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가 예술이 된다면
재비어 포르텔라(Xavier Portela)라는 작가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모습으로 그려진 도시의 풍경. 보라와 파랑이 강렬하게 칠해진 미술작품 같았다. 자세히 보니 그냥 서울이다. 선술집의 간판이나 포장마차가 있는 도로 같은 것들.
일상적이어서 눈이 멈추지 않는 장면이지만 외국여행에서 멋지다고 생각했던 풍경들처럼 찍혀있었다. 이국적이라는 건 시각에 따라 주관적인 표현이니 낯설게 보면 모든 도시가 그렇게 보일 것이다.
보안여관도 마찬가지다. 서촌을 걷다보면 꼭 한번은 마주치게 되는 오래된 건물. 통의동 보안여관은 일제강점기에 생겨 60년 가까이 오가는 사람들이 머물다가는 쉼의 공간이었다. 실제로 영업을 했던 여관이다.
1930년대에 미당 서정주를 비롯한 우리나라 대표 시인, 문인들이 묵었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제는 그 역할을 다해 쓸모 없어진 보안여관 옆에 4층 높이의 비슷한 형태의 건물이 세워졌다. 복합문화공간 보안1942다.
옛날 건물 그대로를 보존하고 있는 구 보안여관 건물과 새롭게 지어진 보안 1942 건물이 통로로 연결된다. 구 보안여관은 갤러리로 운영되고 보안 1942에는 카페와 서점, 게스트하우스가 있다.
지금은 찾는 사람이 많지만 2004년 여관의 기능을 다하고 문을 닫은 낡은 건물은 언제 허물어도 이상할 게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그 공간을 낯설게 보며 새로운 상상을 했고 본래와 다른 기능을 갖게 됐다.
이제 예술가의 아지트였던 여관에 예술작품이 전시 된다. 구 보안여관 건물에 들어서면 벽이 허물어지고 골조가 드러난 여관의 모습이 그대로 보인다. 삐그덕 소리를 내는 계단을 올라 2층으로 가면 보안 1942와 연결된 다리가 나온다. 다리를 건너면 서점 ‘보안북스’다. 트렌드와 시대에 맞춰 세심히 큐레이션된 책을 만날 수 있다. 2층의 연결다리는 과거와 현재를 오고 갈 수 있게 만든 것처럼 느껴졌다.
보안북스에는 경복궁 영추문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을 수 있게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이곳의 터줏대감인 강아지 연두와 함께 말이다. 보안1942의 3층과 4층에는 옛 보안여관의 기능을 그대로 이어받아 게스트하우스 보안스테이가 있다. 1층으로 내려오면 커피와 차를 마실 수 있는 33마켓. 먹고 자고 읽고 보는 그야말로 복합문화공간이다.
카페에 앉아 도시에서 오래된 것들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떠올려봤다. 보안여관은 역사와 시간이 점점 사라지는 메트로폴리탄의 숙명을 거스르는 낯선 공간이었다. 이곳을 만들고 얼마 후 도시개발이라는 단어 대신 ‘도시재생’이 키워드로 떠올랐다고 한다. 오래된 주택이나 공장을 복합문화공간으로 활용하는 건 이미 새로운 트렌드가 됐다.
해외여행을 가기 힘든 요즘엔 산책하며 공간을 낯설게 보려 노력한다. 보안여관처럼 용도를 다르게 상상해보거나 평소에 유심히 보지 않았던 골목을 걸어본다. 도시의 시간이 쌓인 자리를 다른 관점으로 다시 걸어보는 것이다.
매일 걷던 길과 마주치던 공간이 이국적인 풍경으로 다가올 지도 모른다. 멀리 떠나지 않아도 좋다. 이제 온라인 전시를 보며 한탄하지 않아도 된다. 상상하는 산책을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일상이 여행이 되고 도시가 예술이 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