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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솜숨씀 Apr 26. 2020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강렬한 첫 키스의 맛

너희들, 첫 키스는 무슨 맛인지 아냐. 4월의 어느 날, 수업을 시작하는 종소리가 들리고 담임선생님이 교탁 앞에 서서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쉬는 시간이 끝났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앞뒤로 앉은 친구들과 떠드는 소리로 웅성이던 교실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하던 일을 멈추고 모두가 일제히 담임을 쳐다봤다. 우리는 고작 초등학교 5학년일 뿐이었지만 고백이라든지 연애라든지 혹은 키스 같은 것에 호기심이 가득했고 점심시간에 운동장에서 실컷 뛰어놀고 와서 땀을 잔뜩 흘리는 같은 반 남학생에게 야, 너 냄새 나거든? 하고 앙칼지게 쏘아붙이면서도 창틈으로 불어오는 봄바람과 뒤섞인 땀 냄새에 마음 한구석이 간지럽던 아이들이었다.


나는 첫 키스라는 말에 긴장되어 침을 꼴깍 삼키고 싶었다. 하지만 침묵이 이어지던 교실에서 옆자리 짝꿍에게 그 소리를 들킬까 꾹 참다가 결국 사레에 걸려 켁켁 기침을 해댔다. 선생님은 이런 조용하고도 열정적인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그건 말이지. 그는 한 마디 하고 한 템포 쉬고 왼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우리도 그 왼손의 움직임을 따라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이걸 씹어 보고 나면 알게 될 거야. 담임의 왼손은 비닐봉지를 쥐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초록 이파리들이 들어 있었다.


선생님, 그게 뭔데요? 맨 뒷자리에 앉아 있던 우리 반 제일가는 말썽꾸러기가 외쳤다. 이거? 담임은 비닐봉지를 흔들며 짐짓 위풍당당한 자세로 또 한 템포 쉬었다가 말했다. 얘들아, 이건 라일락 이파리야. 선생님은 말이야. 대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키스를 했는데 그게 꼭 라일락 이파리를 씹는 것 같았거든. 무슨 맛일지 궁금하지 않니? 자, 그럼 손을 드는 친구에게 기회를 주도록 할게. 우리는 서로 눈치만 슬금슬금 보며 머뭇거렸다. 첫 키스를 앞둔 순간에는 누구나 머뭇거리기 마련이었다. 키스를 할까 말까 망설이는 마음과 손을 들까 말까 고민하는 마음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이파리 맛을 보겠다고 손을 든 친구는 결국 아무도 없었고 그런 학생들을 장난스럽게 바라보던 선생님은 이때다 싶었는지 곧바로 수업을 시작했다. 그는 학생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데 능한 선생이었다.




수업이 끝난 후 담임은 궁금한 사람은 알아서 가져가라며 비닐봉지를 교탁 위에 두고 갔다. 그리고 하굣길에 나는 주머니에 넣어뒀던 라일락 이파리를 꺼냈다. 5교시가 끝나고 집에 가기 직전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용기 내어 선생님이 놓고 간 비닐봉지 안에 손을 넣었을 땐 나도 모르게 헐, 하고 탄식을 내뱉었는데. 왜냐하면 이파리가 겨우 두세 장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첫 키스의 맛을 가져간 친구들이 누구누구일지 궁금했다.


주머니에서 나온 이파리는 조금 시든 것도 같았다. 나는 천천히 걸으며 이파리를 만지작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집에서 첫 키스의 맛을 느끼는 건 좀 아닌 것 같단 생각에 교문을 지나기 직전 에라 모르겠다 하며 앞니 두 개로 이파리를 씹었다. 그 순간 화들짝 놀라 한쪽 손에 들고 있던 실내화주머니를 탁 떨어뜨렸다.


입 안에서 순식간에 퍼지는 씁쓰름한 맛. 그리고 나처럼 이파리를 입에 물고 있던 같은 반 남자애들 무리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그 무리 옆을 지나쳐 잽싸게 달리기 시작했다. 난생처음 느껴본 첫 키스의 쓴 맛이었다. 나쁜 짓을 하고 다른 사람한테 들킨 듯 부끄러운 마음이 저만치 먼저 달려갔다. 남자애들이 큰 소리로 뭐라고 놀린 것도 같은데. 잇자국이 깊게 박힌 여러 장의 이파리들이 학교 운동장 사이로 소용돌이 치며 휙 날아갔다.


어디선가 라일락 향이 풍겨온다. 있는 힘껏 달리는  옆으로 부끄럽고 싱그럽고 맑고 장난스러운 웃음소리가 바람과 함께 불어온다. 나한테 봄은 그래서 자꾸 거짓말 같다. 달콤한 척 쌉싸름한 봄이다.


(애들을 속였던 담임선생님의 짜릿한 기분을 이제야 알겠고요 이젠 라일락 이파리에 속아줄 법한 친구가 없고요...)



* 본 발행글의 제목은 호시노 겐 주연의 일본 드라마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의 제목을 따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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