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체류의 문턱을 넘다
8월 26일 새벽 1시 싱가폴에서 호주 시드니로 떠나는 비행기를 탔다. 모든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싱가폴의 좋지 않은 기억은 나를 시드니로 가라며 재촉하는 듯 했다. 그렇게 새로운 땅을 밟았다. 내 인생 통틀어 한국에서 가장 먼 곳으로의 여행이다. 그런데 스타트부터 트러블이다. 입국해야겠는데 장기 여행자의 꼬질함으로 ‘불법 체류’ 스멜이 느껴진 건지 꼬치꼬치 묻는 것도 참 많다.
하긴 여자 혼자 장기여행에 돌아가는 비행기표도 없다. 의심을 살만 하긴 하다. 게다가 이곳은 불법체류를 해서라도 살고 싶은 이들이 넘쳐나는 도시다. 거짓말처럼 나는 이민국 같은 곳으로 끌려갔다. 퇴사한 후였지만 회사 명함을 내밀며 장기 휴가를 내고 여행 중이라고 했다. 이번주 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표를 살거라고 했다.
씨알도 안 먹히는 표정이다. 업무 메일함을 열고 내가 어떤 업무를 했는지까지 물었다. 봐도 모르면서 꼬치꼬치 캐묻는 담당자의 프로 정신에 구구절절 설명을 이어갔다. 한시간 정도 지났을까. 실랑이 끝에 나는 가까스로 풀려날 수 있었다. 영혼이 탈탈 털린 것 같았다. 나는 마치 우리에서 풀려난 들개처럼 공항을 어슬렁거리며 심카드부터 구입했다. 그리고 공항 안 맥도날드로 돌진했다.
블랙앵거스 비프가 들어갔다는 햄버거 사진이 매력적이다. 역시 내 촉은 옳다. 이제까지 내가 먹었던 햄버거는 가짜였다. 진짜배기 소고기 패티에서 진한 육즙이 흘러 나왔다. 한국의 웬만한 수제버거를 뛰어넘는 맛이었다. 호주는 맥도날드도 다르구나. 부랴부랴 배를 채우고 여기 교통카드라는 오팔카드를 샀다. 그리고 예약한 숙소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버스에 올라서자마자 확연히 다른 공기가 느껴진다.
가장 뒤에 앉은 자유영혼 느낌의 여성 하나가 샌드위치를 와구와구 먹는다. 싱가폴이라면 100% 벌금형이다. 내 반대방향에 앉은 승객 하나는 할말이 뭐가 그리 많은 지 옆 승객과 수다 삼매경에 빠져있다.
기분이 이상하다.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 건지 확신이 서질 않는다. 혹시나 해서 기사에게 물어봤다. 버스를 거꾸로 탔단다. 중간에 지하철역에서 내려 서큘러키(Circular Quay )역으로 가면 된다고 한다. 다른 승객들도 한마디씩 거들며 어서 내리란다. 버스 한번 탔는데 이게 바로 시드니의 프렌들리인가 싶다.
우여곡절 끝에 숙소가 있는 서큘러키역에 도착했다. 이제 막 봄으로 접어드는 날씨의 시드니 바람이 차갑기만 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시드니의 멋들어진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생각지도 못한 유럽풍 건물이 이렇게 멋있을 수가 없다. 건물 앞에 모여 있는 비둘기마저 사랑스러워 보인다. 반대편으로는 하버브릿지(Harbour Bridge) 와 오페라하우스(Opera House) 가 보인다. 이들을 가르고 있는 바다는 따뜻한 햇살에 반짝인다. 지금까지 내가 한 여행은 모두 맛보기였나 싶다. 내가 왜 진작 ‘호주 워홀을 시도하지 않았을까’ 급 후회가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