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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안 Jul 23. 2021

'이렇게' 영어를 배우는 아이들

나의 영어학원 아르바이트 이야기

2021년 4월 30일, 유학을 앞두고 퇴사를 했다. 출국 전까지, 정확히는 서울에서 대구 본가로 내려가기 전까지 두 달 여를 앞둔 때였다. 인생의 큰 변화이자 도전에 앞서 차분히 '나 혼자', '정리하는' 시간을 보내고 싶어 빠른(?) 퇴사를 했지만 그렇다고 그 시간을 마냥 '일 없이'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생활비를 벌어야 한다는 걸 생각하면 일 없이 보낼 수 없었다고 해도 맞다.


4월 말부터 5월 첫 주는 아르바이트를 알아보는 데 노력을 꽤 쏟았다. 그러다 회사에서 가깝게 지내던 동료가 연락을 줬다. 자기 친구가 일하는 영어학원이 아르바이트 직원을 구하는데 조건이 딱 나와 맞아 보인다면서 말이다. 강사 자리가 아니라 사무직인데 교재 검수, 때에 따른 원어민 강사와의 소통 등을 고려할 때 어느 정도의 공인된, 검증 가능한 영어 실력이 필요하다든지. 감사하게도 면접 후 합격했다.


이 학원은 영어 유치원과 초중등 영어학원을 겸했다. 등하원 시간이나 쉬는 시간에 아이들이 질서 있게, 안전하게 움직이도록 안내하는 역할도 했기에 아이들과 짧게 나마 이야기를 나누거나 아이들의 모습을 한 걸음 떨어져 볼 때가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요즘 중산층 또는 중산층에 가까운 가정의 아이들의 영어 공부'에 대해서 알고 또 생각해볼 기회도 있었다.


다만 허락 없이 이렇게 아이들의 이야기를 적는 데 대한 미안함이 크다는 것, 그렇기에 더욱 관찰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대상화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썼음을 말하고 싶다. 아이들이 언젠가, 어떤 방법으로 이 글을 본다면 글의 내용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임을 알 수도 있을 테니까. 이 아이들만이 아니라 모든 아이들은 어른의 목적과 의도에 맞게 편집될 이유를 갖지 않으니까.


* 아래에 서술한 이야기들은 2년도 아닌 '고작' 두 달 여를 영어학원에서 '단순 사무 보조 아르바이트'로 일한 것을 바탕으로 합니다. 즉,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자 제한적인 시선임을 밝힙니다. 특정 학원과 그 교육 방식, 교육 서비스 제공자 및 수혜자에 대한 비방 의도가 전혀 없음도 덧붙입니다. 이 글에 어떤 식으로든 오해나 호도의 여지가 있다면 작성자 개인의 불찰이자 부족함 탓입니다.


머리 길이나 모양만 보고 He와 She를 적는다


아이들이 사용하는 교재는 주로 미국에서 쓰이는 교과서 같은 것들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나라에서 만든 교재를 쓰는 게 영어 공부에 도움이 된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언어라는 건 그게 사용되는 사회적, 문화적 배경과 맥락도 함께 이해할 때 보다 원활히 습득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언어를 배울 때는 눈에 보이는 글자 그 이면의 함축과 메시지를 비판적으로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어가 '나만의 도구'가 아니라 타인과 그 집단의 생각을 무분별하게 수용하는 데 쓰이는 수단에 그칠 뿐이라 생각한다. 아이들이 이같은 일종의 '리터러시'를 자연스럽게 발휘하도록 기대하기보다 교육을 제공하는 이들이 더욱 고민해야 하겠지. 


미국의 젠더 인식과 관련 정책 등에 대해 나는 자세히 아는 바가 없다. 그래서 조심스럽지만, 적어도 내가 본 일부 미국 교재에는 이런 부분이 있었다. 왼쪽에 제시된 인물 그림을 보고 문장 하나를 완성해 적는 문제인데 그림 속 인물은 머리가 길거나 짧은 식으로만 표현돼 있다. 다시 말해 '전형적인' 판단을 하면 He나 She 중 어떤 주어를 쓸지 정하기 어렵지 않지만 '긴 머리의 남성', '짧은 머리의 여성'도 있지 않느냐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이 문제는 사실상 풀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아무렇지 않게, 어쩌면 10초 안에도 풀 문제 하나가 아이들에게는 얇지만 한겹 한겹, 고정관념을 쌓아주는 것이 될 수 있다. He와 She라는 단어를 가르쳐야 한다면 꼭 그 방법뿐일지 생각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아이들이 쓸 단어장에 들어갈 삽화나 시험 문제에 들어갈 그림을 찾는 일을 한 적 있다. 그럴 때 나는 가급적, '익숙한' 그림을 넣지 않으려 했다. 축구하는 여성, 요리하는 남성과 같이. 예전에 한국에서도 초등학생용 교과서에 출근하는 아빠, 집에서 요리하는 엄마가 등장하는 것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 적 있지 않나. 그와 같은 맥락에서다. 설령 아이들이 자신의 가정에서 아빠는 출근하고 엄마는 집에 있는 모습을 보며 자라고 학교에서는 남자 아이들은 축구를 하고 여자 아이들은 교실에 있는 모습을 보고 있다 해도 '그것만이 현실이자 답'이라고 믿게 할 수는 없다. 그래서도 안 되고. 잠깐 보고 지나갈 그림 하나에서도 아이들이 '다른 선택지'를 인지할 수 있기를 바랐다. 내가 보고 듣고 경험한 선택지만큼 내 삶도, 나아가 사회도 확장되니까. 


'말이 안 되는 말'이라는 말의 슬픔(?)


한 아이가 문제의 답으로 이런 문장을 적었다. 'The students are not allowed to stand property (properly).' 학생들은 똑바로 서있으면 안 된다'는 뜻. 이 답에 대한 채점 선생님의 코멘트는 이랬다. 'Grammatically correct but doesn't make sense.' 문법적으로는 맞지만 말이 안 된다는 말. 똑바로 서있는 게 왜 안 되느냐고 생각할 수 있고 어쩌면 그 생각이 일반적이겠지만 나는 조금 슬펐다. 아이가 자신이 아는 단어 선에서, 어쩌면 급하게, 문장을 만드느라 그렇게 적은 것뿐일 수도 있지만 만약 문장에 자기 나름대로의 이야기가 담긴 것이라면? 전형적이고 상식적인 수준의 답에 그 아이만의 생각이 가려지는 것이 된다. "흥미로운 답변이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이야기해줄 수 있어?" 이렇게 물을 수 있는 교육을 상상해본다.


여담으로 'our family'에 대해서도. 어른들도 한국인이라면 영어를 처음 배울 때 저렇게 쓰고는 한다. '우리 가족'이라는 말을 흔히 쓰는 한국인과 한국어 특성이 영어 사용 때도 그대로 반영되는 것. 영어로는 my family가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는 한다. 아이들이 적은 답에서 our family를 심심찮게 봤다. 나는 그 표현이 정말 귀엽다. 어른이 사용해도 마찬가지다. 우리. 이 단어가 주는 동글동글하고 포근한 느낌을 our family라는 단어를 쓴 그 사람도 함께 알고 있구나, 생각하게 되어서. our family를 틀린 표현이라고만 여기기보다 '한국어 사용 문화를 고려해보니 이 표현도 맥락이 있구나' 이해하고 그 표현을 사용하는 사람의 '마음'을 한번 봐줄 수 있는 여유가 있으면 좋겠다. 


익숙하면 잘 보이지 않는 것


하루는 그런 상상을 하며 아이들의 등원을 기다렸다. '원생 중에 장애를 가진 아이도 있을까?' 내가 일하던 동안엔 보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휠체어를 타는 아이라든지, 누군가의 물리적 도움이 있어야 이동이나 수업이 가능해서 수업에 누군가와 동행하는 아이를 보지 못했다. 휠체어를 탄 아이가 이 학원까지 도착해 학원 안을 왔다갔다 한다고 가정할 때 불편함은 없을까, 듣지 못하거나 보지 못하는 등의 이유로 혼자서는 학습을 원활히 이어갈 수 없는 아이들은 부가적이지만 사실상 필수적인 그런, 교육을 이같은 '대중적인' 학원이 아닌 어떤 곳에서 받고 있을까. 받을 수 있는 곳이 '선택 가능할' 만큼 많을까. 너무도 익숙한 풍경에서 무엇이 보이지 않는지를 힘주어 떠올려 보면 '더 나은 길'이 있다고 늘 생각해왔다.


아이들의 '귀여움'을 참을 줄 알기


귀엽다는 말에는 크게 두 가지 뉘앙스가 있다. 예쁘고 순수하다는 뜻이 하나. 상대적으로 지위가 높거나 힘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어쩜! 귀여워"이라는 추임새를 덧붙여 전하는 뜻도 있다. 즉 "네가 모르는 건 당연해. 내가 해줄게"의 뜻이다. 기본적으로 상대와 나 사이의 지위에 차이가 있음을 판단하고, 나아가 상대방의 생각, 행동에 대한 나만의 평가를 내릴 때 후자의 뜻이 담긴 '귀엽다'가 표현된다. '나쁜 의도' 없이 하는 귀엽다는 말도 상황과 맥락에 따라서는 불필요한 말, 불쾌한 말이 될 수 있는 이유다. 엄밀히 말하면 예쁘고 순수하다는 그 뜻도 어느 종류의 판단과 평가가 전제됨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면 아이들을 보거나 아이들과 이야기 나누다가도 아이들 앞에서는 귀엽다는 말을 소리내지 않으려 노력하게 된다.


비슷한 맥락에서 "눈이 참 크고 예쁘다", "키가 크다", "피부가 뽀얗다" 같은 말도 하지 않는 게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직 부족한 나는 불쑥, 아이들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상대가 성인이었으면 쉽게 하지 않았을 텐데 어린이라는, 그러니까 나보다 상대가 어리다는 이유에서 참지 못한 말들. 말하고 나서 많이 반성했다.


내가 그럼에도 한 가지 꾸준히 지킨 것은 '아이들에게 존댓말 쓰기'이다. 특히 처음 본 어린이에게는. '누구 씨'라고까지는 하지 않고 '누구야'라고 부르되 "안녕하세요", "오늘 날씨 좋죠?", "이건 뭐예요?"와 같이 존댓말을 썼다. 이 부분은 <어린이라는 세계>(김소영 저, 사계절, 2020년)의 영향이다.


반말-존댓말 관계에서는 반말을 하는 쪽이 '존댓말을 듣는다'라는 이유로 더 권위를 얻는다.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는 사람보다 그 말을 듣는 쪽이 더 중요한 사람처럼 보이게 마련이다. 그래서 존댓말 하는 사람의 의견은 자주 무시된다. 가뜩이나 신경 쓸 것도 많은 어린이로서는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중략) 나는 어린이들의 존댓말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기로 했다. 마음 같아서는 남녀노소 누구나 서로서로 존댓말을 쓰고 친한 사이에만 반말을 쓰는 세상이 되면 좋겠지만, 그런 날이 오기 전까지는 어린이의 말에 더 많이 귀를 기울이겠다고 다짐한다. (192쪽)


상대가 어른이라면 하지 않을 말이나 행동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어린이가 너무너무 귀여워도 계속 바라보거나 어르는 말투를 쓰거나 하지 않는다. (중략) 어린이에게 존댓말을 써 보면 자기 목소리가 얼마나 어른스럽게 들리는지 알게 된다. 의외로 반말을 쓸 때보다 대화의 분위기도 훨씬 부드러워진다. 어린이를 존중한다는 의지가 명확히 표현되는 순간, 어른의 여유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진짜 권위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193쪽~194쪽)


사랑스럽다고는 말해도 괜찮을까


"결혼이랑 아이 안 할 거예요. 친구랑 살고 싶은데. 파자마 파티도 하고. 오빠는 밥을 잘 안 먹고 저는 엄청 많이 먹고 고기도 많이 먹고 엄마가 오빠보다 더 크겠네 그래요." 미래의 대장부, 걸크러시가 바로 이런 것.


"오늘 옷 정말 예쁘네요! 샤랄라~" "(작은 목소리로) 오늘 내 생일이에요." 생일이라고 하얀색 드레스 같은 옷을 입고 온 아이. "우와! 축하해요! 축하의 뜻으로 포옹 한번 해줘도 돼요?" "(고개를 끄덕이며) 네."


"안녕하세요. 꼬마들! 오느라 고생했네." "(허리에 손 얹고 씩 웃으며) 선생님, 꼬마라고 하지 마세요." "그럼 뭐라고 할까요?" "음... 초딩이요." "ㅋㅋㅋ에이 그거 말고~ 초등학생이라고 할게요!"


아이들은 이를 뽑고 나면 꼭 다른 사람에게 보여준다. 입을 크게 벌리고 고개도 요리조리 들거나 숙이면서 뻥 비어버린 자리를 보여준다. 내가 있는 동안에만 두 명의 아이가 나에게 구강 구조를 뽐냈다. 껄껄ㅋㅋ


쉬는 시간만 되면 어몽어스, 문어 인형 등 그때그때 다르게 챙겨오는 장난감을 꺼내 친구들과 놀고 때로는 폴짝폴짝 뛰기도 하는 아이가 있었다. 목소리도, 웃음도 참 천진했다.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을 숨기기가 정말 힘들었던. (나 자신 기특해.) 이 아이는 그렇게 장난을 쳐도 자기만의 루틴(?) 확고했다. 자리에서 다음 수업의 책을 페이지까지 정확히 딱 펴놓고 필통도 그 왼쪽에 가지런히 둔 다음 친구와 노는 것이다. 물론 책을 펴는 그 사이에도 얼른 놀고 싶어서 마음이 바쁘단 게 손끝에서부터 파바박 느껴지기는 하지만!


"저는 학교에서 '나에게 소중한 열두 가지'를 적는데 '사랑해'를 적었고요, 아 왜냐면 저는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하거든요. 그 다음엔 뭘 적었는지 아세요? '나 자신'을 적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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