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일은 미뤄도 할 말은 미루지 않을 것
사람에게 빠지는 순간은 단 몇 초면 충분하다. 그런 나를 보며 친구들은 혀를 끌끌 차지만 괜찮다. 실망하는 순간도 단 몇 초면 가능하기 때문이다. 순간에 마음을 바치는 나의 고질적인 버릇은 책이나 드라마, 영화를 볼 때도 영향을 미친다. 서점에 가서 아무 책이나 집어 들었는데 처음 읽은 한두 문장이 끝내줄 때,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드라마였는데 첫 1, 2화에 심장이 발 밑으로 쿵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 올 때, 개봉 예정인 영화의 일 분짜리 예고편의 색감이나 배경음악에 눈이 사로잡힐 때, 그런 찰나에 온 마음을 내어준다.
최근에 빠져 있는 드라마가 있다. 최근이라고 하기엔 이미 종영한 지 두 달 정도가 되어서 조금 민망한 감이 없지 않지만 배우 한지민과 정해인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봄밤>이다. 줄거리를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오래된 연인인 정인(한지민)과 기석(김준한) 사이에 지호(정해인)라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면서 벌어지는 어느 봄밤의 이야기다.
며칠 전 퇴근하고 나서 감자칩과 함께 맥주를 마시며 17화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자신의 여자친구가 후배인 지호와 깊은 감정을 주고받는 사이라는 것을 확신한 기석이 지호를 불러낸다. 어두운 밤 공원 벤치에 조용히 앉아 있던 지호가 고개를 들고 기석의 눈을 똑바로 보며 또박또박 말한다.
“날 우습게 봐서요.
날 대하는 선배의 생각과 태도가 잘못됐단 걸 느끼게 하고 싶었어요. 무시할 의도는 아니었다고 했지만 그건 사람을 죽여놓고 죽일 의도는 없었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게 없어요. 그런 사람을 더 이상 이정인이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됐고 그래서 일부러 티 냈어요.”
<봄밤>을 애청하는 이유는 이 드라마가 단순히 사랑만 다루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래된 연인이 ‘만난 지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서로에게 소원해지는 걸 당연하게 보지 않고,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후배를 편견의 눈으로 바라보며 멸시하는 태도를 꼬집고, 자식의 삶에 지나치게 간섭하고 휘두르려는 부모의 태도를 다시 조명한다.
그리고 나는 지호가 자신의 선배에게 잘못을 지적하며 “날 우습게 봐서요.”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다시 한번 이 드라마가 좋아졌다. “나 너 좋아하냐?”라든지 “우리 서로 사랑하게 해주세요!”라는 간지러운 대사를 읊으며 ‘너를 좋아하는 나’에게만 초점을 맞추지 않아서 좋다. ‘너를 좋아하는 나’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는 왠지 모르게 ‘내가 사랑하는 이를 위해 이렇게까지 할 수 있다’며 상대방을 좋아하는 자기 자신과 사랑에 빠진 것 같은 위화감이 든다. 자뻑이 느껴진달까. 한국 로맨스 드라마의 강점이나 한계랄까.
누군가를 좋아하느라 인생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지우는 사람은 영 매력이 없다. 그런 면에서 지호가 자기 자신을 지키는 말을 선배에게 또박또박 내뱉었던 장면이 무척 인상 깊었다. 여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남자 둘이서 싸우는 유치한 치정극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라는 일대일 관계에서 상대의 잘못된 태도를 똑바로 지적하는 장면은 내가 배우고 싶은 모습이기도 했다. 속으로 삼키고만 있지 않고,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괜히 사과하지 않고, 적절한 때와 장소에서 또박또박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갖고 싶다. 그건 분명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태도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