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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N Aug 31. 2020

자민당 내 파벌구조 복습

몇번을 들여다봐도 머리에 안 들어오는 파벌의 역사와 현황

나름대로 일본정치와 외교를 공부한다는 사람이지만, 자민당 내 파벌은 계속 반복/주입학습을 하지 않으면 머릿속에서 금방 떠나간다. 파벌 수장뿐만 아니라 성향이 바뀌는 일도 잦고 분파마저 생긴다. 필자 스스로도 다시 공부하는 차원에서 '자민당 파벌 상관도'를 퍼와 하나하나 짚어볼까 한다.


페북에서 일본 전문가라 하는 분들도 (중요한 건 아니나) 세세하게 틀린 부분이 보여서 그냥 노파심에서 적어본다.


참고로 학술적으로 자민당 파벌이나 일본 정당정치에 대해 가장 전문가로 생각되는 한국분은 서울대 박철희 선생이다(미국 박사과정중 자민당 비서로 활동했고 그 때 쓴 책-박사논문-은 일본 정치학계에서도 널리 읽힌다). '자민당 정권과 전후 체제의 변용'이라는 책이 있는데 개론서로 추천드린다.




추가로 차기 자민당 총재는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 가능성이 급부상했다. 총재선거는 당원 등은 제외하고 치러질 가능성이 커졌다. 다만 스가 역시 '막장 코로나 정책의 주역'이기 때문에 일단 이번주 돌아가는 상황은 지켜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만약 언론이나 당내에서 합리적인 불만이 제기된다면 여론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른다.


자민당 간사장 니카이와 타케시타, 스가 지지 무파벌이 현재까지 뭉쳤고, 아베를 중심으로 한 호소다파도 잠정적 지지로 돌아섰다는 얘기가 나온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아소 역시 모리토모 학원 문제와 연관돼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 지지하기엔 부담이 따른다. 일단 이 부분은 정해지면 써보겠다.



자민당 파벌 관련해서 학계의 정설은, 사상으로 모인 게 아니라 인물 중심으로 모이고 그게 자연스레 정책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제럴드 커티스의 입장이기도 하다). 물론 시간이 상당히 흐르면서 초창기 만들어진 정책적 노선이 계승되는 게 사실이나 파벌 그 자체는 한국 좌파의 NL/PD마냥 특정한 사상적 입장에 서서 만들어지지 않았다.


또한 자민당 내 파벌은 한 선거구에 자당 인물이 여럿 출마하는 '중선거구제의 산물'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다른 파벌 인물들이 여럿 출마할 때 각 파벌에서 돈이든 사람이든 지원하는 구조가 자연스럽게 정착하면서 파벌구조도 강화돼갔다. 이같은 체제가 소선거구제로 바뀌면서 상당히 약해진다. 여전히 파벌이라는 구조는 당내에 남아 있지만 선거에 대한 영향력이나 자금력은 제한적이라고 봐야 한다.


아래 그림을 중심으로 설명해볼까 한다. 위에서 아래로 시간순으로 바뀌어가고 가장 아래는 최근이다. 다만 아베가 속한 호소다파(細田派)는 이전 수장인 마치무라파(町村派)가 돼 있다는 점만 유념하면 큰 차이는 없겠다. 파벌은 수장 이름을 따서 ~파라 하는 게 일반적이고, 별도로 ~회(会)라는 이름이 있다. 이 글에서는 수장 이름을 중심으로 적는다.



맨 위 왼쪽 이케다파(池田派)는 자유당 출신 요시다 시게루 노선을 잇는 이른바 '보수본류(코치카이宏池会)'다.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총리는 관료 출신으로, 안보투쟁 때문에 물러난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를 이어, 우파색을 지운 '소득배증계획'을 내세운다. 정신적 스승 요시다 시게루의 '경무장(개헌불필요)/미일동맹/경제성장(요시다 독트린)' 정책을 계승한 입장이다. 주로 관료적이고 온건한 입장이라 보면 된다.


1993년 자민당이 정권을 내준 당시의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나 총리감으로 여겨지다 당내 반란, 이른바 '가토의 난'을 일으키고 의도치 않게 고이즈미에게 길을 열어준 가토 고이치(加藤紘一)가 대표적 인물이고 최근에는 타니가키 사다카즈(谷垣禎一, 민주당 정권때 자민당 대표를 지냈다. 코노 요헤이와 함께 '유이한 자민당내 비수상 총재'인데 자전거 사고를 당해서 장애를 입었다), 낙동강 오리알로전락하기 직전인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가 여기 분파다. 이 둘이 적통을 잇고 있다고 보면 된다.


놀랍게도 가토파에서 떨어져 나온 코노 그룹(河野グループ) 후신이 현재의 아소파(麻生派)다. 코노는 코노 요헤이(河野洋平)가 수장으로 위안부를 인정한 코노 담화의 당사자다. 그의 아들이 코노 타로(河野太郎) 현 방위상으로 아소파에 속해있다. 정책적으로는 보수본류와 점점 멀어져 오른쪽으로 가고 있는 걸로 보인다.


이케다파 바로 옆에 있는 사토파(佐藤派), 즉 사토 에이사쿠(佐藤栄作, 기시 노부스케 동생)로 이케다파와 노선은 비슷한데 사토파는 후임인 다나카 에이사쿠(田中栄作) 때 자민당의 실질적인 권력으로 떠오른다.


기본적으로 이쪽은 '구태 자민당(?)'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다. 각종 시골 이권을 챙겨주고 업계와 유착해있는 그런 모습. 외교적으로는 이케다파보다 약간? 오른쪽으로 생각된다. 다나카는 총재 때나 돈문제로 퇴임한 뒤에도 거금으로 파벌 관리를 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다나카가 총리를 하게 된 70년대는 4개 파벌이 분립해서 자리를 나눠 갖는다. 위에 말한 이케다파의 후신 오오히라파(大平派, 김종필-오오히라 메모의 오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기시파(岸派)를 이은 후쿠다파(福田派, 후쿠다 타케오 전 총리), 그리고 자민당 좌파로 불린 미키 타케오(三木武夫, 클린 미키로 불리며 다나카에 이어서 수상이 되나 단명으로 끝남)의 미키파(三木派)다. 이들을 묶어서 '산카쿠다이후쿠(三角大福)' 시대라 한다. 파벌 투쟁이 가장 치열했던 때다.


다시 사토파, 즉 다나카파로 돌아가면 사실상 이들이 70~80년대 자민당을 뒤에서 조종하는 역할을 맡는다. 76년 오오히라파(+다나카파, 수장인 다나카가 돈문제로 전면에 나설 수 없었다)와 후쿠다파는 서로 돌아가면서 수상을 하기로 밀약을 맺고 후쿠다가 수상이 된다.  2년 뒤 오오히라 차례가 왔을 때 후쿠다는 밀약을 깨고 더 하겠다고 나선다. 여기서 당내 분란이 터져나온다.


당내 총재선거에서 후쿠다와 붙은 오오히라는 다나카파의 전폭적 지원으로 가까스로 총재=수상이 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듬해 총선에서 자민당이 전보다 의석수를 줄이자 다시 후쿠다파를 중심으로 당내 분란이 터져나온다. 이른바 '40일투쟁'이다. 일본 수상은 국회에서 다수결로 뽑는다. 이 말인즉슨 과반수 여당이 단결해있으면 총재가 수상이 된다는 얘기다. 하지만 당내 분열이 생기면 상황이 달라진다. 만약 당내 분열세력이 야당과 붙으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실제 그런 투표가 79년에 있었다. 오오히라와 후쿠다는 같은 당이면서도 국회에서 수상 선거로 붙었다. 만약 사회당이나 공명당과 같은 야당이 단결해서 연립정권을 구상했다면 정권교체가 일어났으리란 시각도 있다. 투표 결과를 보면 오오히라가 135표, 후쿠다가 125표로 10표차로 겨우 이긴 뒤 오오히라가 결선투표 에서 승리한다. 이때 사회당 아스카타 이치오(飛鳥田一雄)가 107표, 공명당 후보가 58표, 공산당 후보가 41표, 민사당(사회주의 우파)가 36표여서 전략에 따라서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듬해 오오히라는 병으로 급사한다. 당내 '어둠의 세력'으로 자리잡은 다나카파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를 지원해 수상에 앉힌다. 나카소네는 야스쿠니 공식참배나 교과서 문제로 악명을 떨치는데, 사실상 지금의 고이즈미, 아베의 전신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보면 된다.


여기서 다시 기시파로 돌아가볼까 한다. 자민당은 요시다 시게루의 자유당과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郎, 하토야마 민주당 총리의 할아버지)의 민주당이 1955년 합쳐져서 만들어졌다. 55년체제의 출발점이다. 하토야마와 기시는 둘다 미군에게 전쟁협력자(기시는 A급 전범)으로 낙인 찍혀 공직 추방을 당한 인물들이다.


요시다 시게루는 기본적으로 군사주의에 반감을 가진 인물이었지만 보수가 합치는 데 합의해 자유민주당, 즉 자민당이 만들어지게 된다. 하토야마나 기시는 일본제국주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인물이었지만 자민당 내에선 비주류로 출발한다. 당연하게도(?) 헌법개정이나 재무장에 적극적이다.


70년대 후쿠다파(福田派)로 기본 노선이 이어지고 방계이기는 하나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이끈 나카소네파(中曾根派)도 비슷하다. 나카소네 이후 존재감이 크지 않다가 90년대말쯤 모리 요시로(森喜朗)가 파벌 회장이 되면서 전성기를 맞는다. 이게 지금까지 이어진다.


나카소네가 수상임기를 마치고 87년 수상 자리를 꿰찬 게 다나카파 출신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다. 다만 정상적으로 다나카파를 계승한 게 아니라, 이미 부정부패 이미지로 낙인찍혀있던 다나카의 뒤통수를 치고 실력자 카네마루 (金丸信)과 독립해버린다. 다나카는 이걸로 충격을 받고 쓰러진다. 90년대까지 전성기를 구가한 타케시타파(竹下派)의 출발점이다.


(다나카의 졸도는 2000년대 타케시타파 몰락의 복선이기도 하다. 모리파 출신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다나카의 딸, 마키코와 함께 타케시타파를 사실상 궤멸 위기로 몰아넣는다. 참고로 고이즈미는 무파벌인 적이 없다. 그렇게 보이려고 했을 뿐.)


이 때 일본 경제가 정점을 찍음과 동시에 이런저런 문제가 터져나오는데, 미공개주식을 의원들이 받아먹은 '리크루트 사건'과 '소비세 도입'이 그것으로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받는다. 버블로 흥청망청하던 시기였지만 위기도 금방 찾아온다.


이 때 정계의 프린스로 떠오른 게 오자와 이치로(小沢一郎)다. 최연소 간사장을 맡기도 한다. 당시 타케시타파에는 '7부교(奉行, 부교는 옛 관직이름)'가 있다 하여 오부치 게이조(小渕恵三), 카지야마 세로쿠(梶山静六),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郎), 하타 츠토무(羽田孜), 와타베 코조(渡部恒三), 오쿠다 케이와(奥田敬和), 그리고 오자와 이치로다. 쟁쟁한 인물들이다. 여기에 90년대 자민당 정계를 주도하고 오자와와 대립한 노나카 히로무(野中広務)도 추가할 수 있겠다.


이 파벌 내에선 어떻게 정치 부패를 해결할지를 두고 분란이 생긴다. 오자와 이치로는 자민당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선거제도도 바꾸고 정치자금문제도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당시 관방장관을 하던 오부치 게이조나 실세 하시모토 류타로 등은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다.


당시 타케시타에 이어서 총리를 하던 게 카이후 토모키(海部俊樹)와 미야자와 기이치였으나 실세 총리라 하기엔 거리가 멀었다(우노 소스케宇野宗佑도 있었으나 여자문제로 69일로 단명). 당시 냉전붕괴와 맞물린 정치개혁 문제를 두고 주류세력 타케시타파에서 분쟁이 벌어진다. 크게 봤을 땐 오자와 vs 오부치/하시모토로 오자와는 뜻이 관철이 안되면 탈당하겠다고 겁박한다.


오자와가 보기에 미야자와(+자민당)가 미적거리면서 제대로 일을 처리하지 않았고 결국 하타를 얼굴 마담으로 내세워 1993년 야당이 낸 내각불신임안(총선거)을 가결시킨다. 자당 총리에게 일격을 날린셈이다. 이어진 총선에서 하타와 함께 세력을 규합해 신생당(新生党)를 만든다. 타케시타파의 분열이다.


선거 결과 자민당 과반은 무너졌음에도 1당은 유지한다. 하지만 신생당은 무려 8야당을 묶는 연립을 선택하고 정권교체를 택한다.


이로써 93년 총선거를 마지막으로 중선거구제가 사라진다. 정치개혁법안이 추진되고 자민당에서 탈당해있던 일본신당(日本新党)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가 오자와 후원으로 총리가 된다. 하지만 이 역시 오래가지 못한다. 오자와와 사회당의 알력과 이를 노린 자민당의 분열 책동(노나카 히로무 등)으로 다시 자민당은 사회당, 신당 사키가케(さきがけ, 선구자라는 뜻)와 손을 잡고 사회당의 처음이자 마지막 총리인 무라야마 토미이치(村山富市)를 앞세워 새 정권을 세운다.


이때는 자민당 내 온건파인 카토파(리버럴, 코치카이)와 하시모토파(타케시타 후계자)가 손을 잡는다.


쓰다보니 너무 길어져 93년 이후 전개에 대해서는 다른 글로 적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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