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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프링 May 21. 2022

1.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2022. 05. 22

한샘에게


 어떤 때는 수개월 전부터 아이디어를 짜고, 계획을 세우고 해 봐도 실천이 잘 안 되더니 이번 일은 뭔가 잘 될 조짐이 보이는 것 같지 않아? 우리의 첫 번째 편지가 이렇게 일사천리로 시작되다니. 일주일 전만 해도 이런 계획은 세상에 없었는데 말야. 지난 금요일에 내가 이번에 방문할 곳들을 언니에게 이야기하다 갑자기 이 103일 동안 일주일에 한 편씩 서로에게 편지를 보내자는 말이 언니로부터 먼저 나왔고, 부리나케 나는 브런치를 개설해 작가 신청을 했고, 그러는 사이에 태평양을 건넜고, 우리의 프로젝트를 예고하는 글을 한편 올렸지. 다시 또 며칠이 흘러 우리가 정해놓은 첫 번째 마감이 코앞에 다가와 노트북을 펼치고 이렇게 첫 편지를 시작하고 있는 지금, 이 한 주간의 다이내믹함이 믿기지가 않아.

 

 뉴욕에 도착해서 시차 때문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로 이번 주를 다 보내버렸지만 첫 편지를 무슨 이야기들로 어떻게 채워야 할까 하는 행복한 고민들은 몽롱한 순간에도 계속되었어. 일단 언니가 나의 이번 여행에 ‘출장’이란 명분을 달아주었으니 그에 걸맞게 이건 '(즐거운) "일"이다’ 생각하고 열심히 편지 쓰는 ‘일’을 해야 할 것 같아. 가만히 있어도 나에게 다가오는 것들을 주워 담는 것뿐만 아니라 편지에 쓸 이야깃거리들을 좀 더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면서 말야. 그 말은 이번 여행 동안 익숙함에서 벗어난 생활을 통해 낯선 것들과 만나며 감각과 감정을 새롭게 해 보겠다는 뜻이기도 해. 좀 거창하긴 하지?  우리의 편지가 이번 출장을 더 알차고 풍요롭게 만드는 수단이 되어 성공적인 출장으로 이끌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되네.


 3년 만에 다시 온 뉴욕이야. 나는 어쩌다 이 도시와 이렇게 인연을 맺은 건지. 20대 중반 혼자 잠시 여행 왔던 도시로 남을 수도 있었던 곳에 결혼 후 Y와 함께 와서 몇 년을 살고, 아이도 이곳에서 낳을 줄이야. 그때도 여기에 어떻게 오게 됐냐고 질문하며 남편 따라온 거냐고 묻는 말들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Y를 ‘따라와서 주부로’ 살고 있는 거라고 대답을 하고 나면 그게 사실이면서도 늘 왠지 모르게 마음이 상했었어. 아마도 나를 나로 봐주지 않는 것에 대한 속상함과 나를 독립적인 나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딸린, 그야말로 종속된 존재로 여겨지는 상태에서 거기에 맞는 대답을 한다는 게 내 자존감과 자존심에 상처를 냈던 것 같아. 그래서 나만의 영역을 만들다 보니 뉴욕의 오래된 것들, 사라지는 것들에 관심을 갖게 되고,  책방을 찾아다니게 되고, 운 좋게도 책방에 관한 책을 쓰게 된 걸로 그 마음을 그나마 보상받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뉴욕의 책방> 때문에 언니와의 인연도 시작된 거니 상처 난 자존심의 문제가 결국은 생각지도 못하게 좋은 쪽으로 풀린 거 같다고 생각하게 되네.      


 뉴욕은 인간의 욕망이 계속되는 한 이곳 역시 무한 증식하는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만큼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느껴지는 곳이야. 지금 잠시 머무는 곳은 맨해튼 미드타운에 있는 한 호텔의 47층인데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이미 백 년도 넘은 오래된 건물들과 수십 년 전, 수년 전에 지어진 건물들 사이로 계속해서 길고 가느다란 최신 빌딩들이 계속 세워지고 있는 곳이야. 어제 아침만 해도 맞은편에 지어지고 있던 건물에 유리가 하나도 없었는데 나갔다 오후에 들어오니 그 높은 빌딩 한쪽 면에 유리가 전부 끼워져 있더라고. 반나절 만에 무섭게 커버린 느낌이지.

 이렇게 몇 년에 한 번씩 뉴욕을 다시 찾아올 때마다 북으로, 동으로 도시가 확연히 확장되고 있는 걸 보면서 이 에너지 넘치는 도시에 나는 점점 기가 빨리는 기분이야. 예전에는 이곳의 넘치는 활기가 좋았고, 거기에서 나도 덩달아 힘을 얻었다면 이제는 오히려 이 도시가 나의 기운을 빼앗아가는 건 아닐까 의심하게 돼. 걷지 않으면 안 되는 맨해튼에서는 무엇보다도 큰 보폭으로 걸을 수 있는 튼튼한 두 다리가 필수인데 ‘다른 건 몰라도 걷기엔 자신 있어!’를 외치던 내가 ‘아 정신없어, 왜 이렇게 힘들어졌지?'를 수시로 중얼거리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말이지. 이삼십 때보다 확실히 저하된 내 체력이 일단은 문제겠지만 말야. 더군다나 지난 오 년간 난 수도권마저 떠나 지방에서 조용히 살고 있었으니 이번 한 주 동안 나는 서울에 온 시골쥐처럼 새삼 모든 것에 놀라고 있었어. 인파에 놀라고, 밀리는 자동차에 놀라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계속 치솟고 있는 빌딩에 놀라고, 입맛 싹 떨어지게 만드는 물가에 놀라고, 중요한 행정적인 문제를 어이없게 처리하는데 또 놀라고, 대마초 냄새에 놀라고, 지난번에 왔을 때보다 훨씬 늘어난 것처럼 보이는 노숙자에 놀라 기운이 쭉 빠진 상태라고나 할까. 이번에 머물 집을 구하면서도 엄청나게 오른 렌트비 때문에 비명을 질렀었는데 잠시라도 일자리를 잃으면 여기선 도저히 버틸 수가 없지. 게다가 코로나로 분명 일자리가 줄어들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급속히 늘었을 테니 노숙자가 전보다 늘어난 건 사실일 거야. 이젠 세계 어디든 비슷하겠지만 결국은 돈의 문제로 수렴되어 돈 있는 자만 환대받으며 많은 걸 누릴 수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철저히 밀려나는 도시의 잔인한 면모를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바로 여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


 뉴욕은 나에게 세상은 넓고 다양하다는 걸 보여줬고 행복의 기준은 결코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진심으로 가르쳐 준 곳이기도 해. 게다가 걷기를 즐기는 삶, 책과 책방을 사랑하는 마음, 평범한 일상 속에서 소소한 재미와 행복을 발견하는 법까지도 알려준 내 인생 여정에서 소중한 곳이지. 하지만 여기는 미국의 빛과 그림자가 너무도 극명하게 보이는 데다 시간이 갈수록 도시의 이면에 점점 마음이 쓰이기에 이제는 마냥 애정 어린 눈으로만 이곳을 대할 수 없게 된 것 같아. 이십 대, 그리고 삼십 대 초반까지 이곳은 나에게 두 글자로 의심할 바 없는 ‘애정’이었다면 이제는 ‘애증’이라고 고쳐 말해야 할 거 같아. 한때는 매우 사랑했다고 말했던 것을 지금은 예전만큼 사랑하지 않는다고 고백하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네. 그 대상이 도시여도 말이지. 그래도 이번에 머무는 동안 노래 제목처럼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고민하게 만들 만한 어떤 것을 이곳에서 발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그래서 이번에 뉴욕에서 발견한 새로운 사랑의 씨앗은 바로 이것이었노라고 언니에게 보내는 나의 마지막 편지에 활자로 심어놓고 싶은 그런 마음.

 

 너무도 익숙한 도시에 와서 그런가 내가 뉴욕을 낭비(?)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 하루에 두세 시간 정도 빼고는 그저 방콕을 했단 얘기지. 호텔 침대에 누워서 설렁설렁. 이젠 시차 적응도 잘 안 되는 건지 어젠 와인 반 병 마시고 잤는데도 새벽 한 시 반에 깨서 뒹굴거리다 세 시가 넘은 지금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는 거야. <새벽 세 시 바람 부나요?>라는 읽어보지도 않은 옛날 책 제목이 떠오르네. 이 책도 서간문이라고 알고 있는데 언니는 혹시 읽어봤는지 궁금해.

 어제, 그젠 이슬비가 왔다 그쳤다를 반복했는데 여기는 오늘 말야, 점점 날이 개고 무지 더울 예정. 그곳은 어떨지... 토요일인 오늘 나는 내가 이곳에서 가장 좋아하는 동네를 천천히 걸으며 가장 뉴욕스러운 카페에서 커피를 마실 거야. 아니, 토요일이니 미모사 같은 낮술을 해도 좋을 거 같고. 온 지 며칠이 지나도록 여태 그 동네들 근처도 못 가봤어. 그곳에 가면 마음 줄 수 있는 것들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걸어볼게.


 뉴욕에서 바다 건너 책방 주인에게 편지를 보내는 사람은 나 이전에 헬레인 한프가 있었지. 런던 채링크로스 84번지의 책방으로 책을 주문했던.

 여행 가방을 싸면서 헬레인 한프의 <채링크로스 84번지>와 아직 번역되지 않은 그녀의 <Q’s legacy>라는 얇은 책을 챙겨 넣었어. <Q’s legacy>는 집에서 읽으니 얇은데도 영 진도가 안 나가기에 작가가 평생 글을 쓰며 살았던 이곳에 가지고 와서 읽으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해서 챙겨봤어. Q는 ‘퀼러 카우치’라는 영국의 편집자의 이름에서 따온 Q인데 내가 읽은 부분까지에 따르면 헬레인 한프가 작가가 되기 전 이 사람의 책을 도서관에서 우연히 접하고는 쓰기에 대한 수많은 것들을 배우며 그를 몹시 존경하게 돼. 결국 Q의 책을 있는 대로 읽고 또 읽어 Q가 남긴 책의 내용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거나 다름없는 헬레인 한프는 작가의 길을 걷게 되었고 말야. 언니의 닉네임 콰르텟도 Q이고, 나는 언니 덕분에 지난 10년간 읽기의 세계가 확장되는 경험을 하고 있으니 여기다가도 ‘Q’s legacy'라고 이름 붙여도 된단 말이지.(레거시라는 단어에 부담 느끼지 말길 ^^) 언니는 실제로 바다 건너의 책방 주인이자 Q이기도 하니 1인 2역을 맡아주는 건 어때? 나는 비록 작가는 아니지만 뉴욕에 있는 헬레인 한프역을 해볼 테니.


 “신록이 짙어지는 계절이고 해서 읽으면 마음이 맑아지는 사랑 시집 한 권을 주문합니다. 넋두리 없이 사랑할 줄 아는 시인으로 부탁드려요. 시를 잘 모르는 저이니 당신이 직접 판단했으면 해요. 그냥 아담한 책이면 되겠는데, 이왕이면 바지 주머니에 꽂고 센트럴파크로 산책 나갈 만큼 작은 책이면 더 좋겠고요.” (채링크로스 84번지 1950년 3월 25일 헬레인의 편지 인용, 약간 변경)


 내일 저녁에는 로마로 떠나. 로마라는 도시의 아우라도 아우라지만 언니가 학창 시절을 보낸 곳이라 더 각별히 다가오네.  다음 편지는 그곳에서 할게. 평온한 일상 보내고 있길. 답장 기다릴게.

      


                                                                                                                  2022. 05. 21

                                                                                                            뉴욕에서 한샘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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