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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솜숨씀 May 25. 2020

준비된 사람만이 기회를 잡는다는 헛소리

그게 아니라 인생은 수습의 과정이거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게으른 주제에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내가 한때 맹신했던 문장이다.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것이 좋지 않나? 흐지부지 끝날 바에야 차라리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한 나는 겁 많고 어설픈 완벽주의자다.


시작하지 않으면 성공도 없지만 당연히 실패도 없으니까. 그러니까 최소한 나 자신에게 실망하는 일도 없을 거라는 소심하고 방어적인 이유가 “나는 완벽주의자라서”라는 핑계 뒤에 숨어 있었다.


나는 성공도 실패도 없는 삶으로 끊임없이 도망치느라 인생을 낭비해 온 걸까?

성공이나 성취로 인한 낯선 행복보다 형편없는 현실에 안주하면서 주변 환경을 원망하는 익숙한 불행을 선택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행복보다 불행이 더 쉽기도 하거니와 잘 해내야 한다는 책임감이 부담스러웠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불필요한 완벽주의에 얽매여 ‘시작하기’를 미루다 보니 게을러진 탓도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에 나는 세상 심각한 얼굴로 친구 두 명에게 “야, 우리 매일 아침 7시에 도서관에서 만날래? 같이 공부하자.”고 제안했던 적이 있다. 고 3이 된다는 압박감에 지키지도 못할 말을 내뱉은 것이다. 친구 김유리는 흔쾌히 수락했고, 변진영은 방학인데 아침 일곱 시에 도서관에 가는 것은 미친 짓이라며 단칼에 거절했다.


그해 겨우내 유리는 하루도 빠짐없이 가장 먼저 도서관에 도착해서는 “아직도 처자고 있냐, 미친년아!” “세수하지 말고 대충 모자 쓰고 빨리 와!”라며 전화로 재촉했다. 반면 나는 내가 일곱 시에 도서관에 도착하지 못한 날에는 “오늘 하루 망쳤다!”며 전날 세워놨던 모든 계획을 포기하고 한껏 짜증내며 도로 침대에 드러눕곤 했다. 한번 세운 계획은 1번부터 마지막 번까지 완벽하게 실행해야 한다는 이상한 완벽주의 논리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7시에 도착하지 못했다면 8시까지 도착하면 될 일이다. 망했다면서 포기하지 말고, 8시에 도착해 계획한 순서대로 차근차근 하면 된다. 어려울 건 하나도 없다. 문제는 이미 한참 늦었다며, 계획대로 이루어진 게 전혀 없다며, 지레 그만두는 나의 마음.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은 버린다. 완벽한 사람도, 완벽한 일도, 완벽한 관계도 없기 때문이다. 그보다 중요한 건 ‘한번 저질러 보겠다’는 작은 결심이다. 일단 저지른 다음에 보완하기를 반복하다 보면 무슨 일이 됐든 간에 어떻게든 앞으로 가게 되어 있다. 중간중간 실수나 오류에 당황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시작하기 전에 최대한 대처 방안을 많이 만드는 게 우선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계속 대비책만 만들다 보면 오히려 시작할 수가 없다.


일단 시작해서, 오류가 생기면 보완하면 된다. 시작하기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허점을 맞닥뜨리고 구체적인 수정보완을 하다 보면 어느새 목표한 일은 아주 디테일한 과정으로 촘촘하게 짜여져 굴러가게 될 것이다.

머릿속에서만 이뤄지는 상상과 실행 없는 계획은 마냥 추상적일 뿐이다. 성공할지 실패할지 잘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 노력한 경험은 다른 일을 시작할 때 언제고 다시 꺼내어 쓸 수 있는 기량이 되어줄 것이다. 그게 바로 연륜과 노하우다. 우리는 그렇게 성장한다.


게다가 감동적인 점은 일단 시작하면 같이 하겠다는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들기도 한다는 것이다. 조언을 해 줄 멘토가 나타나는 행운이 찾아올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들이 모이면 뭐가 뭔지는 모르지만 뭐가 되긴 한다.





준비된 사람만이 기회를 잡는다는 말은 진짜일까? 요즘 세상에 완벽하게 준비해서 시작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완벽하게 준비하기에는 세상이 초 단위로 바뀐다. 준비 시간보다 변화 속도가 훨씬 더 빠른 시대에는 계획을 철저하게 세우는 사람보다 문제 해결에 유연하게 대응할 줄 아는 사람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7시까지 도착하지 못했다면 8시까지 도착한다. 그리고 일단 저지른다. 그럼 어떻게든 수습하게 되어 있다. 저지르고 수습하는 바보 같은 일을 반복하며 나의 작은 야망들을 실현해 나갈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멋진 어른으로 나아가고 싶다.


오늘도 나의 인생을 수습한다. 잘 살기 위해서. 결코 지치지 않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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