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솜숨씀 Feb 02. 2020

퇴사할 뻔했다가 번아웃 휴가!

자신의 상태를 솔직하게 말하는 것도 중요하다

세 달 전쯤 시작되었다. 이른바 번아웃증후군.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업무 효율은 자꾸 떨어지고 무기력한 상태가 지속되었다. 합정역에서 내려 회사까지 걸어서 5분 정도 걸리는 그 거리는 또 왜 그렇게 멀게만 느껴지는지. 발이 바닥에서 이렇게까지 떨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래도 며칠 지나면 곧 괜찮아질 거야'라고 생각했지만 웬걸 몇 주가 지나도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피곤한 몸과 무력한 마음은 사람이 지쳐 있는 시기를 잘도 간파한다. 바이러스처럼 취약해진 곳곳마다 집요하게 파고들어 긍정적인 기운은 갉아먹고 부정적인 감정 쓰레기만 증식시킨다. 아닌 게 아니라 2019년 5월 세계보건기구에서 번아웃증후군을 직업과 관련한 문제 현상으로 분류한 걸 보면 이 무기력증은 현대인에게만 나타나는 신종 바이러스가 맞긴 맞는 것 같다. 그들은 새벽녘 창백한 얼굴로 출근해 늦은 밤 누렇게 뜬 몸으로 퇴근하는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노린다. 야근과 절망을 먹고 번식하는 현대인의 전염병.


처음에는 멋모르고 그저 퇴사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퇴직금을 계산한 뒤 어떻게 쓸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사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에 대하여 김선배를 붙잡고 쭝얼쭝얼 말했다.


"퇴직금 계산해 봤는데 그걸로 유럽 여행을 갔다올까 봐. 유럽이 너무 부담되면 태국 치앙마이도 좋을 것 같아. 아니면 맥북을 살까? 시간이 지날수록 멋드러지게 색이 바래지는 가죽가방도 갖고 싶긴 해. 나는 책이랑 아이패드랑 키보드를 들고 다녀야 하니까 아무리 물건을 많이 넣어도 가벼운 그런 가방 말이야."

"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학자금부터 갚아야지."

"퇴직금 전부를 학자금으로 갚아 버리면 이 무기력의 다섯 배 정도 되는 허무함이 몰려올 것 같은데 어쩌지."


해외여행 가겠다고 여러 여행지를 비교하고, 비행기표 최저가를 찾아보고, 비싸지 않으면서도 저렴하고 인스타그램에 사진 찍어 올리기에 무난한 숙소를 예약해야 하며, 여행 가서 예쁜 옷 입고 인증샷 올리려면 다이어트 해야 한다고 요란법석을 떨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스트레스다.  


결국 나는 무기력과 우울은 퇴사가 아닌 쇼핑으로 해결하는 게 가장 빠를지도 모른다며 이것저것 사들이기 시작했다. 원가는 천 원도 안 할 에코백을 비싸게 주고 사고, 길거리에서 오래된 천막을 치고 사주를 보는 아주머니에게 다가가 올해 사주 풀이를 보기도 하고, 평소에 절대 입지 않을 화려한 스타일의 미니 원피스를 구입하기도 했다. 여행 간 사람들의 SNS를 뻔질나게 드나들며 어느 나라의 어느 숙소인지 즐겨찾기 해두고 비행기 값을 수시로 검색했다. 더 우울해졌다.




이직 또한 무기력에서 탈출하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해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정리했다. 몇 군데 면접을 보고 합격 통지도 받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어쩔 수 없이 거절 의사를 밝혀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회사를 그만두면 혹은 회사를 옮기면, 내가 상상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번아웃증후군에서 단번에 벗어날 수 있을까? 회사를 그만두고 몇 주는 행복하겠지만 핸드폰 요금과 학자금 대출 이자, 기타 할부금이 뒤를 바짝 쫓아올 것이다. 회사를 이직하면 적응하느라 두세 달 정도 마음의 부침을 겪게 될 것이다.

일부에서는 번아웃증후군을 ‘정신적 탈진’으로 풀이한다. 나의 정신적 탈진에 퇴사나 이직이 적절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단 예감이 들었다.


결국 나는 상급자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평소 한 시간 만에 끝낼 일을 하루 종일 붙잡고 있어도 겨우 끝낼까 말까 할 정도로 일에 집중이 잘 안 된다는 점, 무력하다는 점, 그게 스트레스로 이어져 아토피 질환까지 얻었다는 점 등 그간의 속마음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했다.


"퇴사가 답일까요?"라고 묻는 내 말에 조용히 듣고 있던 상급자는 자신 또한 번아웃증후군에 시달린 적이 있음을, 퇴사해도 딱히 나아지지 않음을 본인의 경험에 비춰 조언을 해주었다. 나만 무기력한 게 아니라는 점, 누구나 그럴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자신만의 해결책을 찾아 보는 것도 방법이라는 점이 생각보다 위로가 되었다.


면담 끝에 잠깐 쉬고 올 수 있도록 휴가를 제안받았다. 회사에 자신의 상태를 솔직하게 말하는 것도 직장인에게 중요한 업무에 해당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이라는 것에도 오르락내리락 하는 컨디션 그래프가 존재해서 일이 늘 재밌을 수도 없고 늘 힘들기만 한 것도 아니다. 비록 지금은 컨디션 그래프의 마이너스 정점을 찍고 있지만 언젠가는 바닥을 찍고 치고올라가는 때가 올 거라고 확신한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잠을 많이 자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운동하기.

즉, 일상의 기본을 충실히 지키는 것이야말로 지금 내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특효약 아닐까.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은 대개 틀리지 않는다.

 

참, 휴가를 받고 쉬면서 또다른 깨달음 하나를 얻게 되었다.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월급쟁이 생활이 나에게 아주 꼭 맞는다는 것!

 

회사에 솔직하게 내 상태를 표현하고 받게 된 '일시 정지'라는 시간을 잘 마무리하고 나면, 출근하는 삶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이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다.


매거진의 이전글 계획대로 되는 계획은 없지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