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진 리의 소설 <파친코 1,2> 를 읽고나서
해방 전후 각자의 사정에 의해 조선에서 일본으로 이주한 한국인들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한국, 일본 그 어느 국가에서도 환영 받지 못했다. 일본에서는 미개한 조선인으로 무시를 당했고, 한국에 가서는 나라를 져버린 외국인 취급을 당했다. 대대손손 차별과 편견이 이어지니 밥벌이는 물론이거니와 친구를 사귀거나 결혼을 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에게 대물림 되는 아픔 중에서도 가장 큰 트라우마는 따로 있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일본 이주 1세대야 자신이 조선에서 왔다는 기억이라도 있지만, 그들의 자손들은 그조차도 없었으니 당연했다.
나는 한국인인가? 실은 일본인이 맞지 않을까? 근데 그게 무슨 상관이지?
‘자신'이 누구인지 헷갈려 했고 때로는 자신을 부정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국가도 종교도 아닌 '파친코'가 재일 한국인들을 바로 서게 돕는다. 애시당초 재일 한국인 즉 자이니치 들이 구할 수 있는 일자리는 일본인들이 천대하는 일들뿐이었는데, 도박 장사인 파친코도 그중 하나였다. 다행히 자이니치들은 그 일을 일본인 그 누구보다 잘했다. 덕분에 배를 채우고, 가족을 지키고, 재산을 불리며, 자손을 가르칠 수 있었다. 마침내 자이니치는 파친코 덕분에 자기 만의 역사를 갖게 된 것이다.
그런이유로 자이니치의 생존과 역사를 다룬 소설의 제목이 '파친코'여야 하는 것는 마땅하다. 아마 이 소설이 아니었다면, 나는 파친코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영영 알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다 주워들은 사실만을 가지고 파친코가 그저 자이니치들이 받은 차별을 상징한다고만 기억했을 것 같다. 그러나 소설을 다 읽고 나니, 파친코는 단순히 그렇게만 정의되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파친코는 자이니치라는 독립적인 정체성을 상징하는 자랑스러운 역사다. 특히 이런 생각은 소설 말미 자이니치 3세대인 솔로몬의 이야기를 지켜보며 생겨났다. 솔로몬은 자이니치 중에서 가장 부유하게 자란 자이니치 3세다. 그러나 그 역시 일본 사회의 차별은 피할 수 없었기에, 경쟁력을 키우고자 미국 명문대를 졸업하고 해외 은행에 취업하는 등 부단한 노력을 한다. 그의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자이니치여서 핍박받았던 것과 다르게, 세계 사회에서 능력을 인정받는 자랑스러운 자이니치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 솔로몬은 결국 일련의 사건을 겪고 그 역시 파친코를 해야겠다고 말하며 독자들을 놀라게 만든다. 아마 어떤 독자는 이 대목에서 일종의 무력감을 느끼고, 소수자들이 차별 받는 세상에 슬픔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언뜻 보면 자이니치들에게 대물림 되는 잔혹한 운명의 굴레로도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다르게 읽었다. 솔로몬의 선택은 오히려, 그간의 자이니치 역사에 대한 헌사에 가까워 보였다.
솔로몬은 아마도 솔로몬은 미국인도, 일본인도, 한국인도 될 수 없는 자신의 구멍을 억지로 메꾸는 대신, 오롯이 자신의 결정으로 '자이니치' 그 자신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잘난 일본 사람 처럼 살아 남으려는 게 아니라, 그 자신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 남기 위해 고민했을 것이다.
파친코를 선택한 것은, 자이니치가 가장 자이니치 다운 끈기와 성실함으로 그들 스스로를 존속 시킨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파친코는 고로나 모자수 세대에는 그저 생존을 위한 밥벌이였겠지만, 이제 솔로몬 세대에 와서는 드디어 자신의 뿌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헷갈리지 않게 해주는 역사적인 상징, 즉 자신의 이야기로 여겨질 것이다.
자기 자신으로 사는 일은 그게 미움 받거나 오해받는 모습이라해도, 평생 자기 자신이 아닌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 하는 운명보다는 훨씬 나은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으로 사는 일이란 무엇을 말하는 걸까? 예컨대 이런 것은 아닐까? 자신이 가진 미덕과 한계는 무엇이며, 그래서 어떻게 세상에서 버텼는가? 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게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일이 아닐까.
소설 파친코는 그동안 내가 잘 알지 못했던 '자이니치'의 삶을 알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통해서 '자기 자신'으로 살아 남고, 그것을 자신만의 정체성으로 삼는 태도의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었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노아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아마 노아는 자기 자신 그대로 또 하나의 역사가 될 수 있다는 걸 끝까지 몰랐던 것 같다.
나는 이제 일본에서 파친코를 본다면 전과는 다른 마음이 들 것이다. 그리고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질 것 같다. 언젠가 꼭 한 번 파친코에 가보고 싶다.
⊙ 소설 파친코를 요약한다면.
국가와 이념에 버림 받은 인물들이 모질게 살아 남아
자기 자신들이 어떻게 살아 남았는지를 기억하고
끝내 그것을 자신의 역사로 삼게 되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