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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솜숨씀 Dec 30. 2019

계획대로 되는 계획은 없지만

작고 새로운 발견의 나날


며칠 전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들고뛰다가 크게 넘어졌다.

‘어? 방금 양 무릎이 깨지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와 ‘이 나이에 넘어지기나 하다니’ 같은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삼삼오오 저들끼리 눈빛을 마주하고 떠드느라 바쁜지 우스꽝스럽게 넘어져 울상을 짓고 있는 여자에게 관심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콘크리트 바닥에 심하게 쓸려 레깅스는 구멍이 났고 아이스크림 케이크 상자는 박살이 났다.

“아악!”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박살 난 아이스크림 상자 사이로 케이크가 어디 망가지진 않았는지 살폈다. 다행히 멀쩡했다. 무릎과 맞바꾼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들고 발을 절뚝이며 현관문을 벌컥 열었더니 부모님과 동생 부부와 조카의 시선을 한번에 받았다. 이제 막 낯을 가리기 시작한 조카가 잔뜩 겁을 먹고는 와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상상한 크리스마스이브는 오랜 연인과 와인 한잔과 함께 로맨틱한 저녁을 보낸 후, 작디작은 조카에게 빨간색 양말을 선물하며 온 가족이 케이크의 초를 후- 하고 불며 남은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연인과 노포에서 숯불에 구운 꼼장어에 소주를 잔뜩 마시고, 술기운에 갈지자로 뛰다 넘어져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망가뜨리고, 한 살도 채 되지 않은 조카를 울렸다. 계획대로 되는 계획은 없다.

  



올해 나는 의도치 않게 바쁜 한 해를 보냈다. 난생처음 인터뷰도 했고(인터뷰이 조력자 역할이었지만 너무 신기하고 재밌었음), 일하는 밀레니엄 여성을 위한 커뮤니티 빌라선샤인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일하는 사람’으로서 발전하고 있음을 느꼈다. 한 달간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일기를 쓰는 챌린지에 도전했고, 뉴스레터를 기획·제작해 보기도 했다. (뉴스레터는 딱 한 번 발행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나의 게으름이여.)


그리고 사랑하는 조카가 태어났다. 퇴근하고 병원으로 달려가 태어난 지 고작 열 시간도 안 된 작고 연약한 아기를 바라보며 “네가 살기 좋은 세상을 물려줄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노력들을 할 거야” 같은 다짐도 했다. 더불어 출간 계약도 했다. 책 만드는 일을 하고 있지만 내 책을 만들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초고를 쓰는 일이 이렇게 어려울 줄 몰랐다. 책은 정말 고군분투다. 쓰는 것도 만드는 것도. 12월에는 아이패드와 블루투스 키보드를 늘 품고 다니며 틈이 날 때마다 글을 쓰고 있다. 잘 써질 때는 많지 않고, 안 써질 때는 많다. 시든 소설이든 에세이든 첫 문장으로 판가름이 난다고 생각하는 나는 이제 첫 문장에 집착하지 않게 되었다. 첫 문장을 잘 쓰려고 하다가 아무것도 못 쓰고 끝이 나버리니까.




계획대로 이루어진 건 하나도 없는데 작지만 새로운 일들이 계속해서 일상을 치고 들어온다. 그리고 나는 알게 되었다. 계획했든 계획하지 않았든 간에 일상 속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일들은 가볍게 시작하되, 최대한 작은 것부터 실천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


이를테면 아침에 딱 10분만 일찍 일어나 따뜻한 보이차를 여유 있게 마시면 10분 늦게 일어나 아무 옷이나 걸쳐 입고 출근했던 어제보다 정돈된 하루를 맞이할 수 있다는 것, 의식적으로 고기보다 채소를 소비한다는 것, 무겁고 귀찮지만 텀블러를 들고 다닌다는 것 등.


이렇게 작은 노력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쪼개서 성실하게 해내는 일이 ‘다이어트하기’, ‘부지런해지기’ 같은 다짐보다 훨씬 인간적이다. 아니,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그렇게 하루를 가볍고 작게 산다.




*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세 달째 번아웃 증후군에 시달리는 중이다.

* 빌라선샤인 최고 추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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