 소개와 그림이 차지한다. 전시 후반부의 한 공간에 들어서니 면으로 '무민의 겨울' 애니메이션이 흐르고 무민의 나레이션과 음악이 더해졌다. 마련된 간이 의자에 앉아 가만히 나레이션과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처음 만나는 환경이 두렵지만 눈보라에 맞서 한 걸음씩 내딛는 무민의 모습과 이 나레이션이 마음을 움직였다. "이제 나는 다 가졌어. 한 해를 온전히 가졌다고. 겨울까지 몽땅 다. 나는 한 해를 모두 다 겪은 첫 번째 무민이야."




'무민의 겨울'을 더 알고 싶어서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출판사 '작가정신'이 '따루 살미넨'의 번역으로 2018년 출간한 책이었다. (2021년 2월에는, 토베 얀손이 1961년 이탈리아에서 이 책을 번역 출간할 때 그린 컬러 삽화 여섯 점이 더해진 새 번역서가 같은 출판사를 통해 출간됐다고 한다.)


200여 쪽에 이르는 상세한 이야기로 접한 '무민의 겨울'은 개인과 환경의 관계, 그 관계가 만들어내는 복합적인 감정을 다루고 있었다. 단순히 도전, 용기 등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특별한 도전을 앞두고 있거나 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읽는 동안 시사점을 얻을 만했다.


무민은 조금씩 화가 나기 시작했다. 벌떡 일어난 무민은 눈보라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도 무민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발로 눈을 걷어차며 조용히 투덜거리기만 했다. 그러고 나자 무민은 기운이 빠졌다. 무민은 눈보라에서 등을 돌려 싸움을 끝냈다. 바로 그때 따뜻한 바람이 느껴졌다. 바람은 무민을 눈보라 한가운데로 가볍게 이끌고 갔고, 무민은 허공을 나는 듯했다.

무민이 온몸의 힘을 빼고 생각했다. '나는 공기고, 바람이야. 나는 눈보라와 하나야. 지난 여름에도 딱 이런 느낌이었어. 그때도 처음에는 파도에 맞서서 씨름하다가 몸을 돌렸더니 밀려드는 파도에 어우러져서 무지갯빛 물거품 속에서 코르크 마개처럼 둥둥 떠다니다가 조금 겁을 먹을 때쯤 바닷가 모래바닥에 딱 도착했지.' (135-136쪽)


'무민의 겨울', 이 이야기에서 내가 얻은 가장 큰 시사점은 한 단어로 표현하면 '순리'이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일을 두고 무리하지 않기, '다 때가 있다'는 말의 힘을 믿기, 좋은 기억이나 좋은 감정이라 해도 꾹 붙들고 있으려고 하지 않기, 고통을 분석하는 일에 잠식되기보다 고통의 의미를 그저 스스로 발견하기.


순리대로 사는 건 여전히, 당연히, 나에게 어렵다. 늘 반대로 한다고 봐도 좋겠다. 조급하고 초조하고 불안하고 흥분하기 바쁘다. 매사에 힘을 잔뜩 주기만 한다. 안 그런 척 하는 기술만 날로 늘어가는 것도 같다. 그래서인지 힘이 살짝 풀리거나 힘을 조금 풀어도 괜찮겠다 싶을 때는 큰 숨을 몰아서 내쉰다.


무민은 봄이 오면 숨을 몰아쉰다는 생각으로 겨울을 이 악물고 버티기보다 겨우내 틈틈이 숨을 쉰다. 그렇게 숨을 쉰 만큼 생겨난 마음의 폭에 겨울의 경험들을 차곡차곡 담았다. 버티지 않았기 때문에, 즉 흘러갈 줄도 알게 됐기 때문에 무민은 마침내 겨울의 경험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겨울의 경험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나면 그 귀한 의미가 이런 과정들을 가능하게 한다. 나만의 봄을 적극적으로 만들어 가는 것, 만들지 않았지만 감사하게도 찾아와주는 봄에는 감사할 줄 아는 것. 겨울은 겨울, 봄은 봄인 단절이 아닌 겨울과 봄의 연결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연결은 공허를 지운다. 그리고 나의 '서사'가 된다.


봄이 왔지만 무민이 상상했던 모습 그대로는 아니었다. 이제 봄은 무민을 낯설고 적대적인 세상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해방의 시기라기보다 무민이 극복하고 받아들인 새로운 경험이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무민은 봄이 아주 길어서 오래도록 기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날마다 아침이면 무민은 가족들 가운데 누가 일어날까 하는,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기대에 부풀었고 너무 기대한 나머지 겁이 날 지경이었다. 무민은 거실을 돌아다닐 때마다 어느 한 군데라도 부딪히지 않으려고 무척 조심했다. 그러고는 골짜기로 달려 나가 킁킁거리며 새로운 냄새를 맡고 간밤에 무슨 일이 일이났는지 살폈다. (157쪽)


'무민의 겨울'의 주인공은 무민이지만 무민만큼이나 확실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캐릭터도 있다. 바로 '투티키'이다. 토베 얀손이 평생의 반려자로 삼은 '툴리키 피에틸레'의 이름에서 '투티키'라는 캐릭터 이름이 나왔다고 한다. 투티키는 '무민의 겨울'에서 요란스럽게 다정하지는 않아도 무민의 든든한 친구가 된다.


투티키가 말했다. "이제 탈의실이 다시 탈의실이 됐어. 무더위가 찾아오고 사방이 초록빛으로 물들고 네가 따뜻하게 달구어진 부잔교에 엎드려서 찰랑거리는 물소리를 들을 때가……." 무민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겨울에는 왜 그렇게 말해주지 않았어? 그랬으면 위로가 되었을 텐데. 내가 여기에서 사과나무가 자란다고 말했었지. 그랬더니 네가 뭐랬어. 하지만 지금은 눈이 자라고 있다며. 그때 내가 우울해하는 줄 몰랐어?" 투티키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모든 일은 직접 겪어 봐야지. 그리고 혼자 헤쳐 나가야 하고." 태양이 내뿜는 열기가 점점 더 뜨거워졌다. (159쪽)


나는 '잘 될 거야', '힘내' 같은 말을 남에게 잘 할 줄도 모르지만 내가 듣는 것도 썩 좋아하지도 않는다. 왜 그럴까. 투티키의 말, "모든 일은 직접 겪어 봐야지. 그리고 혼자 헤쳐 나가야 하고."로 어느 정도 대답이 될 것 같다. 일이 잘될지 안될지 알 수 없고 힘내는 것도 내 뜻대로 되지만은 않으니까.


그게 마냥 냉소는 아닐 것이다. 투티키가 한 말의 뜻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면 무기력해지기보다 되레 '일단 해보자'는 마음이 생긴다. 그렇게 뭐라도 해보려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그때의 내 역할은 '지켜봐주기', 그거면 충분하다. 투티키는 무민이 겨울을 건너는 내내 그 옆에 있었다.


이야기가 끝을 향해 가면서 무민과 친구들에게도 봄이 오고 있었다. 겨우내 꽝꽝 얼었던 바다가 날이 풀리면서 조금씩 조각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언 바다 위에서 놀던 '미아'는 둥둥 뜬 얼음 조각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있었다. 무민은 미아를 구하러 물에 뛰어들었다. 이때 투티키는 화로에 물을 끓이면서 생각한다.


'뭐, 그렇지. 모험담은 늘 이런 식이지. 구하고 구해지고. 그 뒤에서 영웅들을 따뜻하게 덥혀 주려고 애쓰는 이들 이야기도 누가 한 번쯤 써 주면 좋겠어.' (163쪽)


위 생각은 투티키의 성격을 한번 더 잘 드러내주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거기에 또 하나 더. 투티키와 함께 사는 '뾰족뒤지'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은 채로 조용히, 자신의 할일을 한다. 무민은 투티키에게 뾰족뒤지들에 대해 묻고 투티키는 이렇게 답한다.


"글쎄, 모든 걸 꼬치꼬치 캐묻지 마. 비밀을 조용히 간직하고 싶어 할지도 모르니까. 쟤들이든 눈이든 신경쓸 필요 없어." (34쪽)

겨울은 언젠가 끝나기 때문에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겨울의 한가운데서도 의미를 찾으려는 이들이 있기 때문에 의미 있는 것임을, 봄의 귀함을 알고 봄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있기에 겨울은 빨리 잊어야만 하는 어떤 날이 아님을 '무민의 겨울'이 다시 알려준다.


'무민의 겨울'이 전하는 메시지를 머리로만 알지 않는, 조금 더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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