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나는 양파 볶는 냄새에 약하다. 양파를 볶다가 운 적도 있으니 말 다했다. 물론 매워서는 아니다. 하지만 양파이야기부터 꺼낼 수는 없는 일. 양파는 아껴야 하니 이야기를 조금 미루도록 하자.
오지를 제외하곤 빵집이 없는 동네는 없었다. 빵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나는 유난히 빵집에 집착한다. 빵집이 있는 동네라면 무작정 안심이 되기 때문이다. 지내는 동안 빵 냄새를 맡을 수 있는 데다 아무것도 먹지 못 하는 곳일 때 빵집이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위로인가. 흐린 날의 빵 굽는 향은 멀리 간다. 그 향을 맡은 공사장의 인부들도, 성당의 신부님도 하는 일 없이 기뻐지거나 괜히 빗방울이라도 후두둑 떨어지기를 기다린다.
빵이 너무 커서 가슴팍에 안고 먹어야 하는 그루지아의 화덕 빵이나, 빵 굽는 냄새가 맡아지면 킁킁대며 빵집을 찾아야 하는 시리아의 골목 빵집, 맛이 얼마나 좋으면 한입을 베어 물고 걷다가 다시 오던 길로 돌아가 먹을 수 없는 양의 크루아상을 사게 되는 파리의 빵가게. 세상의 빵 냄새에 홀려 동물이 되는 것이 나는 좋다. 사실 빵이야 여행지에서 이렇게도 먹고 저렇게도 먹는 거라서, 빵에 눈을 많이 얹어서 먹은 기억이나 말라비틀어진 빵을 석탄기차 난로에 구워서 먹은 기억까지 합하자면 빵에 대한 내 취향은 동물적이다. 그래서 그런지 비행기나 여행지의 숙소에서 작은 잼이나 버터가 나오면 하나씩 주머니에 넣어두는 끈적한 버릇까지 생겼다.
난로에 보리차가 끓고 있는 냄새나 나무 타는 냄새. 아이의 몸에 풍기는 이런저런 냄새나 갑작스런 방문을 의식해 오 분 동안 급히 치운 듯한 친구 집에서 나는 생활의 냄새. 게를 찌는 찜통 연기의 냄새나 어느 냉장고에 붙여놓은 오래된 글씨의 냄새.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집 안에 가득한 빈집의 냄새와 트렁크를 열었을 때 어렴풋이 풍기는 그곳의 마루 냄새. 아, 지금과는 다르게 화학적인 것에 얌전하게 반응하는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나는 도대체 어떻게 살았을까.
나는 냄새라는 말이 좋다. 샴푸 냄새가 좋아요, 라고 했는데 그건 냄새가 아니라 향이라고 하는 거예요, 라고 나를 가르치듯 따지는 그런 유의 사람을 나는 정말 좋아하지 않는다.
이스탄불을 경유하는 비행기에서 내려 시내로 나가 단 세 시간을 걷는 동안, 시장을 가득 채웠던 터키 커피 향은 어땠나. 그때 산 두 봉지의 커피는 뜯지도 않은 채로 일주일의 여행 기간 동안 방 안을 채우고 넘쳤다. 새벽마다 그 냄새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깰 정도였다. 누군가 방 안에 침입한 것 같아 번쩍 눈을 뜨면 살아 넘치는 가방 속의 커피 향이 범인이었다. 하지만 냄새 중의 냄새는 양파 볶는 냄새 아닐까. 냄새의 왕. 양파 볶는 냄새는 세상의 모든 냄새를 담고 있다. 어둠과 그늘, 절벽의 햇살, 꽃잎이 짓이기며 빨아대는 습기, 간절한 한 사람의 안부, 그 모든 것을 담았다.
허기에 지쳐 집에 돌아오면 뭘 먹을 것인지 정하지도 않았으면서 양파를 볶던 때가 있었다. 먼 곳에서 긴 시간을 처절하게 살 때였다. 양파를 볶다가 소시지를 넣어 뒤적거리거나, 양파를 볶다가 물을 붓고 스파게티 면을 끓이기도 했다. 양파를 볶다가 부자가 되어야겠단 생각도 했고 양파를 볶다가 불을 끄고 시를 읽은 적도 있다. 그러면 채우는 느낌과 바닥을 내는 느낌이 내 몸에 동시에 배어들었다. 공간을 가득 채운 양파의 그것에는 그리운 냄새가 있다. 절절한 곡예가 있다. 그래서 집에 양파 남은 게 있느냐 없느냐는 나에게 또 여행 갈 계획이 있느냐 없느냐와 통한다.
사랑을 잃고 양파를 볶다가 그렇게 짐을 싼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