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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안 Jul 29. 2021

한여름의 두 책방

안동 <가일서가>, 남해 <아마도 책방>

서울의 자취방을 정리하고 고향인 대구로 내려왔다. 유학을 떠나기 전 3주, 온전히 가족들과만 보내는 시간. 가족들과 두 곳의 책방에 다녀온 이야기를 써보려 한다. 경북 안동의 '가일서가'와 경남 남해의 '아마도 책방'이다. 책방에 들르는 건 가족들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한 일정이라고 봐야 한다. 부모님, 남동생은 책에 큰 관심이 없다. 서울에 살 때도 가보지 않은 책방을 가보거나 '단골 책방'에 들러 쉬고 오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던 나를 위해 안동은 가일서가만을 목적으로 들른 것이었고 남해의 아마도 책방은 남해 여행 중 따로 시간을 낸 것이었다. 다시 안 볼 것처럼 지지고 볶아도, 고마운 점이 더 많다.




안동 가일서가


책을 지고 나오는 등에 여름이 잔뜩 묻었다. 햇살과 바람의 신세를 졌다.



안동이라는 지역을 떠올리면 머릿속에 그려지는 그림들이 하나씩 있지 않을까 싶다. 한옥, 하회탈, 굽이치는 강, 누군가는 찜닭일 수도. 한옥을 꼽았다면, 책에 특별한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이 책방에 가서 편히 쉬다 올 수 있을 것 같다. 당연히,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가면 더 좋다. 가일서가는 한옥이다.

가일서가(정면에 보이는 한옥 건물)로 향하는 아빠 아들

본채라 할 한옥으로 들어서면 까만 리트리버 한 마리가 사람들을 맞아준다. '세아'라는, 사람 같은 이름을 지닌 이 개를 동생은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나는 동생을 '동물들의 친구'를 줄여 가끔 '동친'이라고 부른다. 개가 묶인 곳 바로 옆이 커피를 내리는 작은 공간이다. 드립 커피를 판매하며 원두도 선택할 수 있다.


작은 마당을 지나 가장 먼저, 탁 트이게 보이는 대청마루는 그 뒤로 난 창이 시원스러워서 더욱 쾌적해 보였다. 내가 대청마루의 옆으로 난 '서가'에서 책을 구경하고 또 고르는 동안 가족들은 대청마루에서 아이스 드립 커피를 마시며 쉬었다. 손님이 하나도 없던 시간이다.


슬쩍, 창가에 쌓여 있던 조그만 장작 하나를 목침 삼아 아빠가 마루에 누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생도 슬쩍. 나는 민폐 아닐까 싶어 사장님에게 혹시 누워도 괜찮은지 여쭈었다. 사장님은 말했다. "저희 손님들 다 여기 누워 있다 가세요. 단골손님 중에는 아예 목침 들고 와서 누워 있다 가는 분도 계세요."

아부지...?

곧이어 엄마도 눕고 나는 고른 책들을 살펴보다가, 커피를 홀짝이다가, 창밖을 보다가. 나는 같이 있는 공간에서 그렇게 혼자 공간을 느꼈다. 그날은 햇살이 보슬비처럼 은빛으로 흩뿌려졌고 바람이 솔솔 살랑였다. 사장님은 책을 큐레이션 하시는 솜씨만이 아니라 커피를 내리는 솜씨마저 기가 막히셔서 나는 더 즐거웠다.

책은 거의 다, 한 권씩 있었다. 왼쪽의 책은 그 한 권을 내가 데려왔다. 오른쪽의 비게 된 자리는 어떤 책이 또 채웠을까.

이날 고른 책은 <책 읽기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 아닌가>(버지니아 울프 저, 온다프레스, 2021), <책이라는 선물>(가사이 루미코 저, 유유, 2021), <할아버지의 마지막 여름>(글로리아 그라넬 저, 모래알, 2020), <나무의 시간>(이혜란 저, 곰곰, 2021)이다. 

책을 파는 공간에서 본 대청마루. 한옥의 구조적 매력인 '넘나들기'가 가능한 곳이었다.

책을 판매하는 공간이 주되다고 할 만큼 널찍하지는 않다 보니 주제별로 큐레이션을 해놓는 것 등은 어려웠지만 개별 책들이 전하는 힘도 대단했다. 베스트셀러, 이 서점에서만 특별히 큐레이션 한 책들이 국문서, 번역서, 그림책 등 유형을 가리지 않고 꼼꼼히 책장을 채웠다.

가일서가 본채 바깥의 또 다른 한옥에서는 주로 책방의 각종 프로그램이 운영된다고 한다. 잠시 구름 꼈을 때.

무엇보다 가일서가는 아이들을 포함한 동네의 주민들, 가일서가를 아끼는 전국의 '애서가'들과 함께 다양한 프로그램을 꾸리고 있는데 그 중 한 글쓰기 프로그램에 참여한 이들이 만든 독립출판물들도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책이 놓인 공간에 서면 혼자여도 주변이 넓어지고 북적이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나를 쓰다' 프로그램을 통해 출간된 책들. 아이들이 쓴 모양이다. 책값의 반을 아이들에게 저작권료로 지급한다고 적혀 있다. 좋다.
왼쪽은 좋아하는 시리즈인 <소설보다>. 오른쪽 사진에는 반가운 책들이 많다.

사장님이 책마다 붙여둔 메모, 책마다 선물 포장처럼 가로와 세로로 한 줄씩 묶어둔 연갈색의 얇은 노끈도 이 서점이 책을 통해 전하는 힘에 한번 더 힘을 보태는 것만 같았다. 책 자체도 한 서점만의 색깔을 보여주지만 책과 함께 손님의 손에 전해지는 소박한 것들도 충분히, 서점을 말해준다.

손으로 쓴 페이지들을 실로 꿰매어 완성하는 책.
가일서가가 새겨진 텀블러를 비롯해 원고지 모양의 포스트잇도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날 무렵 사장님의 배우자와 어린 딸이 책방으로 왔다. 아이가 개와 살갑게 어울려 노는 모습이 어여뻤다. 그리고 실은, 사장님과 그 가족 분들에게 조금 죄송했던 순간도 있었다. 아빠가 "나는 사장님이 총각이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예쁜 (결혼한) 분이 있었네."라고 했는데 아빠는 어딜 가면 좋게 말해 넉살 좋은 이런 말을 자주 하는 편이다.

'예쁘다'는 말은 관계에 따라서 그리고 그 관계의 친밀한 정도에 따라서 좋은 표현이기도 하고 무례한 표현이기도 하지 않나. 당시의 맥락을 고려해 판단하자면 아슬아슬했다. 무례했다는 생각이 조금 더 드는 아슬아슬함. 사장님께 조용히 사과를 드리고 싶었는데 때를 맞추지 못했다. 대신 차에서 아빠에게 일렀다. 나였다면 굳이 그런 얘기는 하지 않았을 것 같다는 말과 함께. "가족이 참 보기 좋네요." 정도였어도 충분했을 것이다.


내가 출국한 뒤 여름휴가인 동생은 그때 다시 가일서가에 갈 거라고 했다. 처음 간 그날에도 "여기 오길 잘했다", "여기 좋다"라고 하던 동생이 가일서가와 그 주변에 푹 빠진 모양이다. 솔직히 가일서가의 개가 다시 보고 싶은 게 아닐까 싶지만 이러나저러나 어떤가. 동생에게 거기 다시 들르면 사진 보내달라고 일러두었다. 핀란드에서 사진으로 다시 만나는 가일서가도 반가울 것 같다.

가지꽃 피고 청보도 영글던 가일서가 주변. 여름향기가 흠뻑 날리던 오후였다.


남해 아마도 책방


다른 어떤 곳도 아닌 남해에 있어야만 하는 책방



경남 남해는 전부터 가보고 싶던 여행지다. 붐비지 않고 정갈한 바닷가, 산과 논밭이 짜 맞춘 듯 조화로운 곳. 산촌, 어촌, 농촌이 한데 모이면 남해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 남해에는 '남해스러운' 책방이 하나 있다. 이름은 '아마도 책방.' 인스타그램을 통해 몇 년 전부터 알던 곳인데 드디어 가봤다. 읍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동네의 한 층짜리 건물로 들어섰다.

식음료를 판매하지는 않고 오로지 책만 판다. 입구에서 오른쪽으로는 독립출판물들이 주로 있었다. 독립출판물은 계산대 맞은 편의 탁자에도 상당수 놓여 있었다. 계산대 바로 옆 또 다른 테이블에서는 이 책방이 선택한 추천 도서들이 보였다. 비교적 최근 출판된 책들이 대부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중 미등록 이주 아동에 대한 은유 작가의 책 <있지만 없는 아이들>이 눈에 띄었다.


큰 책장도 한쪽 벽을 차지했다. 본격적인 큐레이션이 이곳에서 펼쳐졌다. 책장의 칸을 구분하는 위치마다 타자기로 입력한 메모들도 가득 붙어 있었다. 특히 눈길을 끈 칸에는 이런 소개가 붙어 있었다. '이 책장에는 새로운 시각과 관점을 제시하는 책들, 사고를 열리게 하는 책들, 소수의 관점에서 쓴 책들을 진열하고 있습니다. 우리 같이 잘 살아봐요.' 페미니즘, 노동 등 관련 책들이 이 칸에서 다양하게 소개됐다.


맨 아래 칸 중 하나에는 세월호 관련 책들이 있었다. <눈먼 자들의 국가>, <다시 봄이 올 거예요>, <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 <홀>, <금요일엔 돌아오렴>이었다. 이 중 세월호 생존자들에 대해 쓴 <홀>을 구매해왔다. 어떤 소비는 소비 그 자체가 '표현'이지 않나. 다른 책들 대부분은 이미 집에 있다. <홀>을 읽은 뒤의 이야기는 얼마 전 브런치에도 이렇게 남겼다.


https://brunch.co.kr/@audskd26/87


아마도 책방에는 두 개의 별도 공간이 더 있다. 한 공간은 사장님과 직원 분이 작업을 하거나 쉬는 곳이어서 함부로 문을 열지 않도록 안내됐다. 다른 한 공간은 손님도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고 거기 놓인 소파, 테이블을 활용해 책을 읽다 가도 됐다. 이 책방에는 그 외에도 곳곳에 방석과 의자가 놓여 있어서 책을 살펴보기 편했다. '(책장) 아래쪽에 방석 있어요'라는 메모를 봤는데 정말 거기엔 방석이 많이 있었다.


부모님은 근처 마트로 잠시 장을 보러 가고 동생은 나를 뒤따라 들어왔었다. 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동생인데 그날은 책장 바로 옆 의자에 앉아 사진집 한 권을 진득이 살펴보는 모습이었다. "네가 이렇게 가만히 앉아 책 읽는 건 처음 본 것 같은데!" 놀리듯이 말했는데 그런 경험을 동생에게 줄 수 있어 뿌듯하다는 뜻이었다. 동생이 다양한 문화 경험을 하고 자기만의 취향을 갖고 살기를 바란다.

동생은 안동 가일서가만큼이나 이 책방을, 보다 정확히 말하면 이 책방 주변의 분위기를 좋아했다. 한두 개 층으로 된 낮은 건물들이 옹기종기 붙은 조용한 동네, 하지만 생각보다는 오가는 차도 많은 동네. 시원한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어슬렁 동네 걷다가 책방에 들러 얇은 책 한 권 사들고 집에 가는 모습에다 멀리서 불어오는 바닷바람, 산바람 조금 얹어주면 그 동네를 조금 더 또렷이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 아마도 책방은 내부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남해를 여행하다 보면 해안도로를 자주 달리게 되는데 때마다 바다가 참 멋졌다.
그날 저녁 펜션에서 본 해넘이. 자기 전에는 바다에 비친 달도 봤다.
매거진의 이전글 선운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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