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로서의 전문성. 끊이지 않는 고민.
3년간의 직장 생활을 뒤로하고 학교로 돌아왔다. 회사에서 일하는 내내 학부 시절 배워왔던 디자인과 실무에서 원하는 디자인의 괴리가 커서 혼란스럽고, 기획자 혹은 개발자와 차별되는 디자이너의 역할이 무엇인지 정의 내리기 어려워서 고통스러웠다. 타 분야의 사람들은 디자인을 시각적인 작업에만 한정 짓는다. 실무에서 ‘디자이너’라는 이름은 오히려 나의 능력을 제한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회사에 취직한 졸업 동기들 역시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더라. 몇몇은 디자이너라는 직업이 만족시켜주지 못하는 ‘전문성’을 찾아 로스쿨 혹은 의학전문대학원으로 진로를 틀었다. 씁쓸했다. 디자인은 정말 전문성이 없는 분야인 걸까? 학부 시절 흥미를 느꼈던 디자인은 그저 학교에서의 지식일 뿐, 실무에서는 쓸모없는 걸까? 이러한 질문들은 나를 대학원으로 이끌었다.
디자인을 흔히 ‘문제 해결 과정’이라 정의한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세상에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분야가 어디 있는가? <Design Expertise>에서 저자는 디자인을 구성하는 활동과 단계, 사고방식으로 잘게 나누어 디자인을 정의해본다. 결론적으로는 저자도 디자인이 무어다 명확하게 설명하지는 못했지만, 디자인을 다양한 시각에서 단계별로 쪼개어 바라보니 어렴풋이 디자이너의 전문성이 무엇이구나 하고 다가왔다. 디자이너는 반복을 통해 주어진 문제를 재정의하는 능력 (framing)이 뛰어나다. 주어진 문제를 새로운 프레임으로 바라봄으로써 창의적인 접근을 시도하고, 심지어 문제가 주어지지 않은 상황에서도 사용자로부터 숨겨진 니즈를 찾아내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러나, 실무에서 원하는 디자인은 시각적으로 표현 (representing)하는 것에 국한되어 있다. 학교에서는 스스로 문제를 정의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전달하는 훈련을 하지만, 회사에서는 누군가 (주로 상급자)의 아이디어를 시각적인 방법으로 구현하고 전달해야 한다. 문제를 정의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고 그저 누군가의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일들을 거듭하다 보니 전문성이 쌓인다는 느낌을 갖지 못하는 게 아닐까?
아주 좁은 범위의 디자인만이 디자인으로서 인식되고 있는 현상에 대해 마냥 산업계의 탓을 하기는 힘들다. 디자이너조차 디자인을 정의하기 힘든데 하물며 타 분야의 사람들은 어떻겠는가. 디자인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는 다양한 사례를 만들어서 디자인의 기능과 역할을 입증해야 한다.
교수님께서는 디자인 과정을 ‘별자리 찾기’에 비유하셨다. 밤하늘 수많은 별들 속에 숨어있는 패턴을 발견해내는 별자리 찾기는 창의적이면서도 논리적인 사고를 거치는 디자인과 닮아 있다. 동의한다. 연구도 별자리 찾기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현장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례들로부터 단서를 발견하고 이를 디자인 지식으로 체계화하는 것. 디자인이 학문으로써 자리 잡고, 국내 산업계에서 바라보는 디자인에 대한 인식이 넓어지는데 기여하고 싶다는 당찬 포부를 가지고 대학원에 왔다. 여전히 디자인이 무엇인지 정의하기는 힘들지만 작은 사례들을 만들어가다 보면 언젠가는 영역을 넓힐 수 있지 않을까? 두 개의 별만 이어도 별자리가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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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wson, B. & Dorst, K. (2009) Design Experti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