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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을 쓰고 사는 삶을 이해하기

by 정희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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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을 쓴 삶을 이해하는 것



서울에서 부산으로 이주한 후 한동안 어울렸던 사람이 있었다.


그는 경상도 토박이라서 그런지 한나라당 - 국힘 계열 정당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였고, 가끔은 여성 혐오로 불릴만한 언행이 은연중에 드러날 때도 있었다. 흔히 말하는 전형적인 남초 커뮤니티의 정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정치적 성향이나 취향을 이유로 그를 싫어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런 성향은 환경의 영향을 받는 것이고, 본질적인 품성과는 무관 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분야에서 장점을 갖고 있었다. 그가 가진 전문성은 사회에서 가치를 인정받는 것은 아닐지언정 나 개인으로서는 존중하는 분야이기 때문에 나는 그를 인정하는 편이었고, 그가 남을 속이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 이외에도 개인적인 삶에서 적당한 친분을 유지해도 좋겠다 생각해서 주위에 좋은 여자 분을 소개 시켜준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 인연은 이어지지 않았다. 잘 되기를 바랬지만, 여자 분은 그에게서 좋은 인상을 갖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최근 어떤 일을 계기로 사실은 그가 오랜 세월 동안 페북에 드러나는 내 삶을 보면서 나에 대한 적의를 키워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예전에 그는 내게 페북을 줄일 것을 권하곤 했는데, 나는 그게 단순히 내 생활 습관을 걱정하는 충고라 여겼다. 하지만, 나중에 그의 본심을 쏟아낼때 알고보니, 내 정치적인 성향이나, 가족들과 살아가는 모습에 대한 증오가 숨어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 SNS를 그저 일종의 정신적 배설 같은걸로 생각해왔다. 평생 살아온 서울을 떠나 부산에 살게됐을 때 서울의 친구들과 연락하고 지내는 수단이기도 했다.

그러나 필터를 거치지 않은 배설이다 보니, 당연히 내 생각과 삶이 드러나게 된다. 그게 누군가 에게는 신경을 긁어 증오를 키우는 자극이었던 것이다. 뒤늦게 그가 속마음을 드러냈을 때, 심지어 내 가족에 대한 언급을 하는 것을 보며 섬뜩함도 느꼈다.


사실 페친이란거야 바람 같은 덧없는 것이고, 보통은 성향이 안 맞으면 논쟁을 하거나, 안보면 그만인데, 그는 한동안 나를 통해서 일정한 경제적 이익을 얻었기 때문에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는 그런 반감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가만히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가 나와 다르다 해서 그에 대한 반감을 갖지 않았지만, 그 역시 그럴 것 이라고 생각한 것은 나의 큰 착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착각은 큰 위험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그가 한때는, 내가 독일에 있는 동안 가족이 아니라 자신에게 인감도장 같은 민감한 자산을 맡기는 건 어떠냐는 제안을 한 일도 있었다.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만약 내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경우에 따라서는 나와 나의 가족에 안 좋은 일이 생겼을 수도 있다.



이 사건은 내개 소박한 화두 하나를 던져줬다. 내가 일상에서 놓치고 있던 것에 대해 .

우리는 때때로, 만난 적도 없는 사람에게서 호감을 받기도 한다. 조용히 우리의 삶을 바라보며 공감하고 응원하는 이들이 있다. 감사할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지켜보며 증오를 키우는 이들도 있다. 이해관계 속에서 그 감정은 감춰질 수 있다. 이해관계 때문에 그는 우리 곁을 머물지만. 우리는 그가 갖고 있는 진짜 속내는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게 우리 인생의 가장 큰 위험 중 하나다.



이유 없이 누굴 좋아하듯이 이유 없이 누군가를 미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순간 이해관계가 갈린다면, 그 미움에 혼자서 키워온 증오를 더하는건 아주 쉬운 일이다. 이해관계는 우리에게 갈등을 정당화할 이유를 아주 쉽게 만들어 준다. 그건 일종의 자기기만이고 옳은 일이 아니지만, 자기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이런 자기 기만을 스스로 돌이켜 보고 자제할 정도의 자기성찰을 모든 이에게 기대하긴 힘들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차피 우리가 모든 이의 호감을 얻을 수 없다. 시장에서 마케팅을 할때도 타겟그룹을 세우지 않고 모든 층에서 사랑 받겠다고 하는 것은, 아무에게도 사랑 받지 않겠다고 하는 말과 비슷하다.


사랑 받는 것은 고사하고 심지어 나는 그저 내 삶을 살아갔을 뿐인데도, 나의 의도와 상관없이, 내가 아무런 감정을 갖지 않은 누구에게 내 모습이 불쾌한 자극이 되기도 한다. 우리 삶을 보면서 그는 그 자신의 삶도 바라볼 것이다. 그 자신의 삶은 우리가 관여할 바가 아니며, 그래서 그가 갖게되는 감정도 우리가 예측하거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관계의 성격을 구분하는 일이다.


있는 그대로의 솔직한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관계는 친구다.

인생에 친구는 몇 되지 않는다.

내게도 친구라 할 수 있는 이가 3명 정도 있는데 그중 하나는 세상을 떠났다.

친구는 그의 삶 앞에서 내 마음을 정직하게 드러내고, 나의 삶 앞에서 정직한 그의 마음을 드려다 볼 수 있는 사람이다. 이건 어려운 일이니 당연히 귀할 수 밖에 없다.

이 귀한걸 함부로 요구해서는 안된다.


이해관계 속에서 생기는 인연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굳이 서로에게 정직한 마음을 요구할 필요가 없다. 사회적 인연이란게 이렇다.


결국 이 사건은 아직도 철들려면 먼 내게 당연하고 자명한 한가지 기준을 보여준 셈이다.


우리가 진짜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내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감정을 숨기지 않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밖의 모든 관계는, 사회라는 가면극에서 각자 맡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에 불구하다.


남녀 노소, 빈부나 지위를 막론하고, 누구나 친구가 될 가능성에 열려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강한 마음을 갖고 있고, 스스로에게 떳떳한 사람만이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진실한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과 상황을 이해하는 것, 타인과 이어지는 프로토콜의 한계를 이해하고, 함부로 우정을 기대하지 않는 것은 현명함이다. 우리는 강한 인간이 될 뿐 아니라 현명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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