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지안 Dec 25. 2021

알고 보면 '크리스마스'

핀란드 오울루에서 읽은 그림책

<Christmas comes to Moominvalley> (Alex Haridi, 2019)


'무민'은 겨울잠을 잔다. 빛나는 여름이 올 때까지. 눈이 대지를 고요하게 덮은 겨울이면 무민 가족이 사는 곳은 고적하기만 하다. 그렇다. 무민 가족은 크리스마스를 모른다. 무민의 하얀 몸을 보고 있자면, 무민의 '출신 국가(핀란드)'를 떠올리자면 눈과 크리스마스는 자연스럽게 머릿속으로 따라오는 것이었는데 이 책을 보고서야 '아차' 싶었다. 겨울잠을 잔다면 크리스마스를 정말 모르겠구나. 이 책은 태어나 처음 크리스마스를 알게 된 무민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다.


무민 가족이 긴 겨울잠에 빠져 있던 어느 날, 무민 가족의 친구 '헤뮬렌(Hemulen)'이 무민을 잠에서 깨운다. "크리스마스가 오고 있다고!" 무민 또한 다른 가족들을 잠에서 깨운다. "크리스마스가 오고 있대!" 밖으로 나가 본 가족들은 말한다. "Is this Christmas?" 그들이 본 것은 온통 하얗게 변해 버린 세상이었다. 그들은 크리스마스만 모르는 것이 아니라 '눈'도 알지 못한다. 무민 가족의 시선에서 눈을 'wet cotton wool'(젖은 면 모직)이라 표현한 부분에서는 미소가 지어졌다. 10월 이후부터는 차가 다니는 도로를 제외하면 까만색 아스팔트를 거의 본 적 없을 만큼 쭉 눈이 쌓여 있는 이곳 핀란드 오울루에 사는 나 또한, 눈을 원래 아는 나 또한, 눈을 볼 때면 보드라운 솜 자락을 종종 떠올리게 되니 말이다. 눈은 그런 것인가 보다.


어두워지기 전에 서둘러서 '전나무'를, 그러니까 '크리스마스 트리'를 구해와야 한다는 누군가의 말에 무민 파파는 숲에서 나무를 베어 온다. 나무에 옷을 입혀야 한다는 또 다른 말을 듣고서는 다 같이 집에 있던 크고 작은 아름다운 것들을 나무에 메달거나 붙인다. 마지막으로, 크리스마스 음식을 준비해야 한다는 말에도 무민 마마는 재빠르게 움직인다. 가족들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거뜬히 차려졌다. 무민 가족은 어리둥절한 한편으로도 일종의 '크리스마스 의무'인 모든 것들을 해냈다.


12월, 학교 근처 숲을 걷다 우연히 만난 '크리스마스 트리.' 어느 집 앞마당의 '진짜' 나무에 불빛이 장식되어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불쾌하거나 위험한 것이 아님을 알고서 이 모습을 보는 '독자'에게 무민 가족은 어쩌면 귀엽기까지 할지도. 하지만 크리스마스라는 단어 대신 우리가, 내가 잘 알지 못하고 알지 못해 두려워하는 어떤 것을 대입해 본다면? 과연 무민 가족처럼 할 수 있을까? '하던 대로' 다시 겨울잠을 자러 들어가거나 전령처럼 크리스마스의 '의무'들을 알려주는 이들을 무시 또는 모욕하거나 트리와 음식을 결국 준비할 거면서 괜히 소모적인 다툼으로 그 시간을 얼룩지게 하는 일 없이 말이다.


알고 보면 '크리스마스'인 것을 눈앞에 두고도 당장의 혼란과 두려움에 잠겨, 잊지 말아야 하는 걸 잊고 잃지 말아야 하는 걸 잃는 일 없이 말이다.


혹시 이쯤에서, 크리스마스 하면 중요한 또 하나가 이야기에 빠져 있다고 느꼈다면 '선물'이 아닐지 묻고 싶다. 무민 가족은 선물 또한 놓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선물 목록'을 든 채 "이 많은 선물을 어떻게 한 번에 다 챙기라는 거야!"라며 심술이 난 채 지나가는 헤뮬렌을 본 뒤 부랴부랴 자신들도 선물을 준비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민 파파는 낚싯대, 무민 마마는 그림책, 무민 가족과 함께 지내는 스노크메이든(Snorkmaiden)은 발찌를. 무민은 봄이 온 뒤에까지도 터놓지 않은, '비밀의' 선물을.


Time paseesd, but nothing happened. (시간이 지났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호기심과 기대, 두려움과 당황스러움이 복잡하게 얽힌 감정으로 대비한(?) 크리스마스는 시간이 지나도 위협적인 것을 데려오지 않았고 외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했다. 트리를 꾸미고 맛있는 음식과 선물을 준비하는 것 말고는. 따뜻한 초를 밝히는 것 말고는.


무민 가족 주변의 크고 작은 생명체들이 말했다. 크리스마스는 행복한 것이라고. 안심한 무민 가족이 올려다본 하늘에는 무민 가족이 여름에 보아 온 별보다 훨씬 많은, 훨씬 반짝이는 별들이 있었다. 그 별들을 볼 수 있었던 건 하늘이 여름보다 훨씬, 어둡기 때문이었다.


핀란드 오울루의 산책길에서는 스키를 자전거처럼 이용하는 시민들을 자주 만날 수 있다.


 2020년 12월 24일에는 서울의 내 방에 있었다. 무사한 한 해, 매 순간을 깨어있고자 일인 분의 최선을 다한 한 해, 그리고 아름다운 순간을 힘껏 감사한 한 해를 격려했다. 빛나는 만큼 고생스러웠던 그 해를 나는 내가 표현할 수 있는 가장 따뜻한 문장으로 격려했다.


2021년 12월 24일, 핀란드 오울루의 내 방에서 이 글을 쓴다. 나를 둘러싼 환경이 내 인생의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바뀐 한 해였다. 고생스러웠던 만큼 빛났던 이 해를 나는 이 책에서 빌려온 어느 짧은 문장으로 안아주고 싶다.


"I'm not afraid of Christmas any more."

매거진의 이전글 슬픔이 나를 찾아오는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