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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Dec 28. 2019

"꽃 피고 새 우는 봄날은 찾아왔건만..."

용담호 사진 문화관을 찾아서

2016년 여름 볼로에 기록한 것.


  어떤 것이든 영영 돌아오지 못할 것을 떠나보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그 보내야 할 것이 나고 자라며 온갖 기억을 함께 한 고향 땅이라면 그 아픔을 어찌 다 표현할 수 있을까.

말로 다 하기 힘든 그리움을 평생 마음으로 삼키며 살아가야만 하는 이들이 있다. 눈앞에서 정든 고향이 헐리고 이웃과 영영 작별해야 했던 용담호 수몰민들이 바로 이들이다.      

  지난 8월 방문한 ‘용담호 사진문화관’은 바로 이 수몰민들의 아픔을 담은 공간이다. 마을의 수몰 소식을 전해들은 이철수 작가님이 혼자서 수년간 마을 이곳저곳을 누비며 착공이 결정되고 마을이 헐려 물이 차오를 때까지의 장면을 하나하나 눌러담아둔 곳.


  사실 이번 방문이 처음은 아니었는데, 지난 해 여름 조사가 부족한 채로 전주에서 대기 시간까지 모두 합쳐 장장 7시간이 걸려 도착했더니 오픈 시간을 넘겨 문이 닫혀 있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도록과 방명록을 제외한 내부 전시를 볼 수 없었기에 아쉬운 마음에 다시 한 번 친구와 함께 방문하기로 다시 마음먹은 것이었다. 이번 여정에서는 친구와 함께 전주에서 하루를 묵고 진안을 거쳐 광주로 향하는 3박 4일의 일정을 잡았다.  


  지난여름에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한 시간이 넘게 댐을 따라 걷고 나서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 정도를 걸어야 할 줄 알았는데, 운 좋게도 맘 좋은 주민 분을 만나 차를 얻어 타고 금방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문화관에 도착해 찬찬히 구경하고 있으니 건물 밖 멀리서 작가님이자 관장님이신 이철수 작가님이 반갑게 인사해 주셨다.      


(사진 출처: 진안 문화관광 홈페이지. https://tour.jinan.go.kr/sub_1/?p=2&n=3)


  전시실에서 사진을 다 보고서는 작가님이 커피를 타 주셔서 사무실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작가님은 간혹 차를 타고 가다 들르는 사람들은 봤어도 이렇게 멀리서 버스를 타고 찾아온 젊은 학생들은 처음이라며 신기해 하셨다. 그 분의 사람 좋은 웃음과 함께 다음 작품에 대한 이야기, 이 곳에서의 일상 등에 관한 이야기를 더 나누었다.      


  밖으로 나와 함께 기념사진을 남기고 나니 버스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2층에 점심을 먹을 공간까지 마련해 주셨다. 진안에서 사온 점심거리들을 먹고 쉬고 있으니 하루에 몇 대 없는 버스 시간이 다가와 관장님께서 친절히도 가까운 버스 정류장까지 직접 태워다 주셨다. 관장님의 따뜻한 배려 덕에 지난번보다 훨씬 수월하게, 그리고 마음 따뜻하게 여정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정류장에 내린 우리는 버스 시간이 많이 남은 데다 날씨가 예뻐 강변을 따라 다음 정거장까지만 걸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강변을 따라 걸으며 지난여름을 떠올렸다. 처음으로 문화관을 찾았던 그 때. 비록 문은 잠겨있었지만 밖에 비치된 사진 도록과 방명록에서도 많은 사진과 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었다.      


"물이 차도 안나간다"      

  도록에서 본 수몰 예정지역의 담벼락에 쓰여 있던 문구였다. 이 문구를 보고 한동안 얼마나 멍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뿐만 아니라 이삿날 헤어지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과 무너진 집을 보고 멍하니 서있는 사람들, 그리고 마지막 마늘농사가 망칠까봐 포크레인 기사님께 밭에 들어가지 말아달라는 푯말, 이별잔치, 폐허의 사진 등등 도록에 담긴 수많은 사진들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방명록에 남겨진 글 일부. "꽃 피고 새 우는 봄날은 또다시 찾아왔건만 가슴 한 쪽 시린 응어리는 아직도 서늘합니다."


  사진 만큼이나 더욱 마음을 아프게 했던 건 사진문화관 방명록에 남겨진 글들이었다. '꿈에서 그리던 고향을 다시 보게 되어 너무 감사했다.' '어릴적 뛰놀던 실개천을 다시 보게 될 줄이야.' '그리움에 사무쳐도 다시는 갈 수 없는 내 고향' 등등 실제 수몰민들이 다녀가면서 남긴 글들이 정말 놀라울 정도로 가득했다. 심지어 누군가는 자신을 아는 사람은 누구든 연락을 해달라며 연락처를 남기고 가기까지 했다. 이 사진문화관이 추억을 회상하는 장소가 될 뿐만 아니라 수몰과 함께 뿔뿔이 흩어졌던 인연들까지 이어주는 역할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용담호의 경치를 보며 이런 생각들에 잠겨 한참을 걷다 보니 다음 버스 정류장이 나왔다. 그렇게 진안에서의 여정을 마치고 우리는 광주로 향했다.      



상실의 기억  


  나의 부모님도 각각 댐 건설로 고향을 잃으셨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 차를 타고 댐을 지날 때면 들어온 말이 있었는데, 물 쪽을 가리키며 하시던 '저기가 아빠 고향이야.' 라는 말씀이었다. 어렸을 때는 그 말에 담긴 수많은 감정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었다. 그저 순수한 마음에 '아빠 고향은 물속에 있으니 용왕님 가족이야'하는 말을 듣고 뭔가 대단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만 해볼 뿐이었는데, 최근에서야 어렴풋이나마 그 감정을 짐작해볼 수 있게 되었다.

  아빠는 고향이 수몰된 이후 더이상은 고향다운 고향이 없다는 말씀을 하셨다. 댐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마음 속 고향은 늘 그곳 한 곳 뿐이라시며, 고향이란 게 살던 집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 같이 살던 사람들도 말하는 거라 이사 온 후 살던 집은 아직도 정이 깊이 가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 때에 골목골목 모여 있던 집들과 함께 사라진 것은 비단 사람들뿐만이 아니었다. 언젠가 보여주시던 영상에 나오던 수백 년 전통의 멋진 재래시장과, 장날의 떠들썩함, 그리고 마을의 누군가가 돌아가시면 함께 울던 곡소리, 골목을 누비던 아이들의 웃음소리, 이웃끼리 주고받던 정겨운 덕담들마저 함께 사라진 것이었다. 어머니께도 문득 고향 생각 안 나시냐고 여쭈던 날, 지금도 눈 감으면 그 집의 우물과 우물가의 나무들마저 생생히 기억난다며 그립다고 하시던 대답을 잊을 수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을 잃었지만 아직도 오래된 기억을 담은 동네들은 자꾸만 사라진다. 우리가 진정으로 지키고 보존해야 할 것은, 우리가 기억해야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또 어떤 것이 이들의 아픔을 달랠 수 있을까. 용담호 사진문화관 방명록 한 켠에 쓰인 한 수몰민의 말이 봄마다 서늘하게 마음을 울린다.  


“꽃 피고 새 우는 봄날은 찾아왔건만, 가슴 한 쪽 시린 응어리는 아직도 서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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