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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권 Feb 11. 2022

재미를 쫓아 떠난 여행의 기록

- 서브컬처 오디세이라는 거창한 주제의 글을 시작하며 

'이젠 재미있는 일만 하고 살아야지' 하는 용감하고 치기 어린 결심을 한 했던 것은 막 서른이 될 무렵, 대학교 교직원을 그만두고 나섰던 길이었다.


미리 이메일로 퇴사를 통보했던 나는, 마지막 출근일 전날 머리를 금발로 염색하고 막혔던 귓불을 다시 뚫어 귀걸이를 했다. 당일날 대학 본관 건물로 출근하여 인수인계를 마치고 학교 교정을 한 바퀴 돌며 그동안 친했거나 서로 싫어했던 동료, 선후배들과 인사를 하고 교문을 나섰다. 


굳이 퇴사도 하기 전에 그런 차림으로 나타난 의도가 좀 유치하긴 한데, 내가 퇴근 후 취미로 배우는 악기를 들고 출근하면 도끼눈으로 쳐다보던 경직되고 보수적인 양반들의 표정을 보려는 악취미가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학부생 신분으로, 대학원생으로, 교직원으로 참 오래도 드나들었던 대학교 정문을 나서며 두 가지 생각을 했다. 하나는 이제 다시는 양복 입고 출근하는 직장에는 다니지 않겠다는 것과 이제 재미있는 일만 하고 살아야지 하는 결심이었다. 당시 나는 결혼할 생각도 없었고, 딱히 출세를 한다거나 큰 재산을 모으고 싶은 목표도 갖지 않아서 가능했던 결심이 아닐까 싶다. 

 재미있게 살고 싶다는 생각은, 근본적으로 나의 삶에 대단한 가치나 근본적인 목적 같은 것이 없다는 확신에 근거한, 일종의 실존적인 제스처였다. 


 그 이후 나는 20년간 게임, 보드게임, 장르소설, 만화 등 서브컬처 관련 업종에 일관되게 종사해왔다. 때로는 창작자로, 때로는 퍼블리셔로, 때로는 관련 프로젝트에 투자를 하는 심사역으로. 

 가끔은 크고 작은 상을 받기도 했고 히트작을 만들기도 했다. 다른 일을 할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닌데 굳이 이 직종에 남은 가장 큰 이유는, 재미있게 살겠다는 당시의 결심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처럼, 나에게도 서브컬처는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재미를 자양분으로 존재하는 분야였으니까. 


그러나 돌이켜보면 재미라는 것은 인생의 기준이 되기에는 지나치게 모호한 개념이다. 당시의 나는 재미라는 게 무엇인지 정말로 알았다고 할 수 없거나, 최소한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개념과는 사뭇 다른 무언가를 재미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우리는 명확히 정의 내리지 않은 개념도 일상에서 아주 잘 사용하곤 한다. 직선의 수학적 정의를 모르는 아이라도 필통에서 꺼낸 귀여운 플라스틱 자와 연필로 직선이 있는 예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재미는 수학적인 개념보다 훨씬 더 모호하며, 개인적인 것이다. 재미는 보편타당하지 않아서, 타인의 재미가 시작되는 점에서 우리의 재미가 끝나기도 한다. 우리의 자유가 종종 그러하듯. 

 그래서 세상에는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재미가 존재하고 애당초 보편적인 것이 되기도 쉽지 않다. 


 또 어떤 일이건 그게 업이 되었을 때 재미만을 주는 일이 있을 리도 없다. 게다가 중요한 것은 어떤 분야건 경험이 쌓이다 보면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재미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글을 시작으로 연재될 서브컬처 오디세이라는 거창한 제목의 글은, 기본적으로 재미라는 무지개를 쫓아 아무 생각 없이 길을 떠나 어느덧 중년이 되어버린 개인의 기록이다. 주로 만화와 보드게임, 장르소설이 주된 주제가 될 것이며, 가능하면  서브컬처 콘텐츠에 대한 이야기뿐 아니라 그것이 창작되고 소비되는 생태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오디세이는 남의 변심한 와이프 덕에 먼 트로이까지 가서 죽을 고생을 한 후 다시 집까지 항해를 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다시 온갖 고생을 하고 부하들도 잃었지만 그래도 결국에는 그를 기다리고 있던 사랑하는 아내에게 돌아갈 수 있었다. 

 아마 이 글도 목적지에 도달할 때쯤은 시작할 때와는 전혀 다른 무엇인가가 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러나 가능하면 이번 여행에서도 오디세이는 그를 기다리고 있는 사랑하는 아내를 만날 수 있기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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