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운박사의 실험실
아주 오래전의 글이다.
끝이 있으면 시작도 있으니,
이 글은 그 시작에 설렘과 다짐을 꾹꾹 눌러쓴 기록이다.
너무 아득해서 마치 남의 이야기 같은.
첫 돌을 놓으며, 그때의 그 마음을 되새겨본다.
나는 걷는다
걷는다는 것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다지는 것이지만,
그 이상으로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꿈꾸는 일이기도 하다.
-베르나르 올리비에
그래, 그 자글대는 태양 아래 1,800킬로미터를 걷고 또 걸으며 다가올 시간을 꿈꾸었듯이, 이 망망대해에 채울 이야기 또한 불민한 나의 편집자 경력을 되짚는 것만이 아닌 앞으로의 또다른 역사를 위한 다짐이리라. 지난 12월 어느 날, 돌아온 탕아에 대한 단속을 하듯 선배는 재입사 한 달도 안 된 ‘신입사원’에게 이 과분한 자리를 슬쩍 내주셨다. ‘제가 어떻게 감히’라며, ‘어린’척 해보았지만 부실한 속사정이야 어쨌든 나도 이제 10년을 내다보는 고참의 자리에 앉아 있으니, 그 자릿값이 새삼 부담스럽고 무서워진다.
구구절절, 천지개벽할 사연 하나 없이 험하다는 출판계에 입문하지 않은 자가 어디 있을까마는, 나의 시작은 참으로 평범하고 싱거웠다. IMF로 꽁꽁 얼어붙어 있던 1999년 1월, 졸업도 하기 전 노동부 추천장 한 장을 들고 김진명, 조정래 작가의 베스트셀러로 유명한 출판사에 발을 담그게 되었다. 20대를 온전히 ‘묻은’ 것도 모자라 새치가 성성한 지금까지 다니고 있다. 극심한 불경기로 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시절, 사실 편집자로서의 포부나 계획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 혼란기를 벗어나 뛰어든 사회 앞에 두려움과 불안으로 위축되고 유난히 춥게 느껴지던 그해 겨울, 해냄출판사에서 언 몸을 녹였고, 회사 갈 생각에 일요일 저녁이 설레던 신통방통한 시기였다.
언니들 틈바구니에 끼어 막내의 특권과 설움을 만끽하는 동안, 안 해본 일이 없어 몇 달 만에 회사 사정을 제일 많이 아는 늙은 막내로 ‘등업’되었다. 전대미문의 향토적인 감수성에 출생연도를 의심받으면서도 이를 알아주고 받아준 선배들의 따듯한 정은 나로 하여금 겉돌지 않고 버티게 만든 구심력이었다. 봉고차를 빌려 혼자 10권짜리 장편소설을 서울 시내 신문사에 배달하던 일, 전화를 하도 많이 받아 웬만한 작가들의 전화번호는 다 외어버린 일 등, 당시 벤처 붐으로 젊은 것들의 엉덩이가 심히 들썩이던 때에, 비교적 안정적으로 출판계에 안착, 편집자의 꿈을 키울 수 있었으니 나는 억세게 운 좋은 사람이다.
편집자로 첫 신고를 한 책은 고 정운영 선생님의 『세기말의 질주』다. 당대의 큰 논객이었던, 그 누구보다 자기 글을 엄격하게 살피는 어른의 책을 첫 책으로 만든다는 생각만으로도 심히 살 떨리는 상황이었다.
정운영 선생님은 내가 어설프게 고쳐놓은 교정지를 꼼꼼히 검사하시는 동안 어린 편집자에게 깍듯이 경어를 쓰시고, 문장 한 끝 의미를 두고 설전을 벌이다가도 잘못을 순순히 인정하시는 진정한 어른이셨다. 현관에서 방안 구석구석까지 벽지가 안 보일 만큼 책이 가득하던 선생님 댁 서재가 기억에 새롭다. 잔뜩 졸아 있는 나에게, ‘뭐가 되고 싶으냐, 무슨 책을 읽고 있느냐’라며 조근 조근 물어봐주시던 분, 이렇듯 점잖고 책을 소중히 여기시던 분과의 만남 덕에 훗날 고약한 필자들과의 혈투에 번번이 패하면서도, 오래도록 필자에 대한 믿음, 저자와 편집자간의 호흡의 단초를 간직할 수 있었다.
내가 쓴 카피가 박힌 책이 너무 애틋해, 언론사 릴리스를 앞두고 ‘잘 가라’고 책과 대화를 나눈 이 4차원 편집자는 급기야 선배들의 장난에 넘어가 기념으로 시루떡을 맞추었는데, 이에 앙심을 품은 나는 훗날 입사 후 첫 책을 만들면 떡을 내는 전통을 회사에 강제로 자리 잡게 만들었다.
‘처음이니’라는 면죄부 아래 세월아 네월아 책을 만들던 호시절이 가고, 나에게도 고통스러운 가시밭길이 시작되었다.
IMF의 냉기가 출판시장에 여전히 남아 있었고, 달뜬 벤처산업과 디지털 붐 속에 종이책은 사양 산업이라는 둥 편집자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우울한 그림자들이 여기저기서 출몰했다. 어느 곳엘 가나 뾰족한 해답도 희망도 쉽게 듣지 못하던 때였지만, 누구보다 책을 좋아하고, 엉덩이를 붙이고 묵묵히 책을 만드는 선배들을 보며, 튕겨나갈 것 같은 내 마음도 자연스럽게 책으로 집중할 수 있었다.
숲을 보기는커녕 한 그루 나무도 그 끝을 헤아리지 못하던 시절이니 책 한 권 한 권 만드는 과정이 그렇게 고역일 수 없었다. 요령이 없던 탓에, 보도자료와 표지문안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할 정도로 부담 그 자체였고, 오십견에 걸릴 만큼 교정을 봐도 매끄러워지지 않은 문장들로 인해 출간 후에도 불안에 떠는 강박증을 일으켰다. 교정지를 싸들고 퇴근하는 나쁜 버릇도 그때 붙어, 지금도 몸의 일부인 양 종이 한 장 들고 가지 않으면 어딘지 허전하다. 마음이 힘드니, 몸도 고되 출근 버스에서 제발 이 버스가 사고가 나버렸으면 하는 헛된 바람을 품기도 여러 번이었지만, 다음엔 이것보다 좀더 잘 해야 한다는 오기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문학물의 비중이 높던 회사가 점차 다양하게 종수를 늘이면서 경영서, 외국어, 건강, 비소설 등 다양한 책을 만들어볼 수 있었다. 그만큼 혼자서 북치고 장구를 치는 과정 중에, 편집자로서 나의 적성을 찾아가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배수아 작가의 『붉은 손 클럽』은 소설이었음에도 편집자의 역할이 그저 ‘선생님들의 옥고’를 받아서 교정만 보는 게 아님을 깨닫게 해준 의미심장한 책이었다. 감각적인 신세대 작가로 이름을 떨치던 작가의 작품이니 무언가 기존 소설 책 문법에서 벗어난 새로운 것이 필요하단 문제의식이 있었다. 이에 노석미 화가의 작품들을 배치하고, 소설에는 관례처럼 붙던 문학평론가들의 평론 대신 《페이퍼》 황경신 편집장의 인터뷰를 실었다. 그리고 좀더 파격적인 작가 사진을 시도했다.
이를 통해 책을 만드는 것이 작가와 편집자만의 단선적인 과정이 아니라 여러 분야 사람들이 어우러지는 복합적인 과정이며, 편집자란 이를 주도하며 책의 가장 적합한 운명을 위해 아이디어라는 갖은양념을 솜씨 좋게 버무려야 한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었다.
백선엽 저자의 『동사구도 모르면서 어떻게 영어를 해?』는 ‘실용서’에 눈을 뜨게 해준 정말 소중한 기회였다. 때마침 어학 전문 출판사들이 급부상하던 시절, 화려하고 기발한 콘셉트와 편집의 책들은 아직 경험이 일천한 나에게 열등감을 심어주었다. 당시 해냄은 소설과 같은 일반 단행본이 주력 상품이었기에, 딱히 이 분야에 대해 누구를 붙들고 배울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위축되고 있을 때 열정과 감각이 남달랐던 저자는 스스로 100퍼센트를 해보임으로써 편집자 역시 자기 안의 100퍼센트를 꺼내 보일 수 있게 리드해 주었다. 개인적으로도 영어를 무척 좋아하기도 했지만, 한발 더 앞에서 신선한 아이디어와 경험치를 내놓는 저자와의 작업은 힘들면서도 새로운 것을 배우는 순수한 즐거움을 선사했다.
당시 어학 책에는 연습용 테이프를 함께 제작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스튜디오 섭외와, 녹음용 대본 작성까지 직접 진행하다가 급기야 테이프 녹음에도 참여해 민망하게도 내 목소리를 남긴 오지랖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 고된 수련기 끝에 내 코를 자극하는 것은 ‘실용적’인 그 무엇이며, 나는 참견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한 ‘사서고생형’ 팔자를 타고난 편집자란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일정이고 뭐고, 욕심에 찰 때까지 악필로 교정지를 시뻘겋게 물들이다 보니 함께 일하는 분들의 원성을 샀지만, 훗날 거침없이 ‘간섭’해 달라는 실용코드의 자기계발서, 경제경영서를 하는 데 한 밑천이 된 게 사실이다. 기획출판이 강조되고, 실용서가 부상하는 등 출판의 지각 변동 속에 점차 PD형 편집자, 멀티플레이어 편집자의 중요성이 대두되었고, 다행히 자연스럽게 그 과정을 통과할 수 있었다.
작년 여름 독일 뮌스터의 한 서점을 찾았을 때 직원에게 내가 이 책을 만들었노라며 자랑스럽게 말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늘 불안하고 주눅들어 있던 초보 편집자의 어깨를 펴고 숨을 고르게 해준 것은 독일의 『클라시커 50시리즈』였다. 단타 아이템들의 속도전에 허덕이고, 시류물에 치일 무렵 클라시커 시리즈는 다시 한 번 편집자로서의 도전의식과 성취감을 심어주었다.
한 권에만 사진이 300컷이 넘는 올칼라의 호화정장, 어마어마한 양의 교양 정보들, 쟁쟁한 선배들이 버티고 있던 회사에서 어리버리한 3년차는 이러한 방대한 시리즈를 맡을 군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인생은 타이밍이라 했던가. 여름방학 성수기를 앞두고 선배들이 베스트셀러 작업에 매달리고 있는 사이, 결국 나 외에는 할사람이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앞으로의 험난한 여정은 생각도 못한 채, 그저 이렇게 멋진 사진이 그득한 책들을 내 손으로 만들어본다는 기쁨에 입이 벌어졌다.
작업의 중심으로 들어가 현실을 깨닫게 된 순간, 앞으로 스무 권 이상 나올 고급 교양물의 운명을 쥐고 있다는 생각에 어찌나 긴장 되던지 입술이 노랗게 짓물러도 모를 지경이었다. 올칼라 책은 처음이라 한 권도 벅찬 판에, 시리즈 런칭을 위해 『영화』 『신화』 『커플』 세 권을 동시에 내야 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일이 시리즈명에서, 콘셉트, 세부 구성, 그리고 각종 카피까지 전체 시리즈를 통일하고 세팅하는 일이었다. 이미 타사의 교양시리즈물이 선점을 하고 있던 시장에서 녹록치 않은 시도였다. 원서의 장점에 충실하되 분량과 정보성 등 단행본으로서 한 권의 완성도를 강조하고 각 분야 유명인사들의 추천사를 받아 교양시리즈물로서의 권위를 부각시켰다. 사진 배치와 구성틀 등 유난히 제약이 많았던 지난한 편집과정도 꿈속을 헤매듯 하던 끝에 마무리가 되었다. 비주얼과 정보성이 강한 『클라시커 시리즈』는 인문서 시장의 약진 속에 순조롭게 첫 발걸음을 내딛었다.
강렬하고 힘든 경험에 노출될수록, 더 단단한 굳은살이 박히듯 이 작업을 통해 교양물, 칼라물, 시리즈물에 대한 두려움을 벗었고, 어줍짢게 이제는 뭐라도 잘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그렇게 7~8개월 간 7권의 클라시커를 만든 뒤 미스 클라시커의 왕관을 내려놓고 나니 이제 다시 초보팀장이라는 가파른 산을 오르고 있었다.
4년 여의 수련기가 다양한 책을 ‘만들어내는’ 과정이었다면, 이제 검증된 필자들의 책을 잘 만들어서 잘 팔고 잘 알리는 만드는 막중한 임무가 주어졌다. 그 시작은 조정래 작가 3부작의 양장본 작업과, 한수산 작가의 『까마귀』였다.
쟁쟁한 경력자 선배들과 일하는 동안 ‘감시의 사각지대’에서 혼자 조물락조물락 스리슬쩍 책을 만들던 나에게 온 회사의 관심과 기대가 쏠린 작업을 한다는 것이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이미 팀장 꼬리표까지 단 4년차 편집자로서, 여전히 부실한 내 속내가 하루아침에 만천하에 들통나버릴까 봐 전전긍긍하는 심정이었다.
대가들의 글이라 까다롭긴 해도 편집 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혼자 일정을 늘이고 줄이던 때와 달리, 마케팅 전략에 따라 영업부, 디자인팀과 전체 스케줄에 맞춰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일을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단순히 책을 만드는 능력에서 이제 관리의 능력, 조율의 능력, 커뮤니케이션의 능력이 절실한 때였다. 각종 홍보물과 카피, 그리고 판매촉진을 위한 아이디어까지, 녹록치 않은 작업 앞에 마음은 무거우면서도 내가 어느덧 베스트셀러 작업을 해본다는 기대감 역시 컸다.
조정래 3부작의 완결판인 『한강』이 출간되고 스테디셀러로서 3부작의 성격을 좀더 강화하기 위한 계기로 양장본 작업이 시작되었다. 편집팀원이 각각 한 작품씩을 나누었지만, 나는 전체 일정과 관리를 맡아야 했고, 대가의 원고에 손을 대는 일인 만큼 조금의 실수도 없도록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마침 김제에 아리랑문학관이 건설되면서 개관기념식과 『아리랑』 프랑스어판 번역자의 방한이 추진되었고, 김제로, 프랑스로, 분당으로 전화통이 불을 ‘지르며’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해 갔다.
한수산 작가의 장편소설 『까마귀』는 일본 내 한국인 징용자들의 기구한 운명과 나가사키 원폭 투하의 참상을 고발한 내용으로 작가의 20여 년 간 땀과 눈물이 담긴 작품이었다.
숨가쁜 편집 과정을 거치자마자 기자간담회를 진행하고 라디오에서 주요 신문까지 광고 집행이 휘몰아쳤다. 각종 판촉물을 만드는 과정에서 머릿속이 텅비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윗사람들은 내 사정을 알기나 하는지, 하는 야속한 마음까지 들 정도였다. 당시 시장상황 등과 맞물려 그다지 기대에 못 미쳤던 이 작품을 만든 과정은 나에게 중요한 다짐을 남겼다. 어느 경우에도 내가 먼저 지쳐선 안 된다는 것이다. 엄마는 아플 권리도 없다는 말처럼, 편집자는 자기 새끼인 책 앞에서 아플 자유도 없는 게 아닌가 싶다. 내가 지치면, 작가도, 마케터도, 디자이너도 자신의 100퍼센트를 할 수가 없다. 결승선을 앞둔 마지막 한 걸음이 안 떼져 남몰래 땅을 쳤던 적이 몇 번이었던가.
상반기에 몰아친 고단한 작업들에 다시 마음이 튕김질을 하려던 찰나, 꿈에도 그리던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을 다녀오게 되었다. 태어나서 유럽이란 곳에 가본 것도 처음이거니와 그렇게 많은 외국인들과 그렇게 많은 책은 처음이었다. 하루를 꼬박 들여도 관 하나를 다 볼 수 없을 만큼 광대한 규모 앞에, 나와 같은 일을 하는 이들이 세계 도처에 이렇게 많다는 사실에 가슴이 뻐근할 정도였고, 그 약발로 생생해진 나는 다시 장도에 올라섰다.
2003년 후반부터 회사 안에서도 기획 비중이 높아지며 체질 개선이 조금씩 이루어졌다. 단순히 아이템을 내는 협의의 기획이 아닌, 저자와 피드백하며 원고를 재구성하고 홍보와 마케팅까지 고민하는 광의의 기획이 시작된 것이다.
주어진 원고를 지시한 방향대로 ‘잘 만들어내는’ 데서, 이제는 원고 전체에 대한 면밀한 디렉팅 능력이 요구되었다. 여기에는 전체의 컨셉, 구성을 장악하는 일은 기본이고, 외부 인력을 컨트롤하여 업무의 효율성을 늘리는 것은 물론, 홍보와 마케팅을 위해 직접 효과적으로 그 어딘가의 문을 두드려야 했다.
그 첫 단추를 공병호 박사와 조미진 상무라는, 남다른 에너지의 소유자들과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크나큰 행운이었다. 놀라운 추진력, 그리고 무서울 만큼 정확하게 실행하는 실천력까지, 책의 성과를 떠나 일하는 사람으로서, 스스로를 책임져야 할 한 개인으로서 프로페셔널리즘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2003년 겨울, 우연히 회사건물에서 마주친 공병호 박사의 소매를 잡아끈 선배들의 열정은, 그후 『주말경쟁력을 높여라』를 필두로 『10년 후』시리즈와 『인생은 경제학이다』까지 공 박사와 함께 작업을 하는 데 튼튼한 다리가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건 등으로 시국이 어수선하던 무렵, 한국 사회에 일침을 놓은 『10년 후, 한국』은 50만부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우며 『10년 후, 세계』『10년 후, 일본』『10년 후, 중국』으로 이어졌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팽배하던 한국사회에 ‘10년 후 신드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다작과 정치색으로 극명하게 엇갈리는 저자에 대한 세평을 떠나, 무엇보다 엄격한 자기관리와 편집자를 신뢰하는 파트너십은 유난히 타이트한 작업 과정 중에도 많은 성취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한동안 식어가던 여성 성공 스토리의 불씨를 당긴 『그녀에게선 바람소리가 난다』는 대학 및 기업체 강연, 각종 언론 홍보 등 그동안 해보지 못한 작업들을 직접 진행하면서 책 만드는 일 이외의 재미를 쏠쏠히 느끼게 해준 계기였다. 또한 ‘시대가 요구하는’ 편집자란 결코 책상 앞에 앉아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했다. 이는 한 해 뒤 조세미 저자의 <세계는 지금 이런 인재를 원한다>를 성공적으로 출간하는 데도 밑거름이 되었다.
특히 조미진 상무와의 작업 과정 중에는, 사람간의 긍정적인 에너지 피드백이 얼마나 놀라운 일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목격했다. 미국 시카고에서 날아온 그는, 시험 기간이라 빈자리가 많은 대학 강연장에서도 최선을 다하며 다음 강연에선 더 잘해보자며 오히려 거의 울기 직전의 담당자를 독려했다. 이처럼 함께 작업하던 모든 이들을 감동시킨 저자를 통해 진정한 프로가 무엇인가, 열정은 어떻게 사람들을 변화시키는가를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던 그 몇 달은 개인적으로도 무척 의미 깊은 시간이었다.
‘지금 이 정도에서’ 타협하고 싶을 때, ‘난 너무 힘드니까’라는 자기 연민이 고개를 들 때, 나보다 열배는 더 바쁜 분들의 정확한 시간 엄수와 긍정적인 자세는 나의 불평을 쑥 들어가게 한 것은 물론, ‘그래 여기서 한 번 더’라는 다짐을 하게 했다.
많은 주목을 받진 못했지만 나의 첫 기획작인 노석미 화가의 그림 에세이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해』는 그림 한 장 한 장을 인쇄소 기장님들과 밤을 새며 감리를 본 진통 끝에 빛을 보았다. 자꾸만 눈이 감기던 나와 달리, 조금도 흔들림 없이 매서운 눈길로 인쇄 상태를 살피던 작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전문성과 통찰, 그리고 인간에 대한 애정이 버무려졌을 때의 놀라운 시너지와, 실용 논픽션의 가능성과 매력을 확인시켜 준 조벽 교수와 최성애 교수. 『나는 대한민국의 교사다』와 『부부 사이에도 리모델링이 필요하다』를 작업하며 제 아무리 미친 듯 변하는 세상이지만, 결국 진실과 알맹이는 통한다는 그 순명한 진리를 되새길 수 있었다. 당대 최고의 전문가들임에도 늘 겸손과 배려를 잃지 않는 모습은 나 역시 마음에 담고 배우고 또 배워야 할 자세이리라.
번역에서 편집까지 꼬박 2년이 걸린 등산백과 『마운티니어링』은 그 방대한 양과 전문성에 질려 눈물 젖은 김밥을 먹게도 했지만 인수봉 바위에서, 몽블랑 어느 산장에서 나를 추켜주며 만든 보람을 톡톡히 느끼게 해주었다. 전문 등반에 관한 원고지 6000매에 육박하는 내용들과 500컷의 그림들, 등산학교에 들어가 전문 등반을 배웠어도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던 그 깊고 넓은 세계는 정광식 선생님을 비롯한 등산학교의 스승들의 힘을 빌려 제 모습으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이 책을 만든다는 핑계로 入山해버린 나는, 방대한 텍스트를 세 번에 걸쳐 역자와 크로스체크하는 지난한 과정 속에도 마치 높은 산을 오르듯 힘들면서도 뿌듯한 순간이었다.
도대체 언제 저 방대한 책을 쓰는 걸까라는 의심을 품게 하는 괴물 같은 집필력의 이한우 기자. <군주열전>의 초기 작업을 진행하며 말이 아닌 손과 발이 앞서는 자가 인생의, 역사의 진정한 승리자가 되지 않을까, 하는 늦된 깨우침을 품게 해주었다.
백만 불짜리 열정과 통찰을 가르쳐준 수많은 저자들을 어찌 다 열거할까. 직,간접적으로 배우고 깨우치고, 새롭게 느끼게 해준 그분들께는 늘 감사해도 모자랄 것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옛말 하나 그른 것 없이, 눈감으면 코 베어갈 대한민국에서 이 10년간 출판 역시 참으로 큰 진폭으로 변하고 있다. 힘이 들 때면, 의미를 잃는 순간이면 어김없이 여기 아닌 저기를 꿈꾸는 원심력이 내 안에서 작동하지만, 그 무엇에 의한 구심력은 또다시 나를 책 만드는 이곳에 오게 만들었다. 심약한 스물넷이 막가파 서른셋이 될 때까지, 몇 번의 튕김질에도 다시 돌아오게 만드는 그곳에는 바로 사람, 사람이 있었다. 물론 그 속에서 내 나름의 어줍짢은 성취에 취하고, 월급이라는 생활인의 의무에 충실했으며, 바람의 유혹을 기꺼이 몸을 내맡긴 적도 있었으나, 사람의 구심력은 그중 가장 강렬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책에 대한 열정과 애정으로 때로 우산이 되고, 방패가 되고, 채찍이 되어주었던 동료들과, 글 속의 구호가 아닌 자기 삶으로 ‘책 한 권 쓸 만한 자의’ 공력을 유감없이 보여준 저자들. 심각한 팔랑귀인 내가 그 좋은 인연들을 만났기에 주화입마 하지 않고 지금 이 시간 10년에 헛되지 않은 목록을 되새길 수 있는 것이리라.
이제는 내가 그 누군가에게 비닐 우산이라도 되어주어야 할 시간, 내가 받은 것의 반만이라도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나는 너무 오래 서 있거나 멈춰 있었던 것일지 모르니, 무식해서 용감했던 10년 전의 그 마음으로 이제 2라운드를 시작해야겠다.
우리는 후남이가 아니라 당당한 출판 편집자임을, 그 자존심과 독기, 열정을 가르쳐준 선배 S. 노트 한 장으로 갈무리 해본 이 10여년 간, 그 중심에 선배가 있어 편집자로서 참으로 행복하고 보람되었다. 남의 손에 든 황금보다 내 손에 든 ‘똥’이 더 귀하다며 흔들리는 후배를 다독여준 큰 울타리 같은 선배 S에게 이 자리를 빌려 가슴 깊이 고마움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