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를 걸으면 보이는 것들
“착. 착.” 경쾌하게 들리는 슬리퍼 소리에는 늦잠을 잔 사람의 여유로움과 일찍 퇴근한 자의 가벼운 마음이 담겨 있다. 슬세권은 슬리퍼를 신고 편하게 돌아다닐 수 있는 동네를 말한다.
그러니 산책의 준비물은 하나. 언제든 힘들면 집으로 돌아가 푹신한 침대에 누워 버리겠다는 마음가짐이면 충분하다.
집을 나서기 전 지도 앱을 켠다. 선택은 두 가지. 공원 방향과 골목 방향. 서울의 주거지역은 대부분 조금만 걸어도 간단한 운동기구와 놀이터가 있는 작은 공원이 나온다.
골목 방향은 동네 장사를 하는 작은 가게들과 초등학교 담벼락을 지난다. 어디를 선택해도 상관없다. 순서만 다를 뿐 돌아오는 길엔 둘 다 걷게 되어 있으니까.
산책을 좋아하는 아내와 내가 지금의 동네로 이사를 결정하고 가장 먼저 했던 건 산책이었다. 오래된 동네라 좁은 골목을 둘러보는 재미가 있었다. 하이라이트는 아파트 단지와 이어진 근린공원. 공원이라기보단 작은 숲이 있는 동산에 가까워 산림욕을 하기도 좋다. 우리의 슬세권 산책은 단지를 한 바퀴 돌아 공원으로 나서는 것으로 시작한다.
공원 초입엔 운동하는 어르신들이 담소를 작은 정자가 나온다. 조금 더 걸으면 구청에서 만든 미니 도서관이 등장. 작은 책장에 스무 권 남짓의 책이 꽂혀있다. 한 번도 읽어본 적은 없지만, 숲에서 책이 가득한 책장을 보는 것만으로도 묘하게 마음이 편안해진다.
근린공원을 통과해 골목으로 들어서면 붉은 벽돌로 지어진 양옥집이 줄지어 있다. 레트로한 느낌의 오래된 세탁소 건물부터 사장님의 스쿠터가 멋진 가죽공방까지 천천히 걸어본다. 한 바퀴 돌아 집으로 들어가는 길엔 전에 보지 못한 작은 빵집에 들르기도 한다.
버스를 타고 지날 땐 보이지 않는 골목 안의 가게들. 이렇게 걷고 나면 내가 사는 동네가 다시 보인다.
슬세권 산책의 묘미는 동네를 떠올릴 수 있게 한다는 점이다. 지방에서 나고 자란 사람에게 서울의 집은 잠시 머무는 곳인 경우가 많다. 2년 뒤엔 다른 집으로 가고 새로운 동네에서 살 가능성이 크니까. 그러니 내가 살던 동네를 기억하기란 쉽지 않다.
운동하는 할아버지부터 새로 생긴 빵집까지 관찰하지 않으면 지나치는 풍경들. 동네를 기억하는 게 왜 좋냐고 하면, 결국 우리는 이런 기억을 갉아먹고 살기 때문이다. 어릴 때 학교 앞 문방구나 친구들과 뛰어놀던 골목처럼.
어떨 땐 인생의 한 시절이 그런 풍경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꺼내 볼 풍경이 많을수록 더 행복하지 않을까. 그리고 동네를 떠나야 할 때, 어디에 어떤 풍경이 있었는지 떠올려 보고 싶다.
그때 그 세탁소 정말 멋졌는데. 가죽공방 사장님은 여전히 베스파 스쿠터를 타실까? 골목을 걸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었지! 하며 추억할 수 있다면 도시에서의 삶이 잠시 머무는 것 이상으로 풍성해져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