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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상인 Jul 10. 2016

새야 새야, 아기새야

난 수의사가 아니란다.


  어쩜 그렇게 냉정할 수 있었을까. 여학생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간곡한 청을 해왔다. 급하게 뛰어 왔는지 숨을 헐떡이면서 말이다. 그러나 돌아오는 반응은 냉담했다. 난 수의사가 아니란다. 비수같이 날아간 그 말에 어찌할 바 모르고 몇 초간 서 있다가 다른 곳으로 떠났다. 여학생이 떠나간 뒤 나도 모르게 몇 초간 멍하니 가만 서 있게 된다. 다른 학생들이 키득거리는 소리에 정신이 차려지고 다시 하려던 일을 마무리하였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마음이 급했던 와중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그 여학생의 간곡한 청에 다정하게 대꾸를 해 줄 여유가 없었단 말이다. 체육수업 시간에 넘어져 다친 녀석들이 대기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는 중이다. 어떤 녀석은 한쪽 다리 전체에 찰과상을 입었고, 한 녀석은 발목을 접질렸다. 또 한 녀석은 체육복 바지 무릎 쪽이 너덜너덜 해진 걸 보니 무릎을 제대로 찍었나 보다. 아이들은 교실에 최대한 늦게 들어가고 싶어 하지만 택도 없는 소리. 보건실에서의 일차적 목적은 건강한 학교생활 지도에 있겠지만 거기에 따라오는 수많은 목표들 중 하나는 학습으로의 빠른 복귀도 있으므로 얼른 저 녀석들 상처 소독을 해서 교실로 돌려보내야 한단 말이다. 그래서 그랬다. 굳이 핑계를 찾자면 그렇다는 거다.


까치 (2016)


선생님, 도와주세요.

아기새가 둥지에서 추락했는데 죽을 것 같아요.

아직 죽진 않았는데 저렇게 두면 죽을 것 같아요.

어쩌죠? 도와주세요.



난 수의사가 아니란다.


그래도 선생님, 뭐라도 어떻게 해주시면 안 돼요?

너무 불쌍해요.


난 지금 그 아기새를 위해서 나갈 수가 없어.

여기도 거대한 아기새들이 다쳐서 기다리고 있거든.

정 그러면 다른 선생님께 말씀드려 보렴. 난 못해.


  중학교 2학년 여학생의 이 간곡한 멘트를 들어보시라. 이 말에 냉정하게 반응한 나의 멘트도 좀 들어보시란 말이다. 분명 제일 먼저 찾아온 곳이 보건실이었을 것이다. 아픈 사람을 도와주고 치료해 주는 선생님만 믿고 샘이라면 무조건 도와줄 줄 알고 전력으로 뛰어 왔겠지. 돌아오는 서늘한 반응에 실망을 가득 품고 돌아서는 그 표정을, 손쓸 수 없는 상황에 좌절하고 돌아서는 그 표정을 나는 잊지 못했다. 아기새를 어찌해 달라고 말하는 우리 큰 아기새의 슬픈 표정이 퇴근시간까지 자꾸 날 콕콕 찔렀다. 갑자기 난 참 위선적이야 하는 자소적인 생각에 까지 다다르며 평소 나의 언행과 오늘의 행동은 완전히 다르지 않았나 하는 것에 문제의식을 느끼기까지 했다. 생명은 소중하다. 자연과 인간은 하나이다. 자연은 선하다.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남의 고통을 보고 모른 척해서는 안된다.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상황이 온다면 기회로 여기고 그 즉시 도와야 한다. 보건 수업 시간 때나 평소 보건실에서나 아이들에게 자주 강조하던 말들이다. 저 말들을 이제 어찌 주워 담아야 하나 싶다.


   그러니까 내 말은, 아이에게 미안했다는 거다. 둥지에서 추락한 아기새만 외면한 게 아니라 우리 학교 큰 아기새의 저 순수한 슬픔도 돕지를 못 한 것에 나도 모르게 퇴근길 발걸음이 둥지 근처로 향한다. 학교 처마 밑에 손이 닿지 않고 눈에 띄지 않는 군데군데에 둥지가 있다. 가끔 소란스럽게 지저귀는 소리와 창가에 떨어진 새똥을 보면서 우리는 대략 위치를 알 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차마 침착할 수 없는 처참한 주검이 창문 밖 콘솔 시멘트 위에 쓸쓸하게 남겨져 있었다. 어려도 너무 어린 새끼 새를 발견하고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들었다. 휴지로 감쌌지만 손에 닿는 질감이 완벽하게 차단되진 않았다. 새를 감싸드는 순간 아직 집에 안 가고 학교에 남아있던 여학생 두 명이 나에게 인사를 한다. 손에 닿는 촉감에 신경이 곤두선지라 아이들에게 굳은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선생님 뭐 하세요? 아이들에게 내 손에 든 휴지의 정체를 밝히자 나를 따라나선다. 우리는 장미덩굴 화단 아래 적당한 곳을 찾아 구덩을 팠고 흙속에라도 포근히 안기길 바라는 마음으로 아기새를 묻어 주었다. 혹시 들쥐나 고양이가 파해 칠까 봐 커다란 돌도 가져와서 그 위에 올려줬다. 잉, 불쌍해. 아이들은 마치 장례식 조문객처럼 옆에 서서 애도를 한다. 나는 속으로 조용히 읊조린다. 2016년 6월, 보건샘에게 외면당한 우리 큰 아기새가 살리려던 작은 아기새, 여기에 잠들다.


추락


  이런 유사한 상황에서 여학생과 남학생은 참 많이 다르다. 가끔 교정에 매가 날아다닌다. 남자아이들은 매가 날아드는 날을 아주 신나게 여기는데 그건 매가 우리 교정에 머무는 비둘기를 공격하는 생생한 장면을 구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중에 매의 공격에서 살아남아 부상투혼으로 뒤뚱거리는 비둘기가 보이면 남자아이들도 녀석을 절대 외면하지 않는다. 반드시 잡아다가 괴롭히며 가지고 놀곤 한다. 나 원 참. 그러다 가끔 피부에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나 울긋불긋한 팔을 내밀며 오는 아이들이 있어 영문을 물어보면 사실을 실토하게 되고, 나의 입에선 '이 잔인무도한 것들아!'부터 시작해서 일장연설을 시작하곤 한다. 이런 남학생들과는 달리 뭇 여학생들은 불쌍하다며 눈을 떼지 못하고 때로는 그 짐승에게 감정이입을 하며 저 참새는 외로워 보인다는 둥, 엄마를 잃었다는 둥 하며 슬퍼하고, 영문도 모르는 그 참새는 졸지에 우울증에 걸렸거나 엄마를 잃은 고아로 주목을 받으며 뭔가를 꼭 시도해 보려는 아이들의 손에 붙잡혀 어디론가 이동된다. 가령 오늘처럼 '보건샘'에게로 달려간다든지 하는 것 말이다.





  아이들의 순수함이 저렇게 반짝일 때, 속에서 뜨끈한 무언가가 차오를 때가 있다. 아이들의 본성이 저도 모르게 밖으로 튀어나올 때 곁에 선 어른들은 정신이 번쩍 들게 된다. 제아무리 중2병이니 요즘 애들이니 뭐니 해봤자 결국엔 아이들은 아이들일 뿐인데, 부모 된 입장에서나 선생 된 입장에서는 그들에게 크나큰 것을 기대하고 있지는 않았나 가끔 반성하게 된다.


  사실 '요즘 아이들'은 정말 새로운 세대의 아이들이라 생각과 시선을 고쳐먹고 바라보지 않으면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다 삐뚤 하게 보일 수 있다.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 세상에 인터넷이 널리 보급되어 집집마다 컴퓨터가 있었고, 누구나 손에는 휴대폰이 들려 있는 시대에 태어났으며 초등학교 들어가서부터는 스마트폰이 대중화되어 미디어 기반의 정보 습득과 소통이 당연한 세대가 요즘 아이들이다. 그러다 보니 속도감 있는 미디어의 세상과 달리 무언가를 점잖게 기다리는 건 익숙하지 않고, 학생 때는 굳이 좀 모르고 살아도 될 소소한 세상의 치부까지도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그뿐인가 소위 말하는 '19금'의 장벽도 사실은 빛 좋은 개살구 같은 명찰일 뿐 아이들의 손에 쥔 미디어 안에서는 그들만의 소통 창으로 손쉽게 접하며 더 이상 어른들이 눈 가리며 아웅 하는 모습에 순종하지 않는 세대가 이 세대이다. 이러한 아이들이 순수함을 지키며 살아가기엔 사회에서 만들어진 구조가 너무 경쟁적이고 개인주의적이다. 세상에 불필요한 정보도 너무나도 많지만 필터링은 역부족이고, 그를 이용해 아이들의 순수한 심리로 돈을 벌어 보려는 나쁜 어른들도 많이 있어 슬픈 세상 아니겠는가. 아이들은 이렇게 병든 비둘기를 괴롭히며 놀만큼 짓궂기도, 개구지기도 하고 보건샘에게 달려가 도와달라고 할 만큼 따뜻한데 말이다.


   위에서 '19금' 이야기가 나와서 이것은 좀 다른 이야기지만 안 하고 넘어갈 순 없다. 단언컨대, 부모님들은 정말 모른다. 우리 아이의 사생활에서 '성(性)'적 정보가 어디까지 습득되어 있는지. 정확히는 '음란정보'라고 하는 게 맞겠지. 난 평소 아이들과 이야기를 참 많이 하게 된다. 아이들은 대체로 내 앞에선 솔직하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는 편—이라고 나는 믿고 있는 것—이다. 건강증진, 약물 오남용 예방, 흡연예방, 음주예방, 성과 건강, 정신건강 등 이러한 것이 보건 수업 때 다뤄지는 주제인데 보건수업 시간의 절반은 아이들이 나에게 끝없는 질문을 하고 난 거기에 대고 폭풍 잔소리를 동반한 답변을 해주는 시간이지만—그래서 아이들이 보건수업이 잔소리 시간인지 토론 시간인지 헷갈려하는 때도 있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른인 나에게 말하지 않는 이야기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름 솔직하게 한다고 해서 내놓는 발언들 중 충격을 금할 수 없는 주제가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성(性)이다. 성과 건강 단원의 제일 첫 번째 시간엔 성과 관련된 기존의 자기 지식, 개념, 가치관, 느낌이나 감정을 자유롭게 적어서 발표를 하는데 이건 뭐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음란함이라고 보면 된다. 도대체 저런 정보를 어디서 얻게 되었을까 저 단어의 뜻은 무엇일까 고민하며 오히려 내가 공부를 하게 될 정도이니 나 원 참.


  분명 우리 아이는 아닐 거야.


   우리 아이는 여학생이니까. 우리 아이는 성적도 좋고 바른생활을 하는 모범 학생이니까.라고 안심할지 모르겠으나 수업시간에 수위를 초월하는 성 정보를 가진 아이들에 있어서 성별은 물론 모범생과 문제아는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만은 정확하게 밝히고 싶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청소년은 또래문화가 아주 강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던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친구들과의 교류 속에서 많은 것들을 알게 된다. 요즘 아이들은 뒤에서 쉬쉬 하지 않기 때문에 또래끼리 정보를 주고받는 건 아주 손쉬운 일이다. 그 또한 아이들이 아직은 너무나도 어리고 순수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스펀지처럼 싹 흡수해 버리는 것이 문제이다. 그들에겐 모든 것이 새롭지 않은가. 새로움이 반복되면 익숙하고 당연해지며 그것이 사실이라 믿게 되니 문제인 것이다. 이러면 부모는 우리 아이는 어느 정도 일까 싶어 알고 싶어 하겠지만 알게 된다면 충격에서 벗어나기 힘들 테니 섣불리 파 해치려 들지는 말아야 한다. 그러면 아이도 부모도 두 사람 다 상처를 입게 되니 천천히 한 걸음씩 다가가 맞춰주려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이건 안돼!"가 아니라 "음란물은 이렇게 표현하지만, 우리가 사는 인간관계에서 현실은 달라. 남녀 사이란 사실은 이래."라고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말하는 편이 아이들이 더 신뢰하고, 다음 이야기를 꺼내놓기가 편해진다. 어쩌다 우리 아기새들의 순수함을 이야기하다 이 까지 흘러들어 왔는지 골치 아픈 전개이긴 하나 어디까지나 정보만 놓고 이야기한 것이고 행태로 들어가면 아이들의 이놈의 성 문제 때문에 하고 싶은 말로 입이 근질근질 하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고 이쯤에서 접어 보겠다.








아기 새 (2016)



  장미덩굴 아래 아기새를 묻어주고 퇴근했던 다음 날, 아침 댓바람부터 보건실이 북적거렸다.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다가 전봇대랑 부딪힌 아이, 신호등 건너다가 넘어져 상처 난 아이, 어제 매운 떡볶이를 먹고 잤더니 아침에 배탈 난 아이, 학원에서 에어컨을 너무 세게 틀었다며 칭얼대면서 목 아프다고 찾아온 아이까지 뭔 노무 환자가 이렇게 많은지 아침부터 줄을 서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정신없는 아침이 시작되었을 때 보건실 쪽 복도에서부터 재잘재잘 거리며 여학생이 무리 지어 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무리의 발걸음은 다름 아닌 보건실로 향했던 것이다. 3학년 여학생들 다섯 명이 우르르 들어오며 약간은 멋쩍기도 하고 약간은 기대되는 표정으로 나에게 눈빛을 보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세상에나, 이번 주는 무슨 아기새 고난주간인지 새가 다쳤다며 나에게 내미는 것이 아닌가.


선생님, 아기새가 다쳤어요.



   하면서 손에 감싸 쥔 것을 나에게 보여준다. 찹쌀떡처럼 곱고 귀여운 아이들의 손바닥에 포근하게 감싸 안겨 실려온 한 마리의 아기새가 삶은 달걀처럼 덩그러니 등장했다. 나는 기가 찬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내심 그 작은 짐승이 참 귀엽기도 했다. 아이들은 한쪽 날개를 들어 보이며 상처를 가리켰다. 아파 보이긴 하지만 다행히 큰 상처는 아닌 것 같았다.


아니 무슨 여기가 동물병원도 아니고 너네 왜 자꾸 짐승을 데리고 오는 거니? 게다가 다른 애들 줄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너네 지금 새치기한 거야.


  야단부터 쳤더니 기다리는 다른 아이들이 걔(아기 새)부터 해주라며 손사래를 친다. 참나, 노약자 우대보다 더 극진한 짐승 우대 시스템인 것인가. 하하. 나는 아주 짧게 고민했지만 어제의 상황이 다시 재현되는 것이 어쩌면 나에게 아이들의 순수함에 화답할 기회를 준 것인가 싶어 고민을 빠르게 끝냈다. 소독약 스프레이를 뿌리자 아기새가 아파서 부들부들 떠는 것을 보고 옆에 선 여학생들이 모두 방청객처럼 슬픈 함성을 지른다. 간단한 처치를 끝낸 후 얼른 원래 있던 자리에 가져다 놓으라고 했다. 걔도 지엄마가 자기 새끼 어디 갔나 한참 찾고 있을 테니 둥지 근처로 데려다 놓으라고 하자 기쁜 목소리로 힘차게 대답을 하며 또 우르르 빠져나간다. 아차, 정작 우리 아기새들에게 해줘야 할 말을 깜빡한 나는 복도로 쫓아 나가 등 뒤에 대고 소리를 지른다.


너네 갖다 놓고 와서 비누로 손 빡빡 씻어!

두 번 세 번 씻어 알겠니? 꼭 비누로 씻어~!


  깔깔거리며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는 아이들이 저만치 멀어져 간다. 아기새들의 둥지도, 둥지 밖 세상도 위험하고 위태롭다. 그래도 저렇게 순수한 누군가가 애정 어린 마음으로 찹쌀떡 같이 고운 손을 내밀지 않는가. 우리 아기새들의 둥지 밖에도 저런 고운 손길이 많이 있어야 할 텐데. 그래서 우리 같은 어른들은 좀 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책임감을 느끼며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본다. 좀 더 좋은 어른이 되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기 위해 열심히 살아야겠다고도 다짐해 본다. 그리고 우리 아기새들이 조금만 더 힘내서 이 세상을 약간만 더 아름답게 만들어 줬으면 하는 욕심도 난다. 둥지 곁으로 돌려보낸 날개 다친 아기새의 결말이 어찌 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한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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