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요일은 쉽니다 Jan 12. 2022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김지수 (B)

선생님과 제가 우주 생성 전부터 만날 운명이었다...


모임, 열여덟 번째

220111, 오랜만에 늘 설레고 아련한 광화문에서, 개인적으로 손꼽을 만큼 마음에 깊이 남은 모임

※가공되지 않은 raw data 그대로입니다


Y: 향이 너무 좋아. 

S: 오, 무슨 향이죠? 

Y: 계피 향인데 참 좋다.

S: 저도 하루 종일 못 마셨는데 커피가 들어가니 좋네요.


[대화 시작]


S: 네, 이어서 하겠습니다. 지난주에 마지막으로 했던 얘기는 덮어놓고 살지 말아라, 그리고 지금 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는 못 만날 것 같은 사람에게 다시는 못 들을 것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여기에서 마무리했었어요. 


그다음에 제가 적은 건, 

"'옛날 사람들의 꿈이라는 건 참 소박했다네. 그 당시에는 중산층이고 하류층이고 할 것 없이 세상을 살아가는 목표가 전화 놓는 거였어.'"

오늘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목표는 무엇일까요? 내 집 마련? 그때는 중산층이고 하류층이고 다 전화기 한 대 놓는 게 꿈이었다면...


Y: 그렇게 따지면 오늘날 사람들은 다 꿈을 이뤘는데...


S: 맞는 말이네요. 오늘날 우리는 다 꿈을 이뤘네...


Y: 나는 내 집 마련도 꿈이지만, 그냥 이제는 오늘 하루 무사하는 것만 해도.. 


S: 맞아요. 그게 되게 큰 꿈일 수 있어요. 하루하루 무사한, 그건 사실 엄청 큰 꿈인데, 결코 소박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원래 그전에 제가 적어뒀던 부분이 책에서 죽음을 

"'오늘 있던 사람이 내일 없어질 수도 있[는 것]'" 

이라고 표현한 부분이어서, 그렇게 생각해 보면 진짜 언니 말대로 오늘 하루를 사랑하는 사람들하고 보낼 수 있는 게 결코 소박하지는 않죠. 이때도 물론 전화기 놓는 게 소박하진 않았겠지만.

 

아마 그때 전화기가 요즘에 아파트일 것 같긴 한데... 아파트까지는 아니어도 그래도 잘 사는 것,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는 것. 또 자식이 잘되는 것, 그런 것도 있겠죠. 근데 전화기를 놓는 게 목표였는데 오늘 있던 사람이 내일 없다고 생각하면, 혹은 어제 있던 사람이 오늘 없다고 생각하면 그 전화기를 놓는 게 의미가 없어지겠죠. 


저는 이 부분도 적어놨어요. 

"'그리스에서 말하는 운명론이란, 있는 힘껏 노력하고 지혜를 끌어모아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거야... 이걸 이해해야 하네. 인간의 지혜가 아무리 뛰어나도,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해도 어찌할 수 없는 저편의 세계, something great가 있다는 거야. 지혜자만이 그걸 받아들일 수 있네. Something great를 인정하고 겸허해지는 것은 머나먼 수련의 길이야.'"

인간이 아무리 뛰어나도, 아무리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해도 어찌할 수 없는 저 편의 세계가 있다. 언니는 언제 그런 운명을 느껴본 것 같아요?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지혜를 끌어 모아도 안 되는 거... 


Y: 뭔가 이 책의 결론 즈음에 있을 것 같긴 한데, 나는 그걸 죽음 앞에서 제일 절실히 느꼈던 것 같아. 이런 책과 같이 자기 계발서나 다른 현자들의 이야기 속에도 분명 녹아 있지만,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게 인생이라는 걸 누누이 알아왔지만, 결국은 또 그 이야기들을 망각하고 내가 살아가는 삶에서 내 뜻대로 하려고 한 것들이 참 많았고 특히나 20대에는 그 욕망이 좀 더 뚜렷하고 강했다면 20대 끝자락에서 죽음을 마주하고 나니 그게 정말 인생에 큰 진리구나를 깨달았던 것 같아.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내 노력, 내 정성, 내 의지, 나의 모든 것을 뛰어넘는 게 죽음이구나를 절실히 느꼈지 죽음 앞에서. 그래서 자꾸 죽음을 기억하라고 하시는 걸지도 모르겠다. 죽음을 겪어본 사람들은 선생님의 말씀이 너무 맞는 말씀인 거지... 허무 지게 맞는 말. 너는?


S: 저도 죽음이 제일 절대적인 영역인 것 같고... 저는 원래 이 질문을 적으면서 생각났던 시기가 그때 A에서 일할 때 기존에 효율적으로 하지 못하던 것들이 있었어요. 그때 담당하시던 분이 사람은 되게 좋은 분이셨는데 능력은 부족한 분이셨어요. 그러다 그분이 나가게 되시고 당장 대체할 사람이 없어서 제가 잠깐 대체하러 들어갔는데, 그때 어쨌든 한 일 년 넘게 보면서 내가 생각했을 때 효율적이지 못했던 것들을 한 달 동안 바꿨거든요. 상황이 되게 안 좋았기 때문에 어떻게 어떻게 해서 뭐는 줄이고, 뭐는 소진하고, 이렇게 이렇게 해서 이 정도면 목표에 꽤 근접했겠다 하고 이제 그 달 결산을 기다리는데 적자가 난 거예요. 그때가 살면서 딱 이런 순간이었어요.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지혜를 끌어 모아도 안 되는 게 있구나... 시험공부를 열심히 하면 항상 성적이 잘 나왔는데, 공부를 정말 열심히 했고 시험도 잘 봤다고 생각했는데 점수가 잘 안 나온 느낌. 그러면서 되게 많은 생각이 들었죠. 그전에 계셨던 분은 정말 믿음이 좋으신 분이었어요. 근데 정말 비효율적인 건 너무 많았고 돈이 막 줄줄 샜어요. 그래도 그분이 하실 때는 적자가 안 났어요. 그다음에 내가 한 달을 해봤는데 나는 그분이 잘 못했던 것들을 바로 잡았는데도 적자가 난 거예요. 그때 가장 큰 원인으로는 오더량을 꼽았었는데, 물론 전제가 달라서 같은 상황에서 운영했다고 볼 순 없지만 그러면 하다못해 오더가 얼마큼 들어오는지도 나의 영역이 아니구나. 그것도 복을 받아야 되는 거지 내가 인간의 노력으로 더 뛴다고 해서는 한계가 있구나... 그런 걸 좀 많이 느낀 시간이었어요. 그때 저는 되게 허무했거든요. 난 분명히 모든 걸 다 했는데도 안 됐으니까. 


Y: 근데 또 인생이 재밌는 게, 뭔가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포인트에서 우리가 허무함을 느끼지만 또 최근에 네가 했던 말처럼 오히려 좋은 부분들도 있어. 내 뜻대로 되지 않아서, 내가 생각했을 때 내 노력과 내 지혜로서는 최선을 했지만 뚱딴지같은 결과가 나왔는데 오히려 그게 좋을 수도 있다는 게... 그런 시각으로 보면 인생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아서 서운함도 있지만 또 내 뜻대로 안 돼서 좋을 수도 있고. 그러니까 인생이 참 재밌다는 말은 그런 뜻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어.


S: 맞아요. 그리고 그걸 받아들이면 오히려 살기 편해지는 것 같아요. 너무 아등바등 내가 다 하려고 하기보다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은 하되 나의 영역이 아닌 것은 맡기는... 최근에 리더십 관련 책들을 계속 접하게 됐는데, 항상 나오는 말이 보통 팀장들이 실수하는 게 위임을 하지 않는 거래요. 너무 자기가 많이 하려고 하면 그게 오히려 팀을 망치는 길이 되는 건데, 뭔가 내가 다 하려고 하면 그게 팀장일 때나 인생에 있어서나 오히려 안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한 거였어요.


Y: 최근에 너도 이제 떠날 때라고 얘기하는 것처럼 나도 이제 회사에서 내가 떠나야 할 시점이 다가오는구나를 생각하고 고려하면서 느낀 제일 큰 변화 중에 하나가, 나는 내가 이 자리를 떠날 때 내 자리를 채울 수 있는 새로운 사람을 뽑아야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최근에는 지금 내 밑에 있는 팀원한테 위임을 하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그게 최근 들어서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든 제일 큰 생각의 변화였던 것 같아. 예전에는 나 떠나면 새로운 사람을 뽑겠지, 그리고 그건 나의 영역이 아니라고 느꼈었는데 아니구나, 내가 그다음 스텝으로 할 건 이분한테 위임하고 가는 거구나. 그게 이 회사를 떠날 때 가장 성공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된 게, 사실 나도 위임을 못하는 리더 중 하나였던 거 같아. 지금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그냥 내가 하는 게 속 편하고 이전 직장에서도 나의 큰 오류 중 하나가 후배들한테 더 공유하지 못했던 것이었고 그래서 나도 힘들었던 부분이 계속 있었지. 악순환의 반복이 맞는 것 같아. 진짜 지혜로운 리더들을 위임할 수 있어.


S: 정말 딱 그 책에서 (<Extreme Ownership: How US Navy SEALS Lead and Win>) 했던 말이 내 밑에 부하가 내 자리를 그대로 이어받을 수 있도록 그를 성장시키는 게 리더의 역할이다는 거였어요. 그럼 팀원이 올라오면 나는 어떡하냐? 그 팀원을 육성하는 사이에 나도 내 위에 상사의 자리를 대체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성장하는 시스템이어야 건강한 거지, 쟤가 내 자리 뺏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건 제대로 된 팀이 아니라고 그랬거든요. 그게 딱 지금 언니가 얘기한 부분이네요. 


Y: 교회도 마찬가지잖아. 교회도 결국에는 셀의 방향성이 이 셀이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하는 것을 넘어서 이 셀이 또 다른 셀을 낳고, 또 낳고, 이 셀 리더가 또 다른 셀 리더를 양육하고, 또 양육하는 게 공동체의 확장이고 성장이고 열매인 것처럼... 


S: 가정도 그렇고, 생육하고 번성하라 (웃음).


Y: 그러네, 어쩌다가 우리가 지금 생육하고 번성하라까지 갔어 (웃음). 


S: (웃음) 근데 다시 돌아가서, 우리가 아까 저녁 먹다가 나눈 대화에 이어서 생각해보면 있는 힘껏 노력하고 지혜를 끌어 모아도 안 되는 게 사람 마음인 거 같아요. 내 마음도 그렇고, 상대방의 마음은 당연하고. 내 마음조차 뭔가 노력하고 지혜를 끌어모아서 움직일 수 있는 한계가 있는데... 그러니까 힘든 거겠죠. 그래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니 이해해야겠네요.


Y: 이 얘기도 있었어. 

"'한밤의 까마귀가 안 보이더라도 한밤에 까마귀가 어딘가에는 있어. 그렇지? 어둠이 너무 짙어서, 자네 눈에 안 보이는 것뿐이야. 그리고 한밤의 까마귀는 울기도 하겠지. 그런데 우리는 그 울음소리도 듣지 못해... 그러나 우리가 느끼지 못할 뿐, 분명히 한밤의 까마귀는 존재한다네. 그게 운명이야. 탄생, 만남, 이별, 죽음... 이런 것들, 만약 우리가 귀 기울여서 한밤의 까마귀 소리를 듣는다면, 그 순간 우리의 운명을 느끼는 거라네.'"

우리의 한밤의 까마귀는 무엇이 있을까? 분명히 존재하지만 느끼지 못하고 있는,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지금 시점의 한밤의 까마귀... 나는 말하면서 생각났는데, 얼마 전에 꿈을 꿨거든. 


S: 꿈 얘기는 오랜만이네요. 


Y: 응, 나 꿈 많이 꾸잖아. 요즘 짧게도 꾸는데 기억하기가 어렵거든. 그런데 최근에 내가 꿈을 꿨는데 우리 가족이 다 나왔어. 가족이 다 나와서 모여 있는데 아빠도 있었어. 그리고 아빠의 또 다른 모습을 우리가 같이 지켜보고 있었어. 그러니까 가족이 다 같이 식사하면서 아빠의 또 다른 모습을 영상으로 보는 그런 느낌으로 이제 같이 보고 있는 아빠의 모습에 대해 아빠랑 대화를 나누고 있었거든. 근데 아빠의 모습이 어떤 풀숲에 웅크려 앉아 있는, 웅크려서 희미하게 보이는 그런 모습이었어. 그래서 옆에 있던 아빠한테 무얼 하고 있는 거냐고 물으니까 아빠가 "기도"라고 하시는 거야. 그 얘기를 하는데... 그 얘기를 듣자마자 펑펑 울었어. 꿈에서도 울고 실제로도 울었어. 아빠, 아빠 부르면서 자다가 너무 슬프게 울어서 아침에 깨서 보니 눈물 자국이 엄청난 거야. 내가 그 꿈을 묵상하면서 들었던 생각은, 지금 내 한 밤 중의 까마귀는 부르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계속해서 노크가 있고 계속해서 이제 오라고 하시는데, 나는 그걸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거지. 근데 그 꿈이, 내가 울던 때의 감정이 어떤 거였냐면 단지 기도가 아니라 그 기도를 아빠가 엄청 애절하게, 되게 절실하게 하고 있었어. 아빠가 "기도" 이러는데 내가 거기서 그냥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 그러니까 마음이, 마음이 되게 저린 느낌. 


S: 왜 그랬던 거 같아요? 왜 울었던 거 같아요? 


Y: 들킨 것 같았어, 아빠한테 나의 연약함을. 그리고 아빠가 그거에 대해 정말 안타까워하고, 그거에 대해 엄청 중보하고 있고. 또 복합적인 미안함... 나의 연약함을 들킨 것에 대한 미안함, 남겨진 자로서의 미안함... 결국 아빠가 마지막에 해줬던 유언을 붙잡고 나아갔어야 되는데, 그러지 못한 방향성과 지금의 상황들이 그냥 안타까웠어. 근데 첫 번째 이유가 제일 컸던 것 같아. 


S: 연약함... 


Y: 아빠는 그걸 다 알고 있는 느낌이었어. 그래서 그 꿈이 엄청 크게 다가왔고, 그러고 이제 이번 주에 임직자 헌신 예배가 있거든. 예배의 주인공은 아니지만 아무튼 그 주체라는 것에 대해 그냥 좀 송구스러운 거야... 근데 어쨌든 지금 상황으로서 나의 행정적인 위치는 리더니까, 결국에는 계속 그 자리로 부르고 계시는구나, 그런 느낌이 들었어. 


S: 굉장히 의미심장한 꿈이네요. 


Y: 응, 꿈에서 깨고 나서도 계속 여운이 남아 있어. 


S: 꿈이 아닌 느낌이에요. 실제로 그 시간에 잠시 아버지를 만나고 온 느낌... 내가 만약에 언니의 상황에서 이 꿈을 꿨다면, 그러면 나는 눈물 나는 이유 중 하나가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구나일 것 같아요. 그러니까 아빠가 돌아가셨어. 그러면 우리는 천국에 갔다고 믿지만 당장 옆에서 보거나 만질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또 천국에서 영원한 삶을 살고 계신걸 막상 체감하지는 못하잖아요. 그냥 떠난 것 같잖아요, 그 사람이 영원히. 그런 시기에 이렇게 의미심장한 꿈을 꿨다? 그러면, 그러면 진짜 아버지가 저기서도 나를 보고 있구나, 나를 위해 걱정하고 기도하고 계시는구나... 이 꿈을 꾸고 그런 마음의 감정들이 요동을 쳤다면 아버지가 전달하고 싶으셨던 메시지가 전달된 거 아닐까요? 그러면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나서도 이 땅에서의 영향력이 굉장히 큰 거죠.


Y: 맞아... 너는? 


S: 저는...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계획이 분명히 있는데 지금 이 복잡한 마음속에서 잘 안 보여요. 잘 안 보여서, 분명히 있지만 요즘에는 잘 안 보이는 것 같아요. 사람의 생각이나 마음이 들어가기 시작하면, 내 마음이 조급해지니까 눈앞에 뭐가 안 보이는 것 같아. 그냥 이 순간조차 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걸 못 믿겠고, 계획대로 안 되는 것 같으니까 내가 자꾸 뭘 해야 될 것 같아... 


[SKIP]


저는 또 적어뒀던 부분 중에,  

"'결정된 운이 7이면 내 몫의 3이 있다네. 그 3이 바로 자유의지야... 아버지 집에서 지냈으면 편하게 살았을 텐데, 굳이 집을 떠나 고생하고 돌아온 탕자처럼... 어차피 집으로 돌아올 운명일지라도, 떠나기 전의 탕자와 돌아온 후의 탕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네. 그렇게 제 몸을 던져 깨달아야, 잘났거나 못났거나 진짜 자기가 되는 거지. 알겠나?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로 수만 가지 희비극을 다 겪어야 만족하는 존재라네.'"

왜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아냐는 말이 있잖아요. 예전에는 그렇지, 그걸 꼭 먹어봐야 아나 했는데 요즘에는 모르겠어. 한심해도 똥인지 된장인지는 먹어봐야만 아는 것도 있는 것 같아요. 전에는 그게 너무 한심하다 생각했거든요. 왜냐하면 이미 겪어본 인생의 선배들이 있잖아요. 그러면 그 사람들한테서 배워서 된장만 먹으면 되는데, 이미 다 고생해서 터득해놨는데 똑같이 고생을 하면 바보라고 생각했는데, 사람은 직접 부딪혀 봐야지만 아는 게 있는 것 같아요. 인간이 어리석어서 그런 건지, 자유의지가 있어서 그런 건지 어쩔 수 없이 본인이 겪어봐야지만 아는 게 있는 것 같아요. 


Y: 맞아. 진짜 단순하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했는데 따먹게 되는 걸 보면, 백날 천날 얘기해봤자 어리석은 인간인 것과 자기 스스로 해보고 싶은 그 자유의지 또한 있기 때문에... 기존의 시행착오에 대해 잘 수용하고 현명하게 거를 건 거르고 받을 건 받아서 흡수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만 또 내가 경험하지 않은 건 결코 나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어. 그리고 또 반대로 그런 시행착오를 겪어서 얻어낸 것을 쉽게 공유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어. 학교 다닐 때 공책을 안 보여줄 수도 있잖아. 


S: 근데 진짜 자기가 안 겪어 보면 언니 말대로 자기 것이 아니라서 정답뿐인 인생을 살더라도 어떻게 보면 결국에는 껍데기뿐인 인생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정말 정석대로 살았는데 본인은 되게 허무할 수도 있고... 고난과 실패에서 우리가 값지게 깨닫는 게 많아요.


Y: 그러니까 아무리 성공을 준다 해도 그 사람에게 그게 유익할지 아닐지는 우리가 판단할 수 없나 봐.  


S: 맞아요. 그래서 오늘도 동기랑 얘기하면서 지금 이 상황에서 회사를 옮기냐 마냐를 놓고 봤을 때, 내가 저 때 회사를 옮기면서 들었던 모든 감정들, 그리고 그걸 지금 돌아봤을 때 드는 생각들이 있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느낀 바를 자꾸 나누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하더라고요. 이것도 그 친구가 이직하든 남든 자기가 결정을 내리고 자기가 그걸로 인해 고생을 해야만 자기의 것이 되는 게 아닐까... 그게 자기의 몫이 아닐까. 그래야지만 또 깨달아지는 게 있겠죠. 그래서 또 너 같은 딸 낳아서 똑같이 고생해보라는 말은 맞는 거야 (웃음). 


Y: 이것도 이어령 선생님이 거듭 강조하는 이야기 중에 하나인데, 이제 김지수 기자도 선생님이 거듭 말씀을 하시니까 이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아, 질문하는 한 모든 사람은 배우고 성장한다는 것. 

"질문은 자기모순적이고 연약한 인간이 이 미스터리한 세계와 대면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이며 내가 낯선 타자와 상호작용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이다."

이 말인즉슨, 그저 그 사람의 의견과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그걸 나의 것으로 삼키며 한 번 더 질문하라는 점에서 김지수 기자도 이 코멘트를 한 번 더 했던 것 같아. 그래서 든 생각이, 이 독서 모임에 있어서도 나는 오히려 책에서 질문을 찾는 게 더 어려운 거야 책을 읽는 것보다. 근데 너는 내가 생각지 못한 질문들을 가지고 와서 나한테 해주는 거지.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 어떻게 보면 나의 생각으로 만들어내기 위한 과정을 우리 독서 모임이 하고 있을 수도 있고 참 중요한 과정이라는 생각을 했어, 질문은 아니었지만 (웃음). 


S: (웃음) 저도 질문은 아닌데, 이어령 선생님이 김지수 기자랑 만나서 얘기 나누는 것을 이렇게 묘사하셨어요.

"'내가 오늘 이렇게 자네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언제 결정된 것 같나? 우주 생성 이전부터 정해진 거야.' 
'선생님과 제가 우주 생성 전부터 만날 운명이었다...'
'그래. 가깝게는 오늘 내가 상태가 나빠져서 병원에 갔다면 우린 만나지 못했겠지. 혹은 지난번 라스트 인터뷰가 깊은 울림이 없었다면 우린 다시 만날 생각을 못 했을 거야. 그런데 결국 자네와 내가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우리가 이 세상에 있기 때문이지. 태어났기에 만난 것 아니겠나? 따져보면 내 부모도 자네 부모도 그저 스쳐갈 인연이었을지도 몰라. 그날 버스를 놓치고 약속이 어긋나고 만나야 할 사람을 못 만나고. 우연히 옆에 있는 여자에게 '차 한잔 하실래요?' 했다가 혼인하고 아이가 태어났을 수도 있지. 그때 아버지가 늑장 부리다 버스를 놓치고, 내가 어느 날 암에 걸리고, 자네가 내게 전화를 하고... 이 모든 것이 나비 한 마리가 허리케인을 몰고 온 격이지.'
...
죽음을 앞둔 현자와 마주 앉은 가을 아침에, 36억 년 전 빛의 찌꺼기가 있던 그 거리를 더듬어가자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나비 효과라고 그러잖아요, 작은 움직임 하나가 지구 반대편에서는 태풍을 일으키는. 근데 이 부분을 읽는데 어떻게 보면 마치 드라마를 쓰는 것처럼 과장되게 설명하는 것 같으면서도 어떻게 보면 정말 맞는 말인 거예요. 예전에 <경우의 수>에서 수없이 많은 작은 우연과 같은 일들이 이어져서 결국 주인공들이 엇갈리는 일련의 과정을 연출한 장면이 있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인생이 참 뭐 하나도 허투루 우연히 별다른 의미 없이 일어나는 건 없는 것 같아요. 


사람과 인연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예를 들어서 지금 우리가 각자의 직장에 있는 것도 여기서 만나야 했던 사람이 있거나 해야 했던 일이 있거나 아니면 요즘에는 그 정도로 거창할 필요도 없고 그냥 내가 여기에서 꼭 들어야 하는 말이 있었거나 혹은 내가 누군가한테 꼭 해줘야 하는 말이 있었거나... 그것 때문에 지금 이 순간에 나를 이곳에 배치하신 걸 수도 있겠다. 내가 아프리카에 있었을 수도 유럽에 있었을 수도 너무 많은 곳에 있었을 수 있을 텐데, 지금 이 순간 여기서 살아가는 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진짜 사람 인연도 운명이죠.


Y: 운명이지.


S: 우리만 하더라도, 우리만 하더라도 서울에 그 많은 교회 중에서 같은 교회를 간 것도 대단한 인연이지만 교회 내에서도 못 만났을 확률이 훨씬 크잖아요. 교회에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아요. 거기서 같은 교구가 된 것도 또 인연인데 또 교구 내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한가득이잖아요. 이래저래 셀을 옮기게 되었는데 딱 그 시기에 목사님이 어떻게 기존 셀에서 언니네 셀로 옮기실 생각을 했을까. 엄청난 인연이지... 


그리고 비슷하지만 다른 맥락에서는, 그래서 그 순간 그 상황에서 들어야만 했던 절묘한 말들도 있는 거예요. 딱 그 순간에 내가 필요했던 말을 듣게 되면서 인생이 바뀌는 경험도 하는 것 같고. 그러니까 말 한마디가 사람을 살리는 것도 되게 촘촘하게 계획된 큰 그림 안에서 인연의 한 요소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말 한마디를 듣기 위해서 그 앞에 수많은 바둑돌들이 놓여 있었어야 되는 거잖아요. 그 사람하고 만나게 되어서, 그 사람하고 관계를 쌓고 그 안에서 서로에 대한 어떤 이해가 생기면서 딱 필요했던 순간에 필요했던 말을 해주게 되는 것처럼... 


Y: 그게 인연을 만나서 연인이 되는 과정인 거 같아. 그 사람과 처음 만남부터 겹겹이 쌓여 결국에는 사랑이라는 걸 깨닫게 되는... 뭔가 그런 파장이 점점 커지는, 깊이가 점점 깊어지는...


S: 맞아요. 그리고 요즘에 돌아보면 진짜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가는데 샐 수 있었던 길이 너무나도 많았어요. 결과론적으로는 일자로 쭉 올라간 거 같지만, 돌아보면 사실 이렇게 가서 이렇게 돌아갔을 수도 있고 저렇게 가서 저렇게 돌아갈 수도 있었는데 그것도 참 재밌는 것 같아요. 


근데 생각해보면 예전에는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게 목표였었는데, 이제는 사람이 소박 해지는 건지 겸손해지는 건지 누군가에게 그러한 존재가 되는 것보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순간에 필요했던 말을 해주는 역할만 해도 엄청나다는 걸 많이 느꼈어요. 내가 꼭 그 사람의 베프가 돼야만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당신이 그 순간에 들었어야만 하는 그 한마디를 해줄 수 있었다면 그 사람이랑 나랑 결국에는 서로 멀어지는 관계가 되더라도 그거 하나만으로 내가 그 사람의 인생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겠다... 돌아보면 나한테 그런 영향을 끼친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요. 


Y: 돌아보면 네가 나한테 해줬던 이야기 중에 정말 그 시즌에 되게 시기적절하고 진짜 그 시기에 내가 들었어야만 하는 이야기를 해준 적이 되게 많은 것 같아. 


S: 뿌듯하네요 (웃음).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인생에 딱 한 마디씩만 새기고 갈 수 있어도 성공한 인생인 것 같아요. 이왕이면 좀 유의미한, 그 사람한테 정말 필요했던 위로를 하거나 혹은 따끔한 충고를 하거나... 근데 나를 놓고 생각했을 때 그렇게 막 거창한 말이 필요한 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상대방은 그냥 한 말인데, 그게 나의 마음에 깊이 새겨질 때 그게 어떤 말이었는지 생각해보면 막 대단히 철학적인 말이었기보다는 그냥 그 순간에 필요했던 마음... 

 

예를 들어서, 회사에 거의 접점이 없는 재무팀 부장님이신데 여름에 제가 회사에서 힘들었던 시즌에 우연히 복도에서 마주쳤는데 이야기를 하시다가 "처음이니까 당연하지"라는 말을 해주셨어요. 그리고 그게 그때 나에게 정말 큰 위로가 되었다고 감사하다고 연말에 메일을 썼거든요. 원래는 퇴사할 때 쓰려고 했다가 회사 동료가 감사를 마지막까지 아껴두지 말라고 그래서 연말을 명분으로 삼아 감사 인사를 한 거죠, 그때 부장님이 그렇게 말씀해 주셨는데 그날 퇴근하고 집에 와서 엄청 울었다고. 답장이 왔는데, 그분은 내가 너랑 대화한 건 기억이 나는데 그 말이 너한테 그렇게까지 위로가 되는 말인 줄은 몰랐다고 하시면서 네 메일을 읽고 내가 나름대로 회사에서 잘하고 있구나, 잘 살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고 적으셨어요. 그렇게 보니 그분의 말이 나에게 되게 힘이 되었고, 그다음에 내가 감사하다고 이야기를 전해드린 게 또 그분한테도 어떤 울림이 되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분이 내가 이렇게 감사 메일도 받아보고 나름 잘 살고 있는 것 같다고 하신 게, 인연의 바둑돌은 작아진 느낌인데 훨씬 깊이 새겨지는 느낌이에요. 그래서 예전에는 예를 들어서 지금 내가 이 회사에 있는 게 어떤 사람을 만나야 해서 하는 사이즈 정도는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지금은 이 회사에 와서 만난 그 사람한테 그 말을 할 수 있었어서, 혹은 그 말을 들을 수 있었어서 그걸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제는 그것만으로 만족이 되는 거예요. 


[카페를 나와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는 길]


S: 책이 짧아도 이 책은 깊어서 다른 책 보다 나눔이 오래 걸려요. 


근데 마무리 나눔으로, 돌아봤을 때 언니한테 들었던 말 중 마치 드라마 대사처럼 적절했던 말은 너무 많았지만, 그때 유언장을 쓴 것도 그런 순간들 중 하나긴 했는데 우리의 대화에 있어서는 여름에 회사에서 멘탈이 나가 있을 때 우리 동네에서 만나서 독서모임을 하다가 그때 <생각이 너무 많은 서른 살에게>를 읽으며 이런 얘기를 나눴잖아요. 

S: 그 우물 안 개구리 있잖아요, 그 챕터 즈음에 이 사람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완벽한 준비가 아니라 망설이는 나를 밀어줄 친구와 방아쇠를 당길 용기라고 했는데, 우리가 만약 서로에게 지금 약속한다면 언제 어느 상황에 처했을 때 내가 용기 낼 수 있게 밀어줘라고 약속하고 싶은지? 미래에 나한테 어떤 일이 닥쳤을 때 그때 네가 중심을 잡아줘라고 서로에게 약속/부탁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면?

Y: 음... 너는?

S: 저는 이 질문을 쓸 때 되게 신났거든요? 근데 지금 이 순간, 지금 이 폭풍 가운데 있는 이 순간은... 만약에 이 폭풍이 영 끝나질 않거나 혹은 더 안 좋게 전개가 되면 그냥 퇴사해도 된다는 용기를... 그렇게 밀어줘도 못할 테지만, 어차피 언니가 퇴사를 하라고 해도 못할 거고 하지 말라고 해도 못할 텐데 그래도... 내가 그렇게 마음이 약해져 있을 때 퇴사를 해도 된다는 용기를 주면 오히려 그 용기로 또 살아갈 수도 있을 거 같아요. 그 용기로 진짜 힘들면 내가 퇴사를 할 수도 있을 것 같고...

Y: 말만 하십시오. 언제든 준비를 하고 있겠습니다.


그러고 진짜 그다음 주인가 출근했다가 너무 비참해서 울면서 점심때 지하철 타고 집에 가면서 언니한테 연락을 했어요. 

11:54.
언니
나 퇴사해도 돼요? 

12:01.
응 언제든 힘들면 나와도 돼! 
괜찮아 진짜
나는 진짜 곁에서 보면서 너가 할 만큼 충분히 했다고 생각해 진짜. 

그때 진짜, 지하철에서 그 답장을 보고 눈물이 줄줄 흐르는데... 제가 만약 드라마를 쓰게 된다면, 그 장면은 진짜 꼭 연출해보고 싶을 만큼 너무 드라마 같은 순간이었어요. 


Y: 나는 너랑 나눈 이야기 중에 제일 기억에 남은 건 두 가지가 있어. 첫 번째는 이제 내가 딱 힘든 그 시기에 뭔가 계속 나의 상황을 부탁하는 입장이었어. 여력이 없으니까 여러 가지로 부탁을 하는 입장이었는데, 그러고 나서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은데 그게 도대체 어떤 걸까를 고민하고 있을 때 네가 "인생은 빚을 지고 빚을 갚아가는 여정"이라고 했던 이야기가 너무 너무 와닿아서... 그 시즌에 그 말이 나에게는 상태명 같은 느낌이었어. 


그리고 최근에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너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너를 사랑하는 사람을 친구라고 한다" (Elbert Hubbard) 였어. 친구는 내 모든 것을 알고도 곁에 남는 사람이라는 것.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렇게 내 곁에 있는 친구들을 돌아보니 한 명 한 명이 정말 그랬고 내가 손꼽을 수 있는 친구들이 있다는 게 되게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지. 


S: 그래서 나이 들면서 진짜 친구가 점점 줄어드는 것도 나라는 사람의 데이터가 점점 쌓이잖아요. 그러면 어쩔 수 없이 안 좋은 데이터도 더 많이 쌓일 거 아니에요, 상처나 시련이나 편견이나. 그 늘어나는 양을 감당해낼 수 있는 타인이 줄어드는 게 당연한 순리인 것 같고, 그래서 나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엄청난 거 같아요. 


오늘은 여기서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EXTRA]


"'마라톤 경주를 하다 갑자기 하늘에서 돌멩이가 날아와서 넘어진 사람은 '운이 나빴다'는 위로를 받을 만해. 그러나 인간이 노력할 수 있는 세계에 운을 끌어들이면 안 돼. 커트라인 1점 차로 누군가는 시험에 붙고 떨어지지만, 그것도 근접한 수준의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경쟁이야. 세상은 대체로 실력대로 가고 있어... '노력해봐야 소용없다'는 자조를 경계해야 하네.'" 


커버 사진

"Summertime sadness" https://unsplash.com/photos/FLigbWjCZz4


매거진의 이전글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김지수 (A)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