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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플라워

가난하고 예쁜 그녀에 대하여

by 정희권

아침에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오는 길이었다. 독일의 일상은 평화롭지만, 단조롭고 때론 우울하다. FM 라디오에서 Wild flower가 들려왔다.
독일에는 영미 팝송을 틀어두는 방송이 많다. 2차 대전 패배 이후 미국의 마샬플랜은 독일에게 경제적 성공과 함께 미국의 대중문화를 가져왔고, 그 영향은 길고 강력하게 이어졌다. 독일의 나이 먹은 세대에게 올드팝은 그들의 청춘과 같은 것이다.
수십 년 만에 다시 듣는 노래였다. 이 예쁜 노래는 누군가와, 내가 마음을 아프게 한 다른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노래 속 그녀는 상상하기 힘든 시련을 겪으며 수없이 눈물을 삼킨다. 가수는 노래한다. (6) Wildflower - Skylark [HD] - YouTube 그녀가 울게, 또 꿈꾸게 내버려 두라고. 그녀는 비를 맞으며 거친 황야에서 피어나는 자유로운 꽃이라고


1990년대 말 가을 서울.

내 여자친구와,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하던 자리에 이 노래 Wild Flower가 들려왔다. 나는 “난 이 노래를 들으면 C가 생각나”라고 말했다. C는 이제 우리 모임에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됐다. 세월이 많이 흐른 후 그 자리에 있었던 후배는 내게, 내가 자리를 비웠을 때 내 여자친구가 자신과 어울리는 노래는 무엇이냐고 물었다는 말을 해줬다. 나는 그때도 부족한 사람이었다. 내 여자친구에게도, 그리고 C에게도,


우리의 불완전한 시절이 시작된 건 그 일 년 전이었다.

인터넷이 막 보급되기 시작한 시절, 전화선으로 접속하는 천리안이니 하이텔이니 하는 컴퓨터통신이 유행할 때, 사람들은 컴퓨터통신 동호회에 모였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우리 모임에 어느 날 나타난 C는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꽤 객관적으로 보려 해도 예쁜 편이었고, 무엇보다 마치 1970년대 한국영화 주인공의 말투 같은 우수 어리고 차분한 음색이 특이했다. 우리는 그 목소리에 대해서 가끔 농담을 했다. 그녀는 문학을 좋아했고, 당시 유행했던 기형도나 카프카, 하루키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우리는 곧 친해졌다. 항상 청바지에 티셔츠만 입고 다니던 그녀는 예쁜 동시에 참 수수했지만, 그 수수함이 그녀의 매력을 감출 수는 없었다.
우리는 금방 친해졌다. 그녀는 가끔 나를 보면서 가만히 웃을 때가 있었는데, 그때 나는 그녀가, 내가 두르고 있는 외투, 적당한 인문적 교양이나 그럴듯해 보이는 직장 같은 것 이면에 있는 허당캐릭터를 꿰뚫어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가끔 그걸 놀릴 때도 있었다.

돌이켜 보면 C는‘책을 좋아하는 예쁜 여자’라는 내 이상형에 가까운 사람이었지만, 당시 우리는 둘 다 이제 막 사귀기 시작한 연인이 있었다. C는 대기업을 다니는 훤칠한 훈남 후배의 열렬한 대시를 받고 있었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시작된, 주위에 숭배자를 몰고 다니던 꽤 매력적인 여자후배와의 내 불완전한 연애도 그때 막 시작하던 참이었다.

컴퓨터 통신에서는 실제로 사람들이 만나는 정기모임도 있고, 때로는 누군가 즉흥적인 모임을 소집하기도 했다. 번개를 친다는 말이 이때 생겼다. 장마철인데, 누군가 번개를 쳤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거슬러 올라가 도착한 주말저녁이었다. 우리가 가끔 모이던, 밤섬이 내려다 보이는 한강뷰의 카페에는 나와 C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 둘 다 출발할 때 당일 올라온 공지를 확인하지 않아 모임이 폭우로 인해 취소됐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아직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을 하던 시대가 아니었다.

나와 C는 비 내리는 한강의 야경을 보며 긴 이야기를 나눴다. 책, 음악과 영화, 그녀가 자기가 축구를 좋아한다고 하자 나는, 남자들이 반바지만 입고 45분 동안 뛰는 운동에 별 관심이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보지도 못하고, 연애가 시작되기 전에 내 인생의 방향만 바꿔놓고는 다른 남자가 생겨 떠난 전 여자친구 이야기를 하자 그녀가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녀가 들려준 자기 이야기는 내겐 좀 놀라운 것이었다.

C가 사랑했던 글 쓰는 남자는 폭력을 일삼았다. 그녀는 결국 도망쳤지만, 그 남자가 그녀 명의로 발급한 카드빚에 오랫동안 시달려야 했다. 홀어머니와 그녀를 세상의 풍파로부터 지켜줄 사람은 없었다. 애써 담담함을 유지하려 했지만, 시행착오로 가득한 학창 시절을 보내고 이제 막 사회에 나왔을 뿐인, 제대로 된 연애조차 해본일 없는 나에게는 놀랍고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그러나 나는 티를 내지 않았다. 적어도 그러려고 노력했다. 얼마 후 그녀는 모임에 나오지 않게 됐다. 그 훈남 후배와 잘 되지 못했다는 이야기만 들려왔다.


몇 년이 지난 어느 해, 내 생일날
나는 첫 직장인 대학교 교직원을 그만뒀고, 주기적으로 이유도 기억나지 않는 싸움을 벌이던 여자친구와도 헤어진 지 오래였다. 집에서 게임을 하고 있는데 호출기에 번호가 찍혔다. C였다. 우리는 선릉에서 만났다.

“난 오빠가 분명히 생일날 집에서 게임이나 하고 있을 줄 알았지” C는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저녁을 먹으며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했다.

“나는 내가 돈이 없는 게 그렇게 문제가 될 거라 생각 못했어. 그 남자는 ‘나는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라는 말을 하면서 헤어지자고 하더라고. 글쎄 내가 복권도 사 봤다니까?

그녀는 말하는 동안 계속 웃고 있었다. 나는 지금도 가난하고 예쁜 여자애들을 생각하면 슬퍼진다. 우리는 파국으로 향한 서로의 연애에 대해서는 짧게,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는 길게 얘기했다. 그녀는 돈을 많이 버는 일을 찾아보려고 한다고 했다.

같이 밥을 먹고, 카페에서 이야기를 하고, 선릉 옆 산책길을 걷는 동안 내 마음속에선 어떤 생각이 떠올라 맴돌고 있었다. 어쩌면 아주 오랫동안 언제부터인지도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은 생각이.


내가 그 생각을 조심스럽게 꺼내 보여줬을 때 그녀는 밝게 웃었다. 그리고 거절했다. 그런 제안은 단 한 번으로 충분하다. 헛헛했지만, 나는 그녀를 보며 속으로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현명하다는 생각을 했다.
날씬한 그녀의 뒷모습은 선릉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가며 인파 사이로 금방 사라졌다.

세월이 흘러 우리는 이상한 곳에서 만났다. 나는 오래된 아파트의 재개발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재개발 사업은 늘어지고, 분담금은 올라갔다. 온갖 추문과 비난이 들려왔다. 조합장 불신임 투표장에서 뜻밖에 C를 발견했다.

오피스 룩을 입고 예의 짧은 단발을 하고 있는 그녀는 나보다 훨씬 어른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부동산 관련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놀라운 것은 그녀의 어조와 태도였다. 그녀의 말투는 단호해졌고, 온갖 배임횡령으로 고발된 조합장을 쫓아내는 것이 시간 낭비고 바보 같은 짓이라고 했다. 내 기억 속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내가 이 성가신 집을 팔아치울까 생각한다고 하자 그녀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조용히, 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오빠, 오빠는 나중에 나한테 무척 감사하게 될 거야.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아파트를 팔지 마.”

그리고는 다시 바쁜 걸음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강당을 가득 매운 중년의 남자들 사이로 사라졌다.

그게 C와의 진짜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 이후로 27년이라는 세월이 지났고 철없던 나는 그저 시시한 중년이 되었다. 머나먼 독일에 와서 독일 라디오 방송에서 다시 그 노래를 들었을 때, 그녀를 다시 생각했다.


너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아직 어디에선가 살고는 있겠지? 너는 네가 바라던 것을 얻었을까? 너는 아직도 그대로일까? 아직도 책과 글을 좋아할까? 알 수가 없다.


C.jpg


네 삶은 온전히 네 것이지만, 나는 네 삶에 대해 딱 하나의 바램이 있다.

나는 네가 더 이상 문학을 좋아하지도, 날씬하고 예쁘지 않아도 상관없다. 예전의 유머 감각 같은 건 세월 속에 사라졌어도. 그냥 재미없는 중년의 여자가 된 너를 본다 해도 아무렇지도 않을 것이다. 나도 그렇거든. 그런 나에 대해서 전혀 기억하지 못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네가 꿈꿨던 부자가 정말로 되었다면 참 좋겠다. 욕망이 만들어낸 변동성 속에서 영민한 네가 너만의 기회를 잡았기를. 그래서 한때 그토록 갈망하던 것을 얻었기를 빈다. 너를 자유롭게 만들어줄 것이라 믿었던 그것을 한 번은 손에 넣었기를 빈다. 이 허망한 소망 외에 아무것도 너와 나 사이에 남은 것은 없다 해도 별 상관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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