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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안 Nov 01. 2021

슬픔이 나를 찾아오는 이유

핀란드 오울루에서 읽은 그림책

<When Sadness Comes To Call> (Eva Eland, 2019)


'행복이'를 알게 해준 작가 Eva Eland의 또 다른 시리즈를 읽었다. 아, '행복이'가 누구냐 하면 바로 이 녀석이다. https://brunch.co.kr/@audskd26/90


이번엔 '슬픔이'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겠다. 영화를 통해서든 이 책을 통해서든 자신의 감정에 이름을 붙여보거나 의인화해보는 것은 그 자체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감정에 잠식되거나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 감정을 무시하거나 회피하지 않기 위해서, 감정을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서, 감정을 과장하지 않기 위해서. 그 모든 것을 위해서 말이다.



표지에서 한 아이가 하마같이 퉁실한 '슬픔이'를 마주 올려다 본 채 '슬픔이'의 몸에 살포시 손가락을 대고 있었다. 한 장을 넘겨보았다. 자세도, 표정도 모두 다른 저마다의 사람들이 보였다. 슬픔의 모양은 그만큼 다른 것이다. 좌절, 무기력, 우울, 걱정, 멍함, 분노. 이들의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예기치 않게 나를 찾아온다는 것이다. 이들이 찾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들이 어디 있던가.


누구 하나 '슬픔이'를 기다린 적 없어도 '슬픔이'는 우리를 불쑥 찾아오고야 만다. 그럴 때의 우리 표정이 어떠한 지는 쉽게 상상이 되지만 돌이켜 보면 그럴 때의 '슬픔이'의 표정이 어떠한 지는 이 책을 보기 전까지 굳이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 같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밖을 내다 보는 아이의 맞은 편에 선 '슬픔이'의 표정은, 슬펐다.


자신을 긍정할 수 없는 이에게는 본연적인 슬픔이 있더라는 걸, 나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아이는 '슬픔이'를 집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문을 쾅- 닫으며 내쫓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이 책의 이야기는 시작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니, 시작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미 많은 이들이 하고 있는 것을 그저 그대로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는 이야기는, 재미가 없으니까.


고개를 푹 숙인 채 아이를 따라다니는 '슬픔이'에게서 죄책과 자책의 감정이 읽혔다. 나를 힘들게 하는 감정은 나를 힘들게 하면서 힘이라도 얻는가 보다고, 그렇지 않고서는 나를 이렇게 자주 찾아올리 없다고 생각했던 적이 나에게만 있지는 않을 것 같다. 이 책을, 정확히는 힘들어하는 '슬픔이'의 표정이 담긴 페이지를 본 뒤로는 그 생각이 바뀌어 버렸다.


그럼 도대체, '슬픔이'는 본인도 힘들면서 왜 나를, 우리를 찾아오는 걸까. 우선은 아이와 '슬픔이'의 이야기를 조금 더 지켜보기로 한다.


아이는 '슬픔이'가 버겁지만 한편으로는, '슬픔이'에게 이름을 붙여주며 인사를 나눴다. 이때 처음으로 '슬픔이'의 표정이 바뀌었다. 아이의 인사가 당황스럽지만 싫지만은 않은 듯한 것으로. 더 구체적으로 묘사하자면 오래 기다려온 어떤 것을 마침내 마주했을 때의 표정 같았다. 좋으면서도 놀라고 놀라면서도 좋은.


아이와 '슬픔이'는 그렇게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었고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Listen to it. Ask where it comes from and what it needs." ('슬픔이'의 말에 귀기울여 보세요. 그리고 물어보세요. '슬픔이'가 어디에서 왔는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이름을 불러 주고 인사로써 '환대'하는 것 그리고 쉽지 않지만 내 앞에 앉은 사람에게 귀기울이려 애쓰는 것은 다름 아닌, 그 존재를 있는 그대로 보아준다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이 곧, 긍정한다는 것이다. 자기 존재를, 아마도, 긍정하지 못해 얼굴에서 슬픔을 지울 수 없었던 '슬픔이'가 또 다른 표정을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었던 이유이다.


슬픔이라는 감정에 환대와 긍정을 대응시킨다는 게 어딘지 어색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색함이 불가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실은, 어색하고 어려워도 그것을 계속 시도해야만 하고 그 이유 또한 분명하다. 슬픔을 억누르고 외면하면 지금 당장은 그것이 진전과 발전 같아 보일 수 있어도 살면서 그 슬픔을 꼭 다시 다시 만나게 되니까. 넘어진 데서 다시 넘어지게 되는 것이다. '내일'이 없게 되어 버리는 것.


이어지는 아이와 '슬픔이'가 보여주는 모습들은 여느 친구 관계, 믿고 의지하는 관계가 보여주는 그것과 다름이 없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If you don't understand each other, just sit together and be quiet for a while. Find something that you both enjoy, like drawing... listening to music... or drinking hot chocolate. Maybe sadness doesn't like to stay inside. Try letting it out sometimes. Go for a walk through the trees. You can listen to their sounds together." ('슬픔이'도 당신이, 당신도 '슬픔이'가 이해되지 않는 순간에는 말없이, 나란히 있어 보세요. '슬픔이'와 당신이 함께 할 만한 것을 찾아보는 것도 좋겠네요. 음악을 같이 듣거나 핫초코를 나눠 마시거나 그런 것들이요. '슬픔이'는 집안에만 있고 싶지 않을지도 몰라요. '슬픔이'를 데리고 나가 보세요. 나무 사이를 같이 걸어보는 거예요. 그럼, 나무들의 소리도 함께 들을 수 있어요.)


아이라는 주체의 시선에서 보자면 슬픔을 견뎌낸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고 슬픔을 달랜다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그때 슬픔이라는 대상은 자신을 부정하지 않은 한 사람이 '내일'을 맞을 수 있기를, 기왕이면 웃으면서 맞을 수 있기를 바라며 그 사람의 곁에서 가만히 기다려주는 것일 테고. 기다려주는 것으로써 고마움을 표하는. 결국 아이와 '슬픔이'가 함께한 저 모습들에서 중요한 것은 누구도 서로를 도망치지 않았다는 그 사실 아닐까.


아이도 '슬픔이'를, '슬픔이'도 아이를 포기하지 않았다.


한숨 곤히 자고 일어난 아이는 알게 되었다. '슬픔이'가 떠났다는 것을. 그리고 아이는 알게 되었을 것이다. '슬픔이'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는,




'슬픔이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는 무엇이다'라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려 했다. 그러나 좀체 문장을 맺지 못하고 시간이 흘렀다. '슬픔이'는 왜 우리를 찾아올까. 우리는 왜 슬픈 일을 겪을까. 이런 질문들을 붙잡고 있기를 며칠. 오늘 아침, 눈을 뜬 채 누워서 문득 생각했다. 질문이 잘못 되었다고. 질문이 잘못 되었는데 어떻게 답이 나오겠느냐고.


'슬픔이'가 우리를 찾아오는 이유, 같은 건 없다. 이유가 있다고 말하면 '그 이유만 피하면 우리는 슬프지 않을 수 있다'가 말이 되어 버린다. 어쩌면, '네가 슬픈 건 그 이유를 네가 피하지 못했기 때문이야'라는 귀책의 말을 슬픈 사람 앞에서 내뱉게 될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은 내가 기억해야 할 것은 '슬픔이'가 아이를 '예고 없이' 찾아왔다는 사실과 그렇게 '슬픔이'가 아이를 찾아오기까지 아이가 무언가 한 일은 없었다는 사실이다. 아이가 한 일 같은 것으로써 적어도 책에 설명된 것은 없었다. 즉, 내가 기대하지 않은 상황과 감정이 어느날 나에게 밀려오더라도 그것이 내 잘못과 내 죄로 인한 것이 아닐 때가 더, 더 많다는 것을 이 책은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슬프고 아픈 일이 한 차례 지나가고 나면 내가 이전과 달라져 있다는 것을 느낄 때도 있다. 비록 그 달라진 정도가 나만 아는 폭과 길이, 깊이일지라도 말이다. 특히 그 변화가 나에게 좋은 방향일 때는 '슬픔이 나에게 온 이유는 결국 나를 이렇게 성장시키기 위함이었다'라는 말을 하게도 된다. 


하지만 그런 변화 자체를 '슬픔이 나를 찾아오는 이유'라 칭하기는 어려울 수는 있겠다는 생각이 이 책을 읽은 뒤 들었다. 이 책에서 '슬픔이'는 아이에게 주기 위한 무언가를 들고 아이를 찾아오지 않았다. '슬픔이'는 빈손이었고 그저 자기 몸만 데리고 아이의 집 문 앞에 섰다. '슬픔이'는, '슬픔이'일 뿐이었다.


누군가 슬픔과 아픔을 겪은 뒤 자신이 마음에 들어하는 어떤 모습에 더 가까워졌다면 그건, 그 사람이 '슬픔이'와 용기 있게 손 잡고 그로부터 '스스로' 변화를 만들어 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슬픔은, 그냥 온다. 누구의 탓도, 특별한 이유도 없이. 슬픔이 나를 찾아온 그 순간에는 슬픔이 나를 찾아온 이유를 깊이 파고들기보다 우리, 일단은, 슬픔을 받아들이자. 슬픔을 피하거나 슬퍼하기를 포기하지 말자. 말도 안 되게 어려운 말이지만, 그럼에도.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 정말 '내일'이 있을지, 오래 살아남아 함께 확인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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