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후 대비로 아이들 공부시키는 투자의 시대는 지나갔다
공교롭게도 우리 실장님, 마주보고 앉은 부장님 모두 '고3 학부형'이다. 증권사다보니 아침 7시에 출근하고, 본부 특성상 늦게까지 야근하는데, 항상 일에 폭 빠져계시던 두 분 모두 요즘들어 아주 살짝 다르다. 눈빛에 초조함이 가끔 비친다. '입시 원서' 시즌이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내가 너무 바빠서 못 봐줬더니 성적이 안 좋아."
"최선을 다해서 뒷바라지 해 주시잖아요. 금방 제 실력 나올거예요."
"아냐, 스카이 가는 건 물건너 갔어. 어떻게. 미안해."
스카이.
그게 도대체 뭐길래.
한국의 부모라는 죄로 아이들이 '남들보다 뒤떨어지지 않게' 남들 한다는 건 무조건 다 시켜야 되는 일종의 문화, 일종의 강박, 일종의 의무사항이 존재한다는 점은 잘 알고 있다. 나 역시 그 문화의 한 가운데를 지났다. 부모 마음은 애들 스카이 만들고 싶고, 그러려면, 학년 올라가는 길목마다 버티고 있는 사교육(사기꾼)들 다 벌어먹여야 한다. 그것이 무엇을 위한 '돈지랄'인지 생각할 여유도 없이 뼈빠지게 번 돈, 남 좋은 일 하며 사교육 시장의 각종 피라냐들에게 빚 져가며 돈 갖다 바치길 수차례하다, 운이 좋아 잘 풀리면 아이들이 스카이에 간다.
그러나, 스카이는 새로운 지옥의 시작이다. 새마을 운동 시절부터 존재하던 고시 공부로 아이들을 등 떠밀거나, 그놈의 입사 원서 하나 내는 데 필요한 스펙은 스타트업 상장시키는 것보다 더 '빡세다'. 인사 면접권자 스스로는 평생 가져보지도 못한 온갖 스펙을 다 갖추려면 스카이에서도 아이들을 또다른 사교육(사기꾼)들에게 제물로 바쳐야 한다. 부모들은 은퇴자금을 생각할 여유도 없이 대학 보낸 애들을 또 다시 영어 공부 시키느라 돈 쓰고, 남들 가니까 나도 가야된다는 어학연수 보내느라 학자금 마련에 허덕인다. 부모가 도와주고, 애들 스스로도 알바비를 모아 남 좋은 일을 또 해대며 간절히 희망하는 것은 결국 회사원이 되는 것이다.
회사원이 되어보면 애들은 뭔가 잘못된 것을 느낀다. 이 월급으로는 엄마 아빠처럼 살기 다 틀렸다는 생각을 한다. 일단 커피 한 잔씩 맘 놓고 사먹으면, 회사를 다닐수록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어야한다는 함정을 만나게 된다. 월급으로는 생활을 겨우할 뿐, 친구들 사는 아파트는 이번 생에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엄마 아빠에게 다시 죽는 소리를 한다. 나는 돈이 없어 시집을 못간다는 개소리를 하기 시작한다. 은퇴를 코 앞에 둔 부모들은 다시 허리띠를 졸라맨다. 늙은 몸 이끌고 은퇴할 수 없다. 임금 피크제 이런거 걸리지 않도록 죽도록 정규직에 목숨걸게 된다. 그리고 부동산을 알아보며 세금도 대신 내주고 싶다. 아이들의 월급이 너무 택도 없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늙은 부모는 기껏 스카이 보낸 회사원 아이들의 결혼자금을 대느라 바쁘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애들은 결혼하고 나서 부모가 예전에 그랬던것 처럼 저들끼리 알아서 애들을 키워내지 않는다. 월급을 벌러 가야하니 애들을 봐 달라고 한다. 육아휴직을 하면 경력이 끊기고, 경력이 끊기면 공부한 것이 헛것이 되니 절대 그럴수 없다고 한다. 그러면 도우미를 찾아보자고 해본다. 도우미 비용은 딸의 월급과 유사하다. 안쓰러운 마음에 엄마는 손주를 봐주겠다고 울며 끄덕인다. 염치없는 것이 어찌보면 당연해진 아들 딸들은 손주 (공짜로) 봐달라는 철없고 이기적인 부탁을 한다. 애들 회사간 시간에는 뼈빠지게 파출부 도우미처럼 그 애들의 애들인 손주들 먹이고 집 치우고 똥치우느라 시간 다 가고, 애들 돌아오면 그 옛날 식모처럼 밥상차리고 설겆이하고 공짜 노역을 제공한다. 애들은 부모 덕에 세이브 시킨 각종 비용을 비싸진 손주들 영어유치원 보내는데 탕진한다. 그래도 공부 시키는 것이니 말리긴 어렵다. 그렇게 허리가 휘어가는 늙은 부모는 식모처럼 사용된다.
손주들이 걷고 말하기 시작할 무렵, 자식들은, 상속받을 자산이 없는지 살핀다. 손주들 영어유치원부터 태권도, 축구, 온갖 것들이 돈 다발이니까, 뭉텅이 돈을 노린다. 부모들이 좋은 시절 사놓아서 값 좋은 아파트는 생전 증여로 조르기 딱 좋은 대상이다. 그 돈 타먹겠다고 난리치던 애들에게 맘 좋게 물려주고 나면, 받을 거 다 받은 마당에 싸늘해진다. 손주들도 다 크고 나면 돈 없는 할머니, 할아버지 안 찾는다. 빈털털이가 된 노인 부부들은 아파도 눈치보며 아프고 간병인 부르는 것도 손 떨게 된다.
누구를 위한 인생인가.
애들 스카이 보내 맞이할 미래는 월급쟁이 애들이다. 그 애들 월급쟁이 만들어서, 그 월급 받는 결과를 만들어 봤자 지들끼리 살라고 놔 두면 월세내기도 빠듯한 인생을 살게 된다. 그나마 있던 내 재산까지 모조리 나눠주며 살아야한다면, 그 난리 굿은 누구를 위한 난리굿이었나.
하지만, 나는 이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돌아오는 대답은 정해져있으니까.
"너는 자식이 없어서 몰라. 니 애면 그런 얘기 못한다."
예전엔 자식 농사에 올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노후보장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엄마도 나에게 늘 '너는 나를 버리면 안돼'라고 입에 달고 살았다 (무, 물론 지금도 그렇다). 옛날 사람이라 그렇다고 생각하나, 나는 그 인생을 따라가고 싶은 생각 없다.
너를 엘리트 만드느라 내가 돈을 다 썼으니, 내 노후는 니가 보장해라.
사실 누구도 잘못 없다. 투자한 부모나, 값을 못하는 자식이나 누가 무슨 대역 죄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너'인 자식들은 그 코스를 가고 싶은지 여부를 생각해본적도 없다. 등떠밀리며 지나온 모든 코스는 투자자인 부모의 선택이었다. 부모는 해당 투자를 한 뒤, 나올 수익에 대해서 대충 가늠했으므로 투자한 것이다. 스카이를 보내놓으면, 이 정도의 소득을 확보하는 사람들이 될 것이라는 예측. 예측이 아니라 자식이어서 했다는 둥 포장은 치워버리고 냉정하게 살펴보자. 이 예측만 맞았다면, 나쁜 투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부모의 이 예측은 현재 시점 모든 가정 조건들이 산산조각났다. 그 돈 넣고 그 수익을 기대할 만한 상황이 아닌 것이다. 투자의 책임은 투자자에게 있다. 가정이 잘못된 사실을 간과하고 투자를 집행했으니, 수익이 나오지 않더라도 그 손실을 감당해야한다. 그런데 이 투자에서는 투자자들, 부모들도 잘못이 없다. 설마, 그렇게 수익이 안 나오는 지 예상을 못 한 것이다. 자산가격은 이렇게 올랐지만, 사람 값은 똥값이라 소득이 그 자산 상승을 따라오지 못하고, 그래서 소득은 의미가 퇴색된 것인데,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세상이 잘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정부 정책은 이런 부분에 대한 범퍼를 제공하지 않는다. 각자 선거철이 단기적으로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아젠다는 부동산 어쩌구에 매몰되고, 갑자기 출산정책을 장려하고, 갑자기 신혼 부부를 위하겠다며 애들이 없어서 문제라고 한다. 그렇게 부모가 되어 또다른 투자자로서의 인생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는 알려주지 못한다. 표 떨어지기 때문이다.
가족이기에 소중한 가치도 많다. 하지만, 가족 생활 역시 경제적 바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 가족을 일구는 것 자체가 다수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구조가 된다면, 그런 가족 구조는 지속가능성이 없다. 1인 가구가 늘어나는 이유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 보조금 몇 푼 더 준다고 애들을 더 낳아 기르라는 것은 참 저렴한 정책이다.
애들이 많으면 좋지만, 애들이 살아갈 세상은 스카이 가봤자 월급으로 평생 허덕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세상이다. 그런 인생을 겪으라며 각 부모들을 등 떠밀면, 이들은 늙어서도 알바에 허덕일 수 밖에 없다. 노후가 준비되지 않은 돈 없는 노인들은 사는 게 지옥이다. 아프면 건강보험이 있지 않냐는 말은 논점과 상관 없다.
나는, 지금 이 순간, 유치원 보내는 손주들이 있는 은퇴 전후의 부모님들이 안타깝다. 게다가 그 부모에게 손주 떠밀며 월급 벌러 나가는 40대들 부부들도 안타깝다. 공부는 할 사람만 하고, 그 돈 모았다가 편하게 물려주고, 본인들도 즐거운 노후를 맞이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는 '자식이 없으므로' 그 얘기를 할 자격은 없다.
대신, 전국민을 부동산 투기꾼 사교육장으로 떠밀지 않는 방법을 찾아보고 싶다. 그것이 '투자'라는 이상한 단어를 보다 깊이있게 살펴보는 과정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