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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안 Oct 27. 2021

"별거 아냐"

1. 힘을 빼놓는 "별거 아냐"


핀란드에 도착한 지 2주가 채 되지 않았을 무렵, 올 8월 초중순이었다. 2019년 12월에 여행했던 핀란드의 '낄로빠'로 다시 여행을 가봤다. 겨울이 깊던 그곳으로 여름에 다시 여행을 떠난 것만도 시각적으로 좋은 자극이 됐다. 핀란드의 여름과 겨울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니까. 무엇보다 '살면서 여기 다시 또 올 수 있을까'라며 아쉬움을 넘어 마음이 아픈 채로 떠나왔던 곳을 2년여 만에 다시 왔다는 데서 오는 감격이 이를 데 없었다. 


https://blog.naver.com/audskd26/222523198147


인스타그램 스토리에는 이렇게 썼다. '나를 데리고 무사히 시간을 건너 이곳에 왔다'라고. 오고 가는 길에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7시간이 넘도록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나무들이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고. 그때 핀란드에서 꽤 오래 살고 있는 어느 한국인 지인이 답장을 보내왔다. "지내다 보면 그것도 지루해질 거예요ㅋㅋ" 읽는 순간 마음에 물음표가 하나 뜨는 느낌이었다. 


사람의 머리에 물음표를 띄우는 건 '틀린 말'이지만 마음에 물음표를 띄우는 건 때로, '맞는 말'이다. 그의 말은 '맞는 말'이다. 시간이 지나고 내 주변의 이것저것이 '일상'이 되면 그것이 지루한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감흥이 적어지는 것이 맞기는 하다. 일상의 작은 것을 섬세히 보면 일상 또한 새로워진다는 것을 잘 알고 그걸 충분히 경험도 했지만 일상이 매 순간 설렐 수는 또 없다는 걸 아니까.


"그것도 별거없(어진)다"는 그의 '맞는 말'은 상대가 지금 품고 있는 감정과 오랫동안 품고 싶은 감정 등 '감정'을 고려하지 않았기에 상대의 마음에 물음표를 띄우고 말았다. 이 정도 상황에서야 물음표가 뜨는 정도로 끝나지만 조금 더 심각하거나 아니면 조금 더 즐거운, 좋고 나쁨의 극단에서는 그 같은 말이 상처와 다툼을 남길 수도 있겠지. 별거 없다는 말이 별거 없는 게 아니게 되는 것 말이다.


2. 힘을 더해주는 "별거 아냐"


나는 걱정이 많은 편이다. 불안이 큰 편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 같다. 그 덕분에 미리 계획하는 걸 잘하기도 하고 좋아도 한다. 계획한 덕분에 얻어낸 크고 작은 성취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걱정과 불안이 나에게 전한 '부작용'이 '순기능'보다 영향력이 더 컸다는 쪽의 손을 일단은 들어주고 싶다. 걱정과 불안의 가장 큰 부작용은 또 다른 걱정과 불안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 말은 생각을 한번 끊어내고 보면 최소한 그 생각이 다른 생각을 줄줄이 데려오는 것은 막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담이지만 생각 자체를 잠시 멈추고 생각에서 발을 서서히 빼는 것에는 명상이 적잖은 도움이 됐다. 그렇다 해도 여전히 생각에 끌려다닐 때가 많고 어느 시점부터는 그 생각을 애초에 왜 시작했던 건지도 모르게 될 때가 많다. 웃긴다.


걱정과 불안이 커질 때면 '주문'처럼 나에게 전하는 말들이 몇 가지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해보면 또 별거 아닐 거야. 늘 그랬듯이"이다. 


막상 해보면, 막상 지나고 보면 별거 아닌 일들이 살면서 얼마나 많았던가. 여기서 별거 아니란 말은 어떤 것이 '하찮다'는 뜻이 아니라 '생각보다 쉽다', '생각보다 죽고 살만큼 대단한 일이 아니다'라는 뜻에 가깝겠지. 그렇게 별거 아닐 수 있었던 이유가 내가 걱정하며 어떤 계획과 대비든 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일이 원래부터 별거 아니었던 건지는 경우에 따라 달랐지만 말이다.


대학원 개강을 앞둔 전날도 걱정과 불안이 참 컸다. 그날만이 아니라 개강을 일주일 여 앞둔 때부터 그랬다. 대학원을, 낯선 곳에서, 외국어로 시작한다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으면 그것도 이상할 테지만. 도망칠 수는 없고 도망치고 싶지도 않았기에 "또 어떻게든 해내겠지. 지나가겠지. 별거 아니겠지." 이렇게 되뇌며 학교 생활을 시작했다. 직접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나만의 공부 체계를 만들어 갔다. 그 수밖에는 없었다.


영어로 수업을 이해하고 영어로 내 의사를 분명히 전하는 게 '만만하게' 여겨지지는 않아서 걱정이 됐고 걱정돼서 더 일찍 하루를 시작했다. 대학원을 졸업한다 해서 미래가 확실히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서 불안했고 불안해서 '새로운 기회'라는 게 보일 때면 적극적으로 알아보고 고민했다. 


수업이 그날 몇 시에 있든 평일 오전 8시까지 학교에 도착해 자율적으로 수업 관련 논문을 챙겨 읽었다. 모든 수업에 정시에 참여했다. 수업 내용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찾아보고 적용해봤다. 주말에도 과제를 했다. 몰아서, 급하게 하지 않기 위해 주말까지도 틈틈이 활용했다. 그 덕분에 과제에 끌려간다는 느낌이 아니라 내가 과제를 끌고 간다는 감각을 가질 수 있었다. 내가 명확히 알고 있는 내용, 내가 솔직히 전하고 싶은 생각을 차분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마음이 급했던 적도 잦지만 그건 상황이 객관적으로 쫓기기 때문이라기보다 내가 습관적으로 마음만 앞섰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이곳 학제는 한 학기가 두 개의 period로 이뤄지는데 10월 마지막 주인 지금, 1 period가 끝나고 일주일의 짧은 가을 방학을 보내고 있다. 어제는 한 과목의 성적이 나왔다. 5점이었다. 이곳은 A+, B+ 같은 식이 아니라 0~5점으로 성적을 내어준다. A+이라는 뜻이다. 막막해하며 시작한 학교 생활은 해보니, 지나고 보니 또 '별거 아닌' 게 되어 있다.


단순히 성적을 잘 받았기 때문에 '자신 있게' 별거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만은 아니다. 성적과는 일차적으로는 별개로, 내가 노력해온 과정에 대해 후회나 부끄러움이 없다는 것이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해나가면 된다는 믿음이 나에게 든든한 자신감을 준다. 그 자신감이 다음에 어떤 일을 앞두고 또 걱정되고 불안할 때면 "그 일도 해보면 별거 아닐 거야"라는 나의 '주문'에 다시 힘과 근거를 실어줄 것이다. 


첫 학교 생활이 '별거 아닌 것'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걱정과 불안에서 시작된 계획과 노력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수고했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공부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공부 이외의 것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도록 매일 응원하고 챙겨주는 가족들 덕분인 것도 빼놓을 수 없다. 가족들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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