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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프링 May 19. 2022

여기는 오늘 말야,

한샘이 한샘에게

온 가족이 잠시 외국에 체류하게 되었다.

일 년 체류가 애초의 계획이었으나 코로나의 장기화로 인한 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생기는 바람에 일 년 계획을 백일 남짓한 시간으로 줄이면서 현실적인 문제들과 타협했다. 어찌 됐든 덕분에 나에겐 일상의 공간에서 벗어날 수 있는 103일의 새로운 시공간이 주어졌다. 머무는 곳에서 생활인이 되기엔 좀 애매한 기간이고 여행이라고 생각하면 나름 괜찮은 기간.


내가 주체가 되는 게 아닌 나의 존재를 지우고 누군가를 따라야 하는 일은 나를 쉽게 위축시키곤 한다.

"무슨 일로 이곳에 머무시나요?", "남편 따라왔어요." 이를테면 이런 질문과 대답들.

생각해보니 집을 떠나 있거나 사는 곳을 옮기는 일들의 대부분이 내가 그를 따라가는 형국이었지 그 반대는 없었기에 난 저런 질문에 늘 내가 그를 따라왔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고, 그게 내심 싫었다. 쪼그라드는 것 같아서. 그런 대답을 하는 게 싫은 나로서는 이번 체류의 명분을 만들어야만 했다. 상대를 따라가서 머무는 자가 아닌 내가 주체가 되는 머무름으로 말이다. 모두가 어려운 시기에 외국에 머무는 일이 특권처럼 느껴져 마음이 편치는 않지만 감사히 이 시간들을 알차게 잘 보내고 싶어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이것저것 계획해보느라 그간 마음이 조금은 분주했다.


그 와중에 Q의 아이디어는 나를 정말 설레게 했다.

"네가 나가 있는 동안 우리가 매주 편지를 하나씩 주고받는 건 어때? 너는 거기서, 나는 여기서. 오늘 어땠는지 서로에게 편지를 쓰는 거야. 그리고 그걸 브런치에 연재를 하는 거지. 마감을 만들어서 말이야. 그러면 너는 이번에 외국에 나가는 게 누굴 따라 가는 게 아니라 너만의 출장이 되는 거잖아. 명분이 생기는 거야. 글을 쓰기 위해 출장을 가는 셈이니."

순식간에 여기까지 듣고는 난 그 어떤 망설임도 머뭇거림도 할 필요가 없었다.

"세상에! 너무 좋은 생각이잖아."


그리하여 나는 지금 해외출장 중. 그것도 쓰기 위한 출장을 왔다.

누군가는 비웃을지 몰라도!?;;; 사람은 제 멋에 사는 법이니 '출장'이란 말을 고수하기로 했다.

내가 뉴욕과 유럽의 몇 곳에 머무는 103일 동안 십 년째 같은 책을 읽어오고 있는 친구 Q와 나는 총 28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려고 한다.

미국 시간으로 매주 토요일은 내가 Q에게, 한국 시간으로 수요일은 Q가 나에게.

그간 우리의 함께 글쓰기가 유야무야 되었던 건 마감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핑계를 대어보는데 이젠 마감도 정해놓았으니 끝까지 써나가야만 하는 명분 또한 만들어진 셈이다.


한샘이 한샘에게 '오늘 여긴 말야,' 로 시작하는 글을 서로에게 띄울 것이다. 아마도 각자 있는 곳에서 보낸 하루를, 본 것과 읽은 것, 느낀 것과 생각한 것들을 쓰게 되지 않을까.

아직은 '오늘 여긴 말야' 다음에 어떤 말들을 전하게 될지 조금도 가늠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뉴욕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천천히 곱씹으며 다시 읽은 '마르그리스 뒤라스' 의 <글> 속 문장들에서 용기를 얻는다.



글쓰기는 미지의 존재다. 쓰기 전에는 쓰게 될 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중략)...

쓴다는 것은, 정말 쓰게 된다면 무엇을 쓰게 될지 쓰고 난 이후에만 알 수 있는 것을 알아보는 일이다.

쓰기 전에는 가장 위험한 질문이다. 하지만 가장 흔히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글은 바람처럼 온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고, 잉크이고, 쓰인 것이다.

그리고 다른 무엇과도 다르게, 삶 자체가 아닌 그 무엇과도 다르게 삶을 지나간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글』, p.46~47



이 프로젝트의 이름은 '여기는 오늘 말야,' 입니다. 부제는 '한샘이 한샘에게'이고요.

한국 시간으로 돌아오는 요일에 이곳에  글이 올라올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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