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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부각 Jul 06. 2021

내 방 산책하는 법

이게 가능하다고?

미세먼지가 심할 땐 산책이 힘들다. 마스크를 쓰기 싫어 밖에 나가고 싶지도 않다. 그럴 땐 그냥 내 방을 산책하면 된다.


도대체 무슨 말인가 싶을 수 있다. 아는 산책로가 다 떨어져 아무 말이나 지어낸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방 산책 법은 이미 유명 작가에 의해 어느 정도 검증된 방법이다.


프랑스 작가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가 쓴 <내 방 여행하는 법>에 등장하는 여행 법을 산책 버전으로 바꾼 것이기 때문. 책의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이렇다.


직업 군인이었던 작가는 18세기 말, 다른 장교와 결투를 벌였다는 이유로 42일간의 가택연금형에 처해진다. 방 안에서만 한 달이 넘도록 지내야 하는 형벌을 받게 된 것. 그리고 혼자 있기 너무 심심한 나머지 쓴 글이 바로 <내 방 여행하는 법>이다.


작가가 방을 여행하는 방식은 간단하다. 걸으면서 방 안의 물건을 보고 떠오르는 생각을 멈추지 않으면 된다. 여행은 구경이 아닌 발견이라는 말이 있듯 내 방에서 새로운 발견을 한다면 그것이 곧 여행인 셈이다. 예를 들면 의자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탁자에서 시작해 방 한구석에 걸린 그림 쪽으로 갔다가 에둘러 문 쪽으로 간다. 거기서 다시 탁자로 돌아올 요량으로 움직이다가 중간에 의자가 있으면 그냥 주저앉는다. 의자란 얼마나 훌륭한 가구인가. 사유하는 인류에게 이보다 유용한 물건은 없으리라.

-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 <내 방 여행하는 법> 중에서

 

자, 그럼 지금부터 방 한가운데 서서 물건들을 둘러보자. 스튜디오형 원룸이라면 침대와 주방이 한눈에 보일 것이고 아파트라면 거실에서부터 시작해도 좋다.


우리 집 거실엔 반려 식물이 많다. 선인장부터 스킨답서스까지 10종이 넘는 식물이 베란다 쪽에 놓여있다. 아내가 선물 받거나 직접 사 온 것들이다. 대학에 아닐 때 기숙사에서 키우던 선인장을 터트려(물을 너무 자주 줬다) 죽인 적 있는 내가 이렇게 많은 식물과 함께 살 수 있는 건 순전히 아내의 덕이다.


식물은 동물만큼이나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햇빛과 물을 무조건 많이 공급한다고 해서 모두 잘 자라는 것도 아니다. 종마다 잘 자라는 환경이 다르고 분갈이나 가지치기를 해야 하는 시기와 정도도 다르다.


단순히 인테리어 소품 정도로 생각하고 식물을 들이면 전부 죽이게 되는 것이다. 무언가를 기르기 위해선 마음 한쪽에 방 하나를 내어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아무리 작고 조용한 생명체라 하더라도.



베란다에서 오른쪽으로 두 걸음 정도 걸어가면 소파가 있고 그 위에 사진이 하나 걸려 있다. 니스 여행 중 찍었던 코트다쥐르 해변 사진을 포스터로 인쇄해 액자에 담은 것이다.


한 달간 유럽 여행을 갔던 때다. 여행 경비 마련을 위해 간단한 서비스를 기획했다. 유럽의 사진과 짧은 에세이를 메일로 보내주는 뉴스레터를 만든 것이다. 매일 아침 9시에 이메일로 유럽의 일상을 받아보는 데에 3천 원. 가격이 꽤 합리적이었는지 2주 만에 100명 넘는 구독자가 모였다.


여행은 파리에서 시작해 프랑스 남부를 거쳐 런던, 아이슬란드까지 가는 여정이었다. 사람들은 매일 아침 유럽의 풍경을 감상하고, 나는 구독자들 덕분에 혼자 하는 여행이 외롭지 않았으니 서로 좋은 일이었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시차를 계산하지 못했다는 것. 한국의 오전 9시까지 메일을 보내기 위해 밤 11시까지 사진과 글의 편집을 마무리해야 했다. 낮엔 여행하고 밤이 되면 머리를 쥐며 ‘오늘은 뭘 쓰지?’를 반복하며 한 달을 보냈다. 하지만 아침에 구독자들이 보내온 칭찬과 격려에 행복했고 새로운 여행의 방식을 찾은 것 같아 즐거웠다.


어떤가. 내 방에서도 산책이 되는 것 같지 않은가? 심지어 아직 거실의 반도 둘러보지 못했다. 그럼 의심을 접어두고 지금 바로 산책을 시작해 보길 바란다. 산책을 마치면 공간과 나에 대해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내 방을 산책하는 즐거움은 공간의 주인인 스스로를 둘러보는 데서 나온다. 또 한 가지 장점은 산책하는 동안 언젠가 변하게 될 공간을 나만의 방식으로 기억하게 된다는 점이다. 슬리퍼를 신고 동네를 산책하는 것처럼. 다른 게 있다면 실내용 슬리퍼를 신었다는 정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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