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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ggie Nov 20. 2015

관음증 2

나의 시선을 알아채지 못한 사람을 지켜 보는 것은 음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릴 때 어쩌면 관음증적인 쾌락에 중독돼 있었다. 초등학생 때 나는 여자아이들에게 꽤나 인기가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몰라도 교실에 있을 때마다 몇몇의 시선을 느끼곤 했다. 놀 때도, 공부할 때도. 눈으로 응시하지 않고서 누군가 날 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건 어렵지만, 어쩔 때는 그 시선을 확신할 수 있다. 확실히 누군가 날 보고 있다고 느끼면 나는 평소보다 더 멋지고 세련되게 행동하려 했다. 표정을 좀 더 부드럽고 우아하게 짓거나, 목소리를 좀 더 차분하되 쾌활하게 내는 등. 날 보던 여자아이는 내 의도대로 내게서 더 이상 눈을 떼지 못했다. 난 누군가 내게 빠졌다는 사실이 너무 뿌듯했었고, 그 여자아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어떤 우월감을 느끼곤 했었다.


그렇다. 눈으로 보지 않고서도 관음할 수 있다. 자신의 행동을 들키지 않았다고 상대를 안심시킨 채 몰래 의식하는 것도 관음이다. 물론 요즘 뉴스에 나오는 몰래카메라 범죄자들보다는 훨씬 얌전한 관음증이다. 그렇지만 어쨌든 상대를 속이고 상대의 진심을 꿰뚫어 보는 일은 조금 변태 같다. 그 여자아이가 내 마음을 볼 수 있었다면 얼굴을 찌푸리며 나를 징그러워했을지도.


요즘 난 마음까지 아름다워지는 연습을 하고 있다. 내 머리와 가슴에 숨긴 진심이 누가 봐도 순수하고 깨끗했으면 바란다(물론 누구에게나 만족스럽기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생각보다 쉽지 않다. 갈수록 인간으로 존재하는 이상, 내가 생각하는 순수라는 이상향에는 도달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커지고 있다. 관음증을 없애려고 하다 보니 삶이 이상해지는 것 같다. 몸매가 좋거나 얼굴이 예쁜 사람을 힐끗 보는 것도 하면 안 되고, 누군가 나에게 따뜻한 눈빛을 보낼 때 그 시선을 모르는 척 해서도 안 되고. 이건 뭔가 다른 사람의 눈치에 너무 예민한 사람이 돼버리고 있는 것 같다. 내가 보고 싶을 때 보는 게 아닌, 어쨌든 상대가 완벽히 자신을 방어하고 있을 때만 봐야 한다는 의무감. 근데 내 시선이 상대에게 노출된다면 내 진심을 들키거나 어떤 오해를 사기 쉽다. 결국 나는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된다. 그냥 훔쳐 보는 사람이 되기 싫었을 뿐인데, 내 눈은 갈 곳을 잃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뿐이다. 이럴 거였으면 오히려 적당히 훔쳐 보는 게 나았을 거다.


관음은 나쁜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는 본능. 상대가 나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인간에게 굉장한 안도감을 준다. 어쨌든 저 사람은 날 눈치채지 못했고, 적어도 저 사람으로부터 만큼은 난 자유다. 내가 무슨 일을 하든 저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받을 일은 없다. 이런 생각이 반드시 나쁜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다만 한 명 인간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우리 인간은 관음해야 한다. 추잡한 본능을 숨기고서 자신은 언제나 아름답다고 가장하고, 사람들이 내가 쓴 가면에 속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 그게 어쩌면 우리 인간이 느끼는 안도감의 전부다.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타인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욕망을 배 채운다. 모두에게 환영 받을 거라고 장담하지 못하는, 어쩌면 비난받을지도 모르는 깊숙하고 강렬한 욕망. 이 악마를 여전히 들키지 않았다는 사실을, 사람들의 무작위한 시선을 무심한 듯 의식하면서 재차 확인한다. 그래야 오늘도 두려움에 떨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하루를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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