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처음 만났던 순간이 아직도 선명하다.
당시의 나는 특별한 꿈도 목표도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끝없는 야근과 철야 속에서 "회사 그만둘 거야"라는 말만 되풀이하며, 막상 실천할 용기는 없었던 것 같다. 자존감은 바닥을 쳤고, 삶의 방향성은 잃어버린 지 오래전이었다. 마치 거친 파도 위에서 위태롭게 항해하는 종이배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직장 동료와 미팅을 마치고, 잠시 쉴 겸 카페로 나왔다. 미팅의 피로함에 멍하니 쉬고 있다가, 옆에 있던 동료의 낙서하는 모습이 흥미롭게 보였다. 무심한 듯 자유롭게 낙서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 안에 막혀있던 무언가가 뻥 뚫리는 것만 같았다. 나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같이 낙서를 시작했는데, 정말 오래간만에 많이 웃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집에 가는 길 연습장과 팬을 샀고, 그날부터 거의 매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서툴렀지만, 작은 연습장을 매일 들고 다니며 그림을 그렸고, 만나는 사람들 마다 보여줬다. 술자리, 식사자리 미팅이 끝난 자리, 어디든 누구든 상관없었다. 대부분 사람들의 반응은 관심 없거나, " 그 나이에 그림 그려서 뭐 하려고", 혹은 "그림이 쉬운 게 아니야"였다. 그런 반응도 상관없었다.
나는 내 일상을 기록하듯, 계속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사실 그때는 내가 이렇게 꾸준히 그림을 그리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단순한 취미를 넘어, 무언가를 해보고 싶다는 갈증이 생겨났다. 더 깊이 배우고 싶어 졌고, 나도 내 생각을, 내 머릿속에 있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해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졌다.
결국 오랜 시간의 고민 끝에 회사를 그만두고 그림을 공부해 보기로 했다. 기대와 설렘으로 시작된 공부였지만 현실은 달랐다. 더 이상 그림이 재미있지만은 않았고, 부족한 재능은 더욱 도드라지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멈추고 싶지는 않았다. 분명 지금의 이 괴로움만 넘어간다면, 분명 내가 원하는 것들을 표현하고 다시 그림을 즐길 수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나를 다독이며, 오늘도 그림을 그리고 있다.
"언젠가는 나도 멋진 작품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내 그림을 봐주기를 바라며, 오늘도 그림을 그린다."
"마냥 즐겁고 그런 건 취미더라.
즐겁고 행복하지만, 무섭고 긴장되고..
실패하면 아쉽고, 분하고 화가 나는 건 그건.
꿈이라서 그래"
-웹툰 나빌레라 채록의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