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서랍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진 Nov 30. 2016

올바르지 않은 국가의 국민으로 살아가기

헨리 데이빗 소로우- '시민의 불복종'을 읽고

금요일 저녁에는 성수동 인생 공간에서 열린 헨리 데이빗 소로우 '시민의 불복종’ 강독회에 다녀왔다. 좋은 공간에서 좋은 분들과 함께 할 수 있어 기쁜 시간이었다.  

책은 기대하던 만큼 특히 요즘 같은 시기에 읽어보면 좋을 것 같았다. 개인적으로는 요즘 고민하고 있던 문제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기회가 되기도 해서 좋았다. 간디 자서전을 읽었을 때 처음으로 인권 수업을 들어보게 될 만큼 충격이었는데, 이 글은 간디가 불복종 운동을 전개할 때 영향을 받은 글이라고 한다.


일단 특별히 기억에 남는 주옥같은 구절들이 있어 여기에 적는다.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옳고 그름을 실질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다수가 아니라 양심인 그런 정부는 있을 수 없는가?”
(없겠지.....는 여기에 대해서는 뒤에서 이야기하려고 한다)

“한 인간의 의무가 어떤 악을 (비록 그것이 엄청난 악일지라도) 근절하는 데 자신의 몸을 바치는 것이라고는 물론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최소한 그 악과 관계를 끊을 의무가 있으며, 비록 더 이상 그 악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더라도 그 악을 실질적으로 지원하는 일이 없도록 할 의무가 있다. 내가 다른 사업이나 계획에 전념하고 있더라도, 내가 다른 사람의 어깨 위에 올라타고 앉아 그를 괴롭히면서 내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먼저 살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 사람의 어깨에서 내려와야 할 것이다. 그 사람 역시 자신의 계획을 추진할 수 있도록 말이다. ”
(사실 가장 와닿았던 구절 중 하나이다)

“시작이 아무리 작은 듯이 보여도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느다. 왜냐하면 한 번 행해진 옳은 일은 영원히 행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껏해야 거기에 대해 토론만 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라고 하면서.”

“나는 누구에게 강요받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아니다. 나는 내 방식대로 숨을 쉬고 내 방식대로 살아갈 것이다. 누가 더 강한지는 두고 보도록 하자.”

당신의 온몸으로 투표하라. 단지 한 조각의 종이가 아니라 당신의 영향력 정부를 던지라. 소수가 무력한 것은 다수에게 다소곳이 순응하고 있을 때이다. 그때는 이미 소수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소수가 전력을 다해 막을 때 거역할 수 없는 힘을 갖게 된다.”

"불의의 법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 법을 준수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그 법을 개정하려고 노력하면서 개정에 성공할 때까지는 그 법을 준수할 것인가, 아니면 당장이라도 그 법을 어길 것인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지금과 같은 정부 밑에서는 다수를 설득시켜 법을 개정시킬 수 있을 때까지는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만약 저항한다면 치료가 병보다 더 나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치료가 병보다 더 나쁜 것은 정부의 잘못이다. 왜 정부는 좀 더 앞을 내다보고 개혁에 대한 준비를 하지 않는가? 왜 정부는 현명한 소수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가? 왜 정부는 상처도 입기도 전에 야단법석을 떨며 막으려 드는가? 왜 정부는 시민들로 하여금 방심하지 않고 항상 정부의 잘못을 지적하며, 정부가 기대하는 이상으로 시민들이 잘하도록 격려하지 않는가?“ (그러니까.....)

투표는 모두 일종의 도박이다. 장기나 주사위놀이와 같다. 단지 약간의 도덕적 색채를 띠었을 뿐이다. (중략) 정의 편에 투표하는 것도 정의를 위해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정의가 승리하기를 바란다는 당신의 의사를 사람들에게 가볍게 표시하는 것일 뿐이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정의를 운수에 맡기려고 하지 않을 것이며, 정의가 다수의 힘을 통해 실현되기를 바라지도 않을 것이다.” (올 해 다양한 사건으로 우리가 뼈저리게 느끼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브렉시트나, 박근혜나, 트럼프....)

“부자는(불유쾌한 비교를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언제나 그를 부자로 만들어준 기관에게 영합하게 마련이다. 단언하는 바이지만,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덕은 적다. 왜냐하면 돈이 사람과 그의 목적물 사이에 끼어들어 그를 위해 그것들을 획득해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돈을 가지게 된 것도 무슨 큰 덕이 있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돈이 없었더라면 그가 그 대답을 찾기 위해 고심해야 할 많은 문제들을 돈은 유보시켜 준다. ” (하지만 내가 부자가 될 일은 없지..)

“진리의 보다 순수한 원천을 모르는 사람들, 즉 그 냇물을 따라 상류로 더듬어 올라가지 않은 사람들은, 현명하게도 성서와 헌법 옆에 서서 존경과 겸허의 자세로 그곳의 물을 마신다. 그러나 진리의 시냇물이 이 호수 또는 저 연못에 조금씩 흘러들어가는 현장을 목격한 사람은 허리띠를 다시 한 번 졸라매고 그 수원을 향해 순례를 계속한다.”



  쓰면서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되는데 속 시원하기도, 양심을 찌르기도 하는 글이었다. 그리고 사실 요즘 들어 느끼는 가장 괴로운 것 중 하나가 법이나 제도라는 게 굉장히 허점이 많고 폭력적이기까지 하다는 것이었는데 개인적으로 그 부분도 긁어준 느낌이었다.

  계속 등장하는 '양심'이나 '옳은 것'에 있어서는 사실 요즘에도 많이 헷갈리는 부분이다. 이 둘은 너무 주관적인데다 스펙트럼도 굉장히 넓어서, 우리가 살아가는게 결국 그 아주 양 끝과 끝의 사이 어딘가에서 대략적인 합의를 보고 살아가고 있고, 여러 방면에서의 운동이나 제도 개편 등으로 그 합의점이 조금씩 더 많은 이들의 권리를 보장해 주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번 행해진 옳은 일은 영원이 행해지기 때문이다." 라는 구절이 공감되었다. 근데 트럼프 당선이나 박근혜-여성혐오와 관련해서 일어나는 일 따위들을 보면 이게 정말일까 의문은 들지만, 그래도 지금은 그 합의점을 퇴보시키려는 자들의 의견에 반박하고 그들을 비판하는 물결이 전보다 커졌다는 점에서 맞다고 보아도 되려나...)그런데 노예 해방부터 시작해서 페미니즘, 그리고 동물권과 관련해 나오는 논의들까지 보다 보면 정말 '옳은 일'이란게 무엇일 까 싶은 의문이 많이 드는 요즘이다. 어쩌면 궁극적으로 '가장 옳은 것'은 없으며, 본문에도 나오지만 어떤 잣대에 의해서 누구나 굉장히 나쁜 사람일 수가 있는데, 예를 들어 나도 우유나 고기를 먹으면서 죄책감을 느낄 수도 있다는걸 깨달은게 정말 얼마 되지 않은 일인데다 죄책감을 느끼지만 채식주의를 실천하지 못하는 나도 굉장히 올바르지 못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상이 굉장히 특이하게 발현되어 행해지는 곳이 인도라는 곳인 것 같으면서도 종교적 영향으로 여성을 멸시하고 카스트 제도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 보면 동물권과 여성, 시민의 인권의 방향이 우선순위가 정해져 있어 차례대로 확대되어 가는 것은 결코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점점 많은 것의 권리를 보장하게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는 것 또한 요즘은 어렴풋이 느낀다. 채식주의자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동물권이 확대되어 채식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설 자리가 줄어들까봐, 페미니스트들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도 여성 인권이 확대되어 자신들이 편히 누리던 것을 못 누릴 까봐 생기는 무의식적인 공포심으로 그들을 배척하려는 경향이 어느 정도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이렇게 조금씩 범위가 넓혀지더라도 모든 것의 권리를 주장하는 쪽으로 발전을 할 수 있게 될까. 진부하지만 여성이 투표권을 가지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하던 시절이 있었고, 흑인은 마땅히 노예로 거래되어도 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다면 언젠간 인류 다수가 '모기의 생명권'을 진지하게 토론하고 보호하게 되는 날이 올까? 아니면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왜? 그건 인간 본성에 맞지 않기 때문에? 하지만 그걸 어떻게 밝혀낸단 말이며, 지금도 본성에 맞는 것들만 본성에 맞게 규제해 많은 것들을 보호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과학과 도덕적 가치판단은 애초에 분리해서 생각해야 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도덕적 양심의 범위가 확장되는 것에는 한계라는게 명확하게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위에서 언급한 '공포'가 지금까지는 '더 많은 것들의 권리'에 조금씩 자리를 내어주고 있지만, 그것이 승리하게 되어 더이상 넓어지지 못하는 지점이 올까? 마치 트럼프가 승리한 것처럼 말이다. (그것을 혐오의 승리라고 하지만 나는 그 기저에 '두려움'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여기서는 오래 전에 보관해둔 어떤 글이 떠올랐는데, 도움이 조금 될 수 있을 것 같아 첨부한다.

오랜 세월 자연선택으로 우리 유전자에 쌓여온 명령이 그저 선의에만 의지하여 몇 세대 안에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안이한 희망이다. ..... 몇몇 기본 욕구는 제거할 수 없으며, 의미 있고 창조적인 방식으로 충족되지 않는다면 소동을 일으킬 것이다. (또한 많은 소동을 일으켜 왔다.)
우리는 '인간 본성'이 지금과는 다른, 먼 과거의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생겨난 결과라는 점을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외부 환경이 바뀐 현재, 우리의 유전자는 현실을 왜곡되게 보는 원인이 된다. 생리의 한계를 초월하고 테스토스테론이나 에스트로겐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전적으로 지배하지 못하게 해야만 과거의 압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러려면 인내와 선의가 필요하고, 무엇보다도 마음의 작동 원리를 더 철저하게 이해해야 한다. "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몰입의 재발견에서 인용된 부분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의미 있고 창조적인 방식은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가 다른 것에 대해, 낯선 것에 대해 겁을 내거나 동물들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것을 어떤 식으로 어떻게 해결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말일까?

  그리고, 만약 이 글에서 말하는 “옳고 그름을 실질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다수가 아니라 양심인 그런 정부”가 있다면 이 정부는 어떤 것을 '옳다'고 해야 하는 걸까?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생각한 옳은 것은 어디까지였을까? 예를 들어 정부가 '동물을 잔인하게 살육하는게 옳지 않다'고 결정하여 육식의 입지를 대폭 줄인다고 하면 소로우는 어떤 생각을 할까? 아니면 자율 주행 자동차와 트롤리 딜레마 같은 것에 대해서는 어떤 규제를 내릴 것인가? 도덕이란 것이 어느 수준 이상에서는 결국 참으로 정치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방학 동안 더 많이 배우고 알아가야 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