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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요일은 쉽니다 Jan 24. 2022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김지수 (C)

차이는 작은 이야기 속에서 드러나거든. 디테일 속에 진실이 있다고.


모임, 열아홉 번째

220118, 오늘은 합정에서 꼭 같이 가고 싶었던 일본 라면 도전! 

※가공되지 않은 raw data 그대로입니다



[대화 시작]


S: 오늘은 5장부터 할게요. 저는 5장을 읽으며 처음 썼던 질문은, 이건 우리가 몇 번 얘기한 적이 있는데 이어령 선생님은 계속 질문을 했다는 얘기를 하시잖아요. 

"'나는 상대를 비방하려는 게 아니라 납득이 안 가면 질문을 하는 본능을 따라갔어. 그런데 질문을 받으면, 다들 자기를 무시하고 놀린다고 착각하는 거야. 질문 없는 사회에서 자라는 게 그렇게 무서운 거라네. 그런 문화 속에서 나는 사랑받지 못했네. 존경은 받았으나 사랑은 못 받았어.'"

 그 말이 되게 되게 아팠어요. 존경은 받았으나 사랑은 받지 못했다... 왜 우리는 질문하지 못하는 사회가 되었을까요? 


Y: 흔하게는 그런 거지. 선생님 그림자도 밟지 말라고 하던 그런, 뭔가 선생님이 하시는 이야기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다는 것 자체가 안 되는, 이미 선생님의 체면을 깎아내리는 그런 느낌이었을 것 같기도 하고... 확실히 질문할 수 있는 분위기라든지 그런 점은 적었던 것 같아. 


예를 들어 교회도 마찬가지인 거 같아. 교회에서도 목사님의 설교에 대해 궁금할 수 있잖아. 진짜 흔하디 흔한 질문으로는 왜 술을 먹으면 안 되는지, 그런 흔한 의문을 사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도 질문해본 적이 없는 경우가 수없이 많은 거 같아.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없지. 


S: 나는 전에 시카고에 있을 때 도쿄 대학에서 공부를 하다 온 친구였는데 그 친구가 시카고가 너무 좋다고 얘기하면서 했던 말이, 여기는 교실 안에서 교수님들이 학생들을 동등한 존재로 대하지 않냐였어요.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갔는데, 이번에 다시 한국에 돌아와 굉장히 보수적인 조직으로 들어와 보니 그때 그 친구가 말했던 교실이라는 공간 안에서 모두가 동등한 존재였다는 게 이런 의미였구나를 많이 느끼게 되었어요. 뭔가... 우리 문화가 좀... 모르겠어요. "네"라는 말 외에 다른 말이 나오면 권위를 무시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있는 것 같고... 


Y: 그리고 결국 학교의 문화가 회사에서 사회에서의 내 모습이 되는 건데 회사에서도 내가 모르는 게 있어도 아는 척하게 되는 것도 있어. 질문을 못하니까, 질문이 어려우니까, 질문에 대해서 윗사람들이 너그럽게 수용하고 "A에 대해서 모르는구나. 내가 알려줄게"가 아니라 "이거 몰라? 왜 몰라?" 이런 느낌이잖아. 그런 부분에 있어 굉장히 인색한 것 같아. 질문에 대해서 우리의 반응이 매우 인색해. 


S: 근데 확실히 질문이나 다른 의견을 말하지 못하면 그게 어떤 조직이 됐든 전반적으로 퀄리티가 떨어지게 되는 거 같아요. 그냥 한 사람의 무언가로 밀고 나가면, 물론 추진력이 필요할 수도 있고 스피드가 필요할 수도 있지만 어느 정도는 부딪히면서 나아가야 되는 게 있는 것 같은데... 하다못해 반대하는 사람들의 의견 자체가 그렇게 훌륭하지는 않았더라도 말을 못 하게 하면 그 사람들의 동기부여가 저하되고 그러면 결국 조직에 악영향을 끼치죠. 


Y: 막내 동생이 질문이 많은 친구였어. 뭘 하는 거에 있어서 항상 왜라는 질문을 하고, 자기가 납득이 돼야 액션으로 취했는데 나나 남동생 하고는 되게 성향이 다른 편이었지. 돌아보면 그냥 각자의 성향이 달랐던 건데, 우리는 그게 잘못됐다고 판단하는 게 있었던 것 같아. 지금 생각해 보면 가족들도 왜라고 묻지 말고 그냥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을 때 일이 잘 진행됐으니 너도 그렇게 하는 게 맞다고 했는데, 그게 잘못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이제야 좀 하게 돼.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어쩌면 생각이 좁았던 사람일 수 있겠구나, 우리는 그냥 조금 더 먼저 살아온 것이 지혜라고 얘기를 나눈 건데 그게 지혜가 아니라 고집, 고정관념이자 편견이자 선입견일 수 있었겠구나 생각이 들어. 


근데 이걸 모른 채 동생의 질문에 대해 수용하지 못했던 내 모습을 돌아보면, 그래서 나도 질문이 쉽지 않은 사람인가 싶기도 하고... 우리나라의 다음 세대 교육 과정에도 이런 부분들이 많이 개선되면 좋겠다 싶고, 나 또한 질문을 하고 받는 훈련이 필요할 것 같아. 나는 윗세대와 같지 않아라고 얘기할 수는 없을 것 같고, 질문에 있어 질문을 할 수도 있고 받을 수도 있는 사람으로 훈련을 해야 할 것 같아. 


S: 맞아요. 저도 그래서 A에서 일할 때 진짜 동전의 양면처럼 한편으로는 아무래도 좀 어리고 여자니까 만만하게 보는 게 있어요. 그러니 같은 지시를 해도 그게 실행되기까지 더 오래 걸려요. 그래서 어느 순간에는 이 사람들이 내가 어린 여자라고 무시하나? 하고 화가 날 때도 있었어요. 근데 또 동시에 이 사람들이 저렇게 끝까지 나랑 싸울 수 있으면 적어도 내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을 때 그걸 모른 척하진 않겠구나, 그게 잘못됐으면 잘못됐다고 얘기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 두 가지 사이에서 줄다리기하는 게 되게 힘든 것 같아요. 왜냐하면 진짜 무시하는 것도 있었을 것이고, 진짜 진심으로 얘기해 주는 것도 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나중에는 오히려 반대를 안 하고 따라오면 뭐지? 이제 싸우기도 귀찮으니까 그냥 토를 안 달고 하는 건가? 하고 그게 또 걱정됐던 적도 있어요 (웃음). 발란스가 항상 어려운 것 같아요.


저는 또 적어놓은 게 

"'성공한 사람들... 뒤집어보면 다 실패자들이야. 양면이 있는 거야... 그래서 나는 이런 생각도 들어. 자식은 부모에게 자연스러운 보살핌을 받고 자라야 하는데, 인위적으로 떼어놓으니 때로는 그 반작용의 힘으로 대단한 운명을 만들어내는구나. 그런데 그렇게 자연스러움을 거슬러 인위성, 인공적인 힘으로 만들어낸 운명이 과연 인간에게 잘 맞는 옷일까?'"

언니라면 화목하고 평범한 삶을 살겠어요, 아니면 천재적인데 외로운 삶을 살겠어요? 평범한데 행복한 서민이거나, 아니면 천재적인데 외로운 왕이거나...


Y: 머리로는 평범한 서민의 삶을 살아야겠다고 결정할 것 같아. 머리로는 평범한 서민의 삶이 나한테 더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어. 근데 마음으로는 왕이 되는 삶을 선택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해. 그게 단순히 왕의 명예 때문이 아니라 기여할 수 있는 범위가 더 넓다는 부분에서 내가 사는 삶 속에서 기여할 수 있는 범위가 넓다면 사람들의 삶의 질이 높아질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넌?


S: 저는 저만 생각했을 때는 외로운 천재의 삶을 선택할 거 같아요. 왜냐하면 그냥 미친 듯이 일이 바쁘면 외로움도 생각이 안 나기 때문에 그 자리의 약점인 외로움도 잊을 수 있는 방도는 있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나는 그 천재성이 탐나긴 해요. 예를 들면, 제가 제일 부러워하는 사람 중 하나가 이강인(축구선수)인데 자기의 영역에서 그런 비범함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비범함을 되게 일찍 발견해서 한평생 달려왔다는 게 되게 부럽거든요. 근데 평범한데 화목한 가정은... 안 누려봐서 모르겠어요. 내가 그걸 누렸다면 그게 좋다는 걸 알고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모르겠으니 그런 니즈가 줄어드는 거 같아요. 물론 제일 좋은 건 비범하기도 하면서 외롭지도 않은 거겠죠. 언니 혹시 <옷소매 붉은 끝동> 봤어요? 


Y: 마지막 회만 봤어. 설에 집에 내려갔을 때 엄마가 챙겨보셔서 그날 같이 마지막 회만 봤어.


S: 정조가 정말 비범하고 좋은 왕이었다고 하는데, 대신 사랑하는 여자와 맺어지기까지 되게 오래 걸렸고, 그 와중에 암살 시도도 많았고 아버지도 그렇게 죽고... 그냥 산이를 보면 너무 고독한 왕의 자리고 사실 신하들 중에서 누구를 진짜로 믿을 수 있었겠어요. 드라마 중반 즈음에 이런 장면이 있어요. 할아버지가 산이한테 그래도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람이 한 명은 있어야 한다 그러니 산이가 할아버지가 보내신 참모 홍덕로가 있지 않으냐 답하면 할아버지가 그런 존재가 아니라 여인이 있어야 된다는 얘기를 해요. 반려자의 개념으로 친구 같이 옆에 있어줄 사람을 얘기하는데 그냥 그 대사를 들으면서 뭔가... 그래, 왕도 그 어려운 삶을 살면서도 그 한 사람이 있으면 그게 또 버티게 해 주는 힘이 되었겠구나. 그리고 그 한 사람이 없으면 아무리 그 모든 권력을 가지고 있다 한들 너무 힘들고 외롭겠구나 싶더라고요. 


또 책에서 한 소설에 대한 언급을 하셨어요.

"'그 반대편에 있는 소설이 레마르크의 <서부 전선 이상 없다>야. 참혹한 전쟁터에서 청년들이 죽어나가지. 주인공 폴이 총에 맞아 숨을 거두던 날 '서부 전선 이상 없음'이라는 최고사령부의 공식 발표가 나온다네. 거기선 백 명 이상 죽으면 이상이 있지만, 한 사람이 죽으면 아무런 이상이 없어. 그런데 죽어간 폴의 어머니에게는 과연 서부 전선에 이상이 없었던 걸까?'" 

만약에 우리도 이렇게 다수를 위한 것과 근데 그로 인해서 상처받는 소수가 있다면, 그런 상황 속에 어떻게 해야 될까?라고 적어놨어요. 모두를 위한 결정은 - 


Y: 없으니까. 어쩌면 다수결의 원칙이 잔인한 것 같아. 그리고 어느 입장에서 바라보냐에 따라 다른 것 같아. 내가 폴의 어머니와 같이 소수의 편에 있는 입장이라면 당연히 소수의 편을 들겠지. 그런데 국가나 다수를 총괄하는 위치에 있다면 고민될 거야. 나의 입장에 따라 다르지 않고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게 맞다고 하겠지. 그리고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드는 생각은, 난 다수일 때가 편하긴 한데 소수를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 가족이든 교회 공동체든 회사 조직이든 나는 무리 안에서 안전을 보장받고 성장해왔지만 그게 내 힘으로 되지 않았다는 것 또한 알고 그 테두리 안에서 미처 보지 못했던 소수의 슬픔 또한 깨닫게 된 거 같아. 그래서 어쩌면 소수의 이야기를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게 다수에서 살아온 나의 방향성이라고 해야 될까. 넌? 


S: 맞아요... 위치가 올라갈수록 사실 하나하나의 이야기를 다 알지 못하니까 그냥 다수를 위한 결정을 내리기가 점점 쉬워졌어요. 왜냐하면 더 이상 한 명 한 명이 아니라 그냥 합이 돼버리니까... 그래서 소수의 입장에 서지 않았던 때가 돌아보면 많은 것 같아요. 하다못해 점심 메뉴 정할 때 넷 중에 셋이 먹고 싶은 거 먹지 하나가 먹고 싶다고 한 걸 먹기엔 어렵잖아요 (웃음). 근데 언니 말대로, 만약 넷 중에 셋이 먹고 싶은 걸  먹으러 갔다면 그다음 날 그 한 명한테 "우리 너 그때 먹고 싶었던 거 먹으러 가자"라고 개인적으로 말할 수 있는 따뜻함은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내가 내린 다수의 결정으로 인해 상처받을 수 있는 그 한 사람을 메꿔줄 수 있으면, 그냥 그걸로 최선이 아닐까? 적어도 무감각해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싶어요. 


이걸 마지막으로 할게요. 

"'나는 타인의 아픔을 모른다고요?'
'몰라. 모른다네. '지금 저 사람이 피를 흘려서 얼마나 아플까?' 그건 자기가 아픈 거야. 자기 마음이 아픈 거지. 우리는 영원히 타인을 모르는 거야. 안다고 착각할 뿐.'" 

이게 되게 맞는 말 같은데, 왜 언니가 자주 얘기하는 공감에 있어서는 타인의 아픔을 알아야 그게 또 공감이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써놨네요. 내가 타인의 아픔을 안다는 것, 이해한다는 것은 그렇다면 어떤 의미인가? 


Y: 음... 그러니까 공감은 마음이, 나의 상황? 처지? 그런 나의 마음의 결이 같은 거지. 그게 이어령 선생님의 말씀대로 동일하진 않더라도 그 공감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한낱 희망인 거지. 그러니까 진짜 조그만 건데 엄청 크게 와닿는 느낌. 공감이 처음부터 크게 오는 게 아니라 그냥 한마디 안에, 뭔가 한 단어 안에 나의 짐, 나의 무게가 모래성이 무너지는 것처럼 그냥 무너져버리는 것... 


[카페를 나와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는 길]


S: 언니 생각에는 공감하고 이해하고는 어떻게 달라요? 


Y: 이해는 노력이고 공감은 반응? 그러니까 공감에 대해서 계속 얘기를 하자면, 공감은 절대 의지로 될 수 없어. 의지로 된다면 그건 진실성이 결여된 가능성이 있는 것 같아. 예를 들어서 공감을 작정하고 온 사람과 대화를 한다고 공감으로 와닿을 순 없을 것 같아. 근데 의도치 않게 그 사람이 해준 어떤 이야기나 한마디가 생각지 못한 부분에서 공감이 되고 와닿을 때가 굉장히 많거든. 그건 이해와는 좀 다른 결인 것 같아. 상대방에 대해 인정하고 이해하는 건 뭔가 노력해서 하는 액션인 것 같고, 공감은 그냥 진짜 생각지 못한 부분에 있어서 그 사람이 보여준 반응이 마음에 와닿는 느낌? 이어령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게 타인이 나일 순 없는데 나인 것처럼 이해한다고 하는 게 위선이라고 했잖아. 그런 것처럼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네가 될 수가 없고 네가 내가 될 수가 없는 그 한계가 있단 말이지. 근데 공감은 내가 네가 아니고 네가 내가 아닌데도 마음이 닿을 때가 있어. 머리로 닿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닿는 연결체인 것 같은데... 뭔가 공감을 느낄 때 그 사람이 나와 완전히 똑같지 않다고 해서 그 공감이 위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잖아. 그리고 그 사람이 나랑 얼마나 비슷하게 공감했는지 추궁하지도 않고. 그냥 공감은 그 순간 마음의 터치고 그거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아. 


S: 맞아요. 뭔가 공감은 언니 말대로 조금 더 감정적인 교류라고 해야 될지? 뭐가 조금 더 입혀진 느낌. 근데 나는 오히려 그래서 이해가 더 위로될 때도 있었던 거 같아요. 내가 상황이 너무 힘들 때는 감정적인 교류보다 그냥 내가 이렇게 힘들어 죽겠는 이 상황 자체를 팩트 1, 2, 3으로 그대로 이해해주는 게, 내가 상황이 진짜 그지같이 힘들 때는 그게 위로가 됐던 거 같기도 해요. 


Y: 이건 MBTI와도 연결될 수 있겠다! F랑 T의 차이. 사고적인 사람들한테는 오히려 이해가 좀 더 위로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S: 근데 나 F인데? (웃음) 보현이 포함해서 우리 셋이 다 F에요. 우리가 유일하게 같은 게 F.


Y: 아? 관련이 없네 (웃음). 


S: (웃음) 우리가 <희한한 위로> 읽을 때도 그렇고 언니가 공감에 대한 얘기를 지속적으로 했단 말이에요. 그리고 그게 쉽지 않다는 얘기를 계속 했었어요. 그래서 돌아봤을 때 가장 최근이기도 하지만 뇌리에 박힐 만큼 선명했던 공감의 장면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때 언니 집에서 내가 선배 부친상 소식을 전했을 때 언니가 순간적으로 울었잖아요. 그게 그런 공감? 이해? 어디에 놔야 할지 모르겠는데 되게 본능적인 눈물이잖아요. 공감과 이해 그 어디 즈음인데, 언니가 그 사람을 아는 것도 아니고 만난 적도 없으니 진짜 그 순간 본능적으로 나온, 그런 인간적인 리액션에서 그 사람의 아픔을 공감하는 게 아닐까... 하고 그 장면이 마음에 박혔어요. 


Y: 그러네, 나도 잊고 있었어. 정말 네가 말한 공감과 이해 그 어디 사이의 감정이었던 거지. 그 감정이 훅 들어와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맺혔어... 

 

그런 것도 있잖아. 예전에 내가 어떤 워십 예배를 갔는데, 프로그램 중에 낯선 이의 편지라는 게 있었어. 아예 모르는 누군가를 위해 내가 편지를 쓰는 거야. 편지 내용은 자유롭게, 그리고 그걸 누가 받을지는 몰라. 이제 예배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펼쳐서 봤는데 "요즘 많이 힘들구나, 어려웠구나... 잘하고 있어. 고생이 많아. 나는 너를 응원해." 이런 내용이었거든. 근데 친구가 그걸 읽으면서 우는 거야. 누가 썼는지도 모르고 그냥 문자로만 남아 있는 이야기인데 그게 아마 그 친구의 시즌에 굉장히 공감 가는 내용이었겠지. 그렇게 낯선 누군가의 이야기로 인해 위로받는 것도 엄청난 거 같아. 라디오도 그런 느낌 아닐까?


S: 맞아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그 비슷한 연장선상에서 브이로그가 인기를 끄는 것이, 물론 나랑 다른 점들이 있어서 매력적이긴 하지만 자기의 일상에서 전개되는, 평범한 일반인의 삶이라는 공감대를 가지고 보는 재미도 있는 것 같고... 막 출근하기 싫어하는 장면이 나오면 공감 가고 맛있는 거 먹으러 다니면 나도 저거 먹고 싶고 (웃음). 근데 언니 말대로 내가 보는 유튜버가 똑같이 회사 가기 싫어하고 맛있는 거 먹으러 다니고 싶어 하는 걸 보면, 나의 삶도 마냥 재미없고 평범하고 지루한 건 아닌 것 같다는 느낌? 그런 것도 있는 거 같아요. 


Y: 맞아. 보고 있으면 나도 한번 찍어볼까라는 생각을 하는 거.


S: 맞아, 나의 삶도 저렇게 찍어놓으면 누군가 재미있어하고 한 편의 드라마가 되지 않을까... 그 생각을 요즘 더 많이 한 게 브런치에 글을 쓸 때 보통 실제 대상을 두고 쓰니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요즘에 그 생각을 참 많이 했어요. 그들도 자기를 위해 이렇게 기록을 남긴 사람이 있다는 걸 알면 그 삶이 얼마나 더 특별할까? 


[EXTRA]


"'큰 얘기들은 다 똑같아. 큰 얘기는 '사람이 태어나서 죽었다'가 전부야. 큰 이야기를 하면 틀린 말이 없어. 지루하지. 차이는 작은 이야기 속에서 드러나거든. 디테일 속에 진실이 있다고. 외국 논문을 보면 모든 게 아주 작고 시시콜콜한 데서 시작해. 구체적이지. 반면 우리나라 논문은 "8.15 해방과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 이런 식이야. 안타까운 일이네.'" 

        

"'그런 의미에서 기록자들, 작가나 예술가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야. 도덕자나 지식자가 아니라네. 감추고 싶은 인간의 욕망, 속마음을 광장으로 끌어내 노출시키는 사람들이지. 거울로 비춰주는 거야. 보통 사람은 비참한 자기 얼굴을 안 보려고 해. 흐린 거울이나 깨진 거울로 보지. 직면할 용기가 없으니까. 예술가만이 일그러진 자기 얼굴을 똑바로 봐.'" 


"'끝까지 이기적인 것 같은 사람도 타인을 위해 파뿌리 하나 정도는 나눠준다네. 그 정도의 양심은 꺼지지 않는 존재가 인간이거든. 남을 위해 뭔가를 해주려는 마음이 인간에게는 있어.'" 



커버 사진

"Summertime sadness" https://unsplash.com/photos/FLigbWjCZz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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