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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권 Jul 09. 2023

우리 집 강아지와 금쪽이, 그리고 오은영선생

"토토가 요즘 더 예뻐지고 똑똑해진 것 같지 않아?"

"응 맞아." 우리 집 세 아이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한다.


우리 가족은 토토를 6년 전에 입양했다. 거리에서 포획된 작은 몰티즈 토토에게는 귀가 하나밖에 없다.

입양당시 4살로 추정됐으니 지금은 10살이 넘은 노견이다.  

가위 같은 날카로운 도구로 귀가 잘린 것은 아마 미용 연습견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 한다. 사람 무릎 위에 잘 올라오는 그야말로 애교 많은 랩독인 토토는 아마도 가장 많이 올라갔던 무릎의 주인에 에게 귀를 잘렸고, 거리에 버려졌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개가 귀찮았다..

 

2~3살 터울로 세 아들 이 생기는 바람에 술 좋아하는 아내가 6년간 수유하느라 강제 금주를 하고 젖 떼고 나니 위엣놈부터 하나씩 사춘기가 온 집구석에서 강아지가 하나 더 생긴다는 게 쉬운 결정이었을 리 없다. 그것도 도심 아파트에서  사는 처지에.

 아이들이 너무나 간절히 바라서 데려온 토토는 수시로 방에 똥오줌을 지렸고, 토토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첫째의 방구석은 수시로 개 오줌과 똥이 굴러다니곤 했다. 밤에 거실 베란다에서 재우려 하면 끊임없이 끙끙대서 식구들의 잠을 깨웠다. 배변 패드를 몇 군데 두고 거기서 볼일을 보면 간식을 주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노력했지만 이 아이는 이미 성견이었다. 배변 매트 위에만  용변을 보게 하려는 우리의 계획은 계속 실패했다.  


 하루 한 번은 꼭 산책을 시키자는 계획이었지만 한국에서 애를 키울 때 우리는 다들 바빴다. 나는 아침에 나가 저녁 10시에 들어올 때도 많다. 아내는 아들 셋을 키우며 살림을 맡아하고 있다. 아이들도 학교가 끝나면 이런저런 학원을 다니고 저녁에 지쳐서 들어온다. 쉬운 일이 아니다.


 수시 장판 위에 말라붙어 있는 오줌과 방구석에 말라붙어 있는 개똥을 몰아서 치우는 일은 지긋지긋했다. 다 치워놓은 집에 새롭게 똥오줌을 지린 꼴을 보면 절로 욕이 나왔다. 최악은 장판 밑에 스며드는 경우였다. 어린 짐승을 욕하거나 때릴 수도 없고 기껏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부르는 것이었다. "야이 개새끼야" 개의 새끼니까 이건 욕이 아닐 거야라고 합리화 했지만 그 말에는 짜증과 증오가 담겨 있었다. 


그랬던 토토가 독일에 와서는 변한 것이다.


여기서는 하루 2번 개를 산책시키는 것이 개를 키우는 사람의 의무다. 

산책을 나가면 보통 일정한 장소에서 볼일을 본다. 산책 나가서 볼일을 보고 오니 집에 볼일을 보지 않는다.

딱히 만날 사람도 많지 않으니 개와 보낼 시간도 많다. 교외의 주택가에 사니 한적하고 산책하기도 좋다.


사고를 치지 않으니 미워할 이유가 없다. 하얗고 작은 몰티즈, 사랑을 주고받는 일에 특화되어 진화한

이 작은 개가 미우면 얼마나 미울 것인가? 애교도 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능도 높아진 것 같다.

산책을 갈 때가 되면 자기 목줄을 물고 다가온다. 사람들이 자신을 데리고 나가려 할 때와 아닐 때를 구분한다. 이리 오라면 오고 가만있으라고 하면 가만있는다.


 한국의 아파트에서 살 때는 그렇지 않았다. 10살이 넘어 노견이 된 토토, 이제 기운이 없어서 가끔은 산책하다가 가만 서있곤 하는 토토는 나이 들어 더 똑똑해진 것이다.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더 대접받고 사랑받기 때문이다.

아침에 아이들이 학교를 가면 내가  산책을 시키고,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돌아가며 산책을 시키고 돌아온다. 행복해지니 똑똑해지고 예뻐졌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가족들에게 시간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서로를 바라보고 신경 쓸 수 있는 시간이. 


2. 금쪽이

 나는 가끔 우리 집 아이들 단톡을 염탐하곤 했다. 혹시 생길지 모르는 단톡을 통한 따돌림은 실제 생활에서 따돌림만큼이나 중요하고 조심해야 할 문제다. 아이들에게는 자유가 있고 프라이버시는 중요한 가치지만, 우리의 자유는 타인의 자유가 시작되는데서 끝나는 법이고 세상에 프라이버시만 중요한 가치인 것도 아니다. 


그러나 사실은, 귀여운 아이들의 일상이 날 것으로 드러나 웃으면서 볼 때가 대부분이다. 아이들 톡방을 통해서,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파는 싸구려 슬러시가 얼마나 사랑받는지, 누가 인기가 있는지 중학교 앞 롯데리아가 얼마나 중요한 핫플레이스인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셋 중 한놈 단톡방에서  어떤 아이에 대한 언급을 발견했고, 나는 깜짝 놀랐다.

오은영 씨의 티브이 프로그램으로 유명해진 금쪽이란 말이 거기서 난무하고 있었다.

"그 자식 왜 그래? 걔도 금쪽이냐?"  "금쪽이 티 내냐?" "자꾸 받아주지 마. 계속 그런다." 등등등 

친구들 사이에서 '금쪽이'로 분류되는 일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일지 짐작이 갔다.


맥락으로 보아, 상황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거나, 경우가 없거나, 집단에 부적응하는 애들에게 금쪽이라는 별명이 붙는 듯했다. 금쪽이란 말은 그 의미와는 달리, 사회적으로는 특정 멤버를 구분하고 따돌리는 아주 좋은 징표가 되었다. 그 말에는 그 아이의 일탈 행위가 단순히 일회적인 것이 아니며, 그 아이의 의지로 고칠 수도 없어서 그 아이는 구제불능이라는 의미로 읽혔다.   아이의 일탈행위가 그 아이의 잘못이 아니라 해서 아이들 사이에서 그걸 감암하여 그 아이를 이해할 성숙함을 기대하긴 힘들다.  금쪽이로 불리는 아이의 부적응 행위가 그 아이의 가정, 또는 심지어 유전적인 문제이기에 벗어날 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금쪽이 관련 프로그램은 아이들에게 어마어마하게 악의적인 말을 선물한 것이다. 


3. 학교와 오은영

최근 한 교사가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오은영 교수에 대한 저격글이 수없이 인용되며 공감을 얻은 일이 있다. 

학교에 다른 학생들에게 피해를 주는 아이 (금쪽이)가 등장해도 사실 교사로서 아무런 일을 할 수 없으며, 티브이에 자주 등장하는 오은영 박사는 아이를 이해하고 감싸줘야 한다고 하지만 현실에선 불가능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섣불리 나섰다가는 교사가 덤터기를 뒤집어써야 하고, 정작 책임감을 느껴야 할 부모들은 교사 탓만 하는

현실이 넌더리 난다는 글이었는데, 충분히 공감할 만한 구석이 많기에  그토록 많은 이들이 공유했으리라

그런데 그 글의 결론은 이렇게 끝났다. "오은영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다."



그 교사의 글은 흔히 인터넷 커뮤니티에 등장하는 사이다 글의 일종으로 익힌다.

주로 그 글들은 우리 사회에 문제를 일으키는 답이 없는 구성원들이 있으며, 물리적 폭력이나 법적이고 소위 금융치료등 직접적인 제제만이 답이라는 게 주된 내용이다. 그게 폭력이나 법을 통한 실제 보복으로 이어질 때 사람들은 열광한다. 바이럴을 타서 이곳저곳에 인용되는 것을 보면, 글을 적은 사람은 뇌내에서 도파민이 배출된다. 그러니 그 맛을 있지 못하고 때로는 거짓 글을 올리기도 한다. 거짓은 때로는 가상의 상대이기도 하고 때로는 나의 해결사례이기도 하다.  

 그런 사이다 글과 짝을 이루는 것이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 답이 없다는 류의 글이다.  그 절망의 근거로서 종종 그들은 매우 구체적인 대상을 특정한다. 그것은 주로 내가 아닌 반대쪽의 집단이거나 '내가 찬성한 바 없는' 잘못된 제도 때문이다. 

 그런 글에서 세상을 말아먹고 있는 악의 축은 적어도 그 글 안에서는 때론  학부모이고, 캣맘이며, 특정 정당이고, 개념 없는 엄마들이며, 나이 먹은 아저씨들이다. 때로는 남자고 여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을 지칭하는 매우 자극적이고 공격적인 용어들은 이 사회에서 화폐처럼 통용이 잘 된다. 엄밀히 말해 이 대상은 매우 모호하다. 학부모가 다 같을 것이며 아이를 데리고 있는 젊은 엄마는 다 맘충인 것인가? 대한민국의 모든 남자는 한남충이고 여자들은 김치녀들인가? 

 사실은 같은 그룹으로 묶을 수도 없는 매우 모호한 대상인 이들에게 유일하고 확실하게 공통된 요소가 있다면 그건 글 쓰는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교사인 나도 자식을 학교에 보내면 학부모겠지만 주로 그런 사이다 글에서 이런 사소한 디테일은 자주 무시된다. 


나는 오은영 교수의 말은 충분히 참고할 만한 말이라고 생각하지만, 그에게 육아에 대한 모든 상황의 설루션을 기대하는 게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전문 가고 존중할 만 하지만, 그와 다른 생각을 가질 수도 있으며, 당장 유튜브만 봐도 다른 훌륭한 전문가들의 조언도 많이 들을 수 있다. 좋은 선생과 문제의 해답을 얻기 위해 수백만 원짜리 상담이 꼭 필요한 건 아니다.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사실 이미 다 알려져 있으며, 여러 가지 이유로 그걸 우리에게 가르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세상에는 많다. 오은영 씨는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기 위해 경쟁하는 수많은 사람 중에 가장 성공적인 사례일 뿐이다. 


문제는 오은영 씨가 아니라 그가 지속적이고 궁극적인 해결책을 바로 그 자리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으로 구도를 만드는 프로그램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오은영은 교육전문가도 아니고, 학교 현장을 모르며 알아야 할 이유도 윤리적 의무도 없다. 그는 그의 입장에서 원칙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 프로그램의 초기 주제였던 (나는 요즘은 그 프로를 보지 못했다.) '아이가 문제가 아니라 환경이, (주로 부모가) 문제다.'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크게 공감하지만, 거기서 주로 처방하는 몇 가지 행동주의 교정전략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는 상당히 의심스럽다. 교육과 교정을 위해서는 환경 자체가 바뀌어야 하는데, 그건 분명히 가능한 일이지만  그게 단기간 내에, 특히 방송 촬영 스케줄에 맞춰서 이뤄지기는 힘들 것이다. 

더더구나 냉정히 말해 어떤 아이들은 실제로 뇌에 기능적인 문제가 있어서 금쪽이가 됐을 수도 있다. 그래서 사이코패스로 자라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단 그 국민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방송에 얼굴을 공개하고 실명으로 나온 이상, 그 프로에서 나온 내용들은 금쪽이들이 성인이 된 이후에도 방송에 나온 내용이 계속 꼬리표처럼 따라다닐 가능성이 높으리라. 그러나 그건 오은영 씨의 책임은 아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는 해결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그걸 결정짓는 것은 우리의 역할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문제의 해결 방법이 명확하기 위해서 우리는 최대한 문제를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교실붕괴는 학부모의 잘못인가? 나는 교사들이 교실붕괴의 원인으로 학생인권조례를 드는 경우도 많이 보았지만, 별로 공감하진 않는다. 육성회비를 못 냈다는 이유로 초등학교 때 친구들 앞에서 뺨을 맞고, 촌지를 가져오지 않아 교사에게서 괴롭힘을 당하는 극단적인 사례들을 경험한 세대에 대는 별로  공감받기 어려운 주장이다. 그리고 교사가 마음껏 체벌을 할 수 있을 때 과연 교실이 올바른 교육의 장이었는지는 상당히 의심스럽다. 


오은영 박사의 프로그램은, 아이들의 문제가 사실은 아이들의 것이 아니라 그 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하는 우리의 문제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거기에서 주어진 시간 내에 제시하는 설루션 만으로 금쪽이들의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는지는 의심스러울 뿐이다. 그 방송에서 나온 설루션이 교실 현장에서 적용하기 어렵다는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수많은 교육환경에서의 설루션을 제시하는 게 오은영 씨의 의무사항인 것도 아니다. 그러니 그의 멱살을 잡겠다는 교사의 말은 매우 부당하게 들린다. 


금쪽이의 문제는 많은 경우 부모의 문제일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게 아버지의 역할인데 아버지를 위한 교육기관은 없다는 버나드 쇼의 일갈은 오늘날에도 해당된다. 그러나 단순히 부모교육의 문제 만도 아니다. 부모는 교육을 받고 싶어도 그럴 시간이 없을지도 모르며, 그것은 근로조건을 지키지 않는 기업의 문제, 그렇게 운영할 길을 열어놓은 법제도의 문제일 수도 있으며, 어떤 산업의 경우는 그래야만 겨우 유지되는 것일 수도 있다. 또는 출퇴근 시간에 2시간씩 써야 하는 문제 때문이기도 할 것이며, 그것은 일터가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기업 입장에서 수도권에 있어야만 하기 때문에, 그걸 해결해 보려는 과거 정권의 노력이 헌법재판소의 경국대전운운하는 미심쩍인 비토로 실패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세상 모든 문제는 다 연결되어 있기에 금쪽이의 문제는 우리 사회 전반의 문제이기도 하다. 거기에 즉물적이고 손쉬운 설루션을 낼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오만일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문제를 확실하게 정의하고 노력하면, 개인의 가정에서는 충분히 문제를 개선할 수 있다는 것이며, 막연히 세상을 한탄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세상의 문제를 특정인이나 몇 가지 파악이 쉬운 변수로 환원해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6년이라는 세월을 길렀지만, 좋은 환경이 생기고 난 이후에야 나는 토토가 저렇게 예쁜 강아지였다는 걸 깨닫고 있다. 인간은 훨씬 더 중요하고 더 사랑스럽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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