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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안 Dec 31. 2021

스스로를 구원하고 있는 얼굴들에게

2021년 12월 30일에 씁니다

오늘의 이 글은 이 한 문장에서 시작되었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가진 가장 멋지고 빼어난 것들 덕분이 아니라 언제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오래된 선행들 때문에 구원받을 것이다." [허지웅(2020), 『살고 싶다는 농담』(웅진지식하우스), 144쪽]


한 해를 하루 반쯤 남겨 둔 시점이어서일 것이다. 한 해가 시작된 지 하루 반쯤 지났을 때는 무엇이든 하고 싶고 또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나' 자신이 선명하고 지금 같은 시기에는 마치 그때의 '나'라는 존재는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겸양해지는데, 혹시 나만의 이야기인가.


책에서 눈을 떼고 올 한 해 나를 찾아온 선행의 얼굴들을 떠올려보았다. 눈, 코, 입이 선명한 얼굴들이 있는 반면 지금 이 순간 내 앞을 지나간다 해도 내가 그 사람임을 알아보지 못할 듯한 얼굴들도 있다. 내가 만약 어떤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건 내가 특별히 배은망덕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애초에 선행이라는 것이 '나 좀 기억해 주쇼'하는 다분한 어떤 의도를 갖고 행해지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으며 후자의 경우 세상에 흔적을 남기는 것은 선행한 사람의 눈, 코, 입이 아니라 선행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눈, 코, 입보다는 선행이 더 또렷이 남은 얼굴들에게 변변찮은 활자들을 빌려 그 마음을 전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 내가 말하고 싶은 선행의 유형은 굳이 일을 벌이지 않겠다는 소극성을 넘어 상대의 마음에 자신의 마음을 잇대겠다는 적극성을 바탕으로 한다. 위악, 비관, 회피를 세상사에서는 물론 내 안에서 찾는 일조차 그리 어렵지 않은 어떤 날들에 그 적극성은 달이 인력을 부려 바닷물을 끌어모으듯 '다 놓아버리고 싶은 마음들'을 안전한 곳으로 모아 온다. 사람을 살고 싶게 만드는 말과 행동이 선행이 아니라면 무엇을 선행이라 할 수 있을까.




한국에서


#1. 1년여 동안, 아침저녁으로 나와 눈을 맞추고 내 하루의 시작과 끝을 감사로 채워준 어린이대공원 앞 '그 나무'의 이름을 핀란드로 떠나기 전 알고 싶었다. 내가 찍은 나무 사진을 첨부해 서울시설공단 홈페이지에 문의했다. '이 나무를 제가 이 동네에 사는 동안 많이 아꼈어요. 오며 가며 보다 보니 계절 따라 변하는 나무 모습도 촘촘히 알게 되고, 참 좋았습니다.' 문의글의 일부였다.


직원 중 한 분이 내가 남긴 연락처로 한번, 문의글의 답변글로 한번 그 나무의 이름을 나에게 알려주었다. 귀룽나무였다. 봄철에 하얗게 피는 꽃이 어여뻐 구름나무라고도 불린다 했다. 더하여, 나무의 이름을 알고 싶었던 바람은 뜻밖의 경험을 데려왔다. 그 직원 분은 나와 같은 사람을 만날 때면 이 일을 일하는 보람을 느끼고 힘이 난다고, 나에게 전화로 말했다. 나는 답변글에 다시 긴 답변글을 남겼다.


이 일에 대해서는 다른 글로 말할 것이고 이 글에는 그분을 향한 감사와 안녕을 담는다. 최소한의 직업적 역할만 다해도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마음을 전했을 때 상대의 반응이 어떠할지 예측하기 쉽지 않은 관계의 상대이지만, 그럼에도 선뜻 마음을 전함으로써 나무에 얽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나무에 얽힌 두 사람의 이야기로 확장시킨 그분을 향해. 나무와 '우리'를 생각하면, 내가 떠난 곳에서 나를 기다리는 것이 있음을 자각할 때의 위안이 찾아온다.


#2. 핀란드로 오기 전 살던 마지막 집은 그 가치를 헤아릴 때 창밖으로 보이는 앞집의 마당을 같이 꼽아야 한다. 그 앞집의 할머니를 비롯한 가족 분들도 이 글이 전하려는 감사의 마음 그 대상이다. 앞집에 대한, 앞집과 나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아래의 글로 대신 전한다. 나무와 '우리'를 생각할 때처럼 앞집의 마당과 그 마당을 매일같이 가꾸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단단해진다. 누가 알든 그렇지 않든 묵묵히 내 길을 가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마음에 건강한 비료를 뿌려주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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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에서


#1. 8월 첫 주 핀란드 도착 후, 혼자 책상과 침대부터 자잘한 가재도구들을 구해다 넣던 때이다. 집에서 두 손 가볍게 걸어가면 십여 분이면 닿는 거리에 중고 상점이 있다. 거기서 책상과 의자를 샀다. 배달을 시키면 별도 비용을 받는다고 했다고 나는 혼자 옮기기로 했다. 의자를 먼저 옮기고 다시 가게로 가 책상을 가져오기로. 직원에게 별로 안 무겁다고, 혼자 할 수 있다고 갖은 씩씩함은 다 부렸는데 쉽지 않았다. 특히 의자가 그랬다. 가죽에 덩치가 큰 의자여서 그랬나, 길에서 몇 번을 멈춰 섰던 건지. 집은 엘리베이터 없는 3층이었고 계단은 더 고됐다. 그래도 해야지, 별 수 있나. 몸보다 마음을 더 여몄다.


그러다 책상을 옮기던 길에서였다. 자전거를 타고 나와 반대 방향으로 가던 한 사람이 가던 길을 멈추어 내게 말을 걸었다. 도움이 필요하냐는 물음이었다. 앞서 책상을 옮길 때도 어떤 사람이 도와줄 수 있다고 말을 걸었는데 거절했었다. 모르는 사람에게 이 '큰' 도움을 받는다는 게 영 어색했다. 그런데 이번엔 덮어놓고 도움을 받고 싶었다. 고맙다, 미안하다 이 두 말을 혼자 짐을 옮길 때 가다 서다를 반복한 횟수만큼 내뱉었다.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만 미안해하라고 하던 그 사람의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 말이 마음의 어디에서 어떻게 맺혔기에 그랬던 건지. 마스크 덕분에 우는 걸 잘 가릴 수 있었다.


그 사람의 자전거에 책상을 얹고 같이 자전거를 끌었다. 집 앞 계단에 섰을 땐 그 사람이, 아까 의자도 옮겼다더니 대체 이 계단은 어떻게 오른 거냐며 You are strong이라 말하는데 넉살 좋은 척 그렇다고 했다. 3층까지 같이 옮겨줄까 묻는 그 사람에게, 습관이라 '괜찮다'고 하다 이내 도와주면 고맙겠다고 했다. 결국 그렇게 다 옮겼다. 무엇이든 혼자 다 해왔고 혼자서도 잘 해왔다고 믿었던 한 사람이 그게 실은 허구라는 걸, 허구를 넘어 허망함이라는 걸 가장 현실적인 방법으로 깨우치기 시작한 첫날에 그 사람의 선행이 있었다.


#2. 8월 초의 또 다른 어느 날. 오울루에 온 뒤 처음으로 날이 화창했다. 움츠렸던 몸을 펴고 젖은 마음을 뽀송하게 해 줄 수 있는 날이었다. 워낙 자전거 길과 산책로가 잘 닦인 곳이라 길 따라 차근차근 걸었다. 숲이 나왔고 쉴 만한 벤치가 곳곳에 있었다. 벤치에 슬쩍 누웠다. 햇살이 온몸을 기분 좋게 감쌌다. 얼굴이 탈까 싶어 윗옷을 얼굴에 살짝 덮었다. 며칠 긴장해 있던 몸이 나른해졌다. 그때였다. Are you Ok?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누군가 다가와 괜찮냐고, 도움이 필요하냐고 물었다.


무슨 상황인가 싶다가 아차 싶었다. 내가 어딘가 불편해서 여기에 쓰러지듯 누워있는 거라고 생각했구나. 괜찮다고, 쉬고 있는 거라고, 고맙다고 어영부영 말했다. 그제야 그 사람이 웃으며 일행과 마저 길을 떠났다. 고맙다고 더 제대로 말했어야 했는데. 그 대신 그들의 뒷모습을 한참 봤다. 나 여기서 혹여 진짜 쓰러지더라도 다들 모르는 척하지 않겠구나, 여기 그런 곳이구나 생각하면서.


#3. 8월 말, 헬싱키를 다녀오는 기차 안이었다. 기차가 몇 차례 속도를 줄이거나 멈춰 서는 게 심상치 않았다. 안내 방송이 나오는데 핀란드어였다. 무언가 문제가 생긴 모양이고 연착이 되겠다는 짐작이 들었다. 짐작만이었다. 그때 옆 자리 사람이 혹시 통역이 필요한 지 나에게 영어로 물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 지난번 '벤치 때'처럼 한 번에 못 알아듣고 다시 물었다. 안내 방송 내용을 알려줄 수 있다고 그 사람이 말했다. 알려달라고 했다. 선로 문제로 연착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후 한 차례 더 이어진 안내 방송도 그 사람이 통역을 해주었고 지연 보상금을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 사람은 영어가 아주 유창하지는 않았다. 중간중간 적절한 단어를 찾기 위해 말을 멈추기도 했다. 그래서 더 멋졌다. 그 사람은 한 번 더 '생각'한 것이다. 옆 자리 사람은 핀란드어를 모를 가능성이 커 보이는데 이 사람도 지금 상황에 대해서 궁금한 건 마찬가지일 테니 내가 먼저 도움을 주면 어떨까, 영어가 자신 있지는 않지만 그런 것보다는 이 사람이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겠지, 그런 생각들 말이다. 언젠가 한국에 간다면 나도 따라 하고 싶은 선행이 하나 더 늘었다.


#4. 9월 말, 이미해는 짧아진 지 오래인 어느 저녁이었다. 집 앞 버스 정류장에 내렸다. 울적했다. 이맘때가 그랬다. 안 좋은 일도 없고 많은 것들이 괜찮았다. 그때 알았다. 행복과 슬픔은 순차적이라 하기보다 동시적인임을. 그리고 행복과 슬픔만 있는 게 아니라 그 큰 감정들 뒤에 더 세세한 감정들이 복잡다단하게 놓여 있음을. 한 사람이 그 순간에 느끼는 감정은 하나가 아니다. 이걸 알면 어느 한 감정을 밀어내거나 피하려 괜한 에너지를 쓰지 않게 된다. 아무쪼록 그렇다.


돌이켜보면, 그 얽힌 감정 중 하나가 외로움이었던 듯싶다. 혼자 조용히 머무는 시간을 끔찍이 좋아하지만 먼 나라에서 혼자임을 받아들여가는 과정은 나탈리 크납의 <불확실한 날들의 철학>에서 표현된 구처럼 '구조적인 외로움'이었다. 해결책 있는 외로움이 아니라 겪어내야만 하는 외로움.


"Hi." 누가 뒤에서 인사를 했다. 뒤를 보니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내 본능적인 경계를 곧바로 알아차린 듯 그 사람은, 항상 이 시간쯤 네가 버스에서 내리는 걸 봤다고, 같은 버스일 때도 있었고 다른 버스일 때도 있었지만 너를 이 시간쯤 몇 차례 봐서 먼저 인사했다고 말했다. 인사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치레가 아니라 정말로 그랬다. "너 혼자 아니야"라는 말을 들려주려 그 순간 누가 하늘에서 뚝 떨어뜨린 사람 같았다.


#5. 11월 말의 어느 날. 도서관의 핀란드어 수업에서 알게 된 독일인 친구와 같이 오울루 박물관 구경을 가기로 한 저녁이었다. 집 앞에서 시간을 맞춰 버스를 탔는데 버스 카드를 안 챙겨 나왔다는 걸 알게 됐다. 평소 메고 다니는 가방 대신 에코벡을 들고 나오면서 생긴 일이었다. 급한 대로 신용카드를 대었다. 신용카드로도 결제가 되어야 맞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되지 않았다. 미안하다, 내리겠다며 문 쪽으로 몸을 돌리는데 기사가 편안한 미소로 말했다. 듣는 사람을 부담스럽게 하지 않는, 의도가 없어 보이는 그런 편안한 미소로 "그냥 타도 된다"고. 자리로 갈 때와 내릴 때, 할 수 있는 가장 큰 목소리로 고맙다고 인사했다.




이런 사람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만들어준 기억은 내가 '이 문장'을 놓쳤거나 놓치려 할 때 기어코 내 손에 다시 '이 문장'을 쥐어준다. '친절하게 굴 것.' 살면서 크고 작은 일로 사람에게 역습을 당하다 보면 온 노력을 다해 꽉 잡고 있다가도 부지불식간에 놓치고야 마는 문장 말이다.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친절하게 군다는 건 무엇일까. 간 쓸개 다 내어주면서, 무작정 웃기만 하면서 사는 걸 뜻하지 않음을 알 것이다. 눈이 마주치거나 도움을 받으면 제대로 인사를 하고 필요하다면 도움을 주고. 이 말을 하면 상대가 상처받거나 언짢아할 것임을 알겠는 말은 하지 않고 이 말을 하면 상대가 힘을 얻을지 아닐지 확신은 없더라도 내가 전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이 있다면 정성껏 하고. 그런 친절 말이다. 사람을 살리는 친절까지는 베풀 요량이 없는 사람도 사람을 죽이지 않는 친절 정도는 건넬 수 있다고 믿는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2018)에서 박동훈은 이지안에게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한테 좀 친절하게 하고. 인간이 인간한테 친절한 거 기본 아니냐?" 아, '이지안'은 그래야 한다고 하니 친절해야지 뭐. 농담이다. 친절이 이 세상의 기본값이어야 하니까, 그러니까 친절하게 굴 것. 말은 이렇게 해도, 아니, 말이라도 이렇게 하기까지 나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글에 등장한 사람들이 이 선행들을 잊어버렸거나 잊고 살다 문득 떠올리는 데 그칠지도 모르겠다. 상관없다. 오히려 그 편이 그들에게 나을 수도 있다.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언제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오래된' 선행들이라고 하니. 나는 마음을 전할 뿐이다. 이들이 죽은 다음이 아니라 사는 동안 구원받기를. 특히, 가장 보통의 날들에 구원받기를.


실은 이런 사람들은 구원받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이미 스스로를 구원하고 있는 사람들임을 안다. 알면서 구태여 그런 마음을 전해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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