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의 방 하나를 가지고 싶다는 열망을 가졌던 첫 기억은 아주 어릴 때로 돌아간다. 여덟 살쯤 되었을까. 겨울 초입, 문간에 서서 신발을 신고 나가려던 참에 엄마가 물으셨다.
“남희, 니, 방 하나 내주까?”
방 하나?! 라고? 와우. 환호했다. 심장 터질 뻔. 신나서 팔짝팔짝 뛰는 나를 엄마는 의아하단 눈빛으로 바라보셨다. 알고보니, 날이 추워져 겨울 ‘방한화’를 꺼내 주겠다는 말씀이셨는데, 내 방을 내준다는 줄 알고 혼자 신이 났던 것이다. 집안에 남아있는 방이 없는데, 내줄 방이 있을 리 있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방 하나를 내준다는 말에 나는 대략 3초쯤 행복했다.
‘말도 안 돼. 우리 집에 방이 어디 있다고, 방 하나라고 알아듣냐...?’
그 후에도 줄곧 나는 방이 없었다. 부암동에 내 방 하나를 얻을 때까지.
가난한 집 오 남매의 막내. 내 방이 있을 리 없다. 크지도 않은 방 한 칸에 일곱 식구가 모로 드러누워 자던 밤을 기억한다. 제일 먼저 눈 뜬 아이가 “오늘 신문, 나 먼저~!”라고 외쳐 어린이신문을 제일 먼저 차지하는 일은 제법 공평했다. 만화 강가딘을 누구보다 빨리 보는 건 너무나 중요했으니까.
방이 두 칸이 되고 세 칸이 된다 해도 내 방은 생기지 않았다. 자기만의 방이 막내까지 돌아오려면 부모님 방을 빼고도 방 다섯 칸이 있어야 하는 법. 게다가 집을 넓히고도 우리 집엔 아버지의 서재 겸 한약재를 상비해 둘 방 한 칸이 더 있어야 했으니, 막내에게 나만의 방이 주어질 리 없다. 당연하다 여겼기에 욕심내지도 않았다. 언니들이 결혼하며 떠나간 방에 혼자 남겨진 적은 몇 달 있었다. 세 째 언니가 시집가고 몇 달 못돼 나 역시 결혼을 했으니, 그 방을 내 방이라 여기며 즐긴 날의 기억은 거의 없다. 게다가 그 방엔 내 것이랄 건 딱히 없었다. 언니들이 두고 간, 쓰다 간, 남겨져서 쓸쓸하던 오래되고 낡은 가구 몇 개가 있었을 뿐. 서랍이 잘 닫히지 않는 책상이나, 거울 한쪽에 금이 간 화장대 같은.
결혼을 하고도 나만의 공간이 생길 리는 여전히 없다. 아이 둘이 성별이 다르다 보니, 나보다 먼저 아이들의 방이 생겼다. (결국 함께 살진 못했지만) 4대가 함께 산다고 65평 아파트를 구했어도 내 방은 없었다. 안방이라 부름 직한 부부의 방은 퇴근하고 돌아와 쉬어야 하는 남편 위주로 꾸려졌고, 하나 남는 여분의 방은 자주 들르시는 시부모님을 위해 비워 두어야 했다.
그래도 나는 읽고 썼다. 적어도 읽는 사람이었다. 여느 집이나 그렇듯 주부의 책상은 식탁이다. 딱히 글을 가지고 결과물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가정주부가 당당하게 자기만의 공간을 주장하기는 쉽지 않다. 자기만의 방은커녕 자기만의 책상도 주장하기 어려웠다. 그 책 읽어 뭐 할 건데, 그 글 써서 뭐 할 건데, 라는 질문에 나 스스로도 당당하기 어려웠으니까.
내 집에는 더구나, 방은 고사하고 그 어느 틈새에도 나를 위한, 나에게 맞춤한 곳은 없었다. 비어있는 대부분의 공간을 시부모 비위에 맞춰 꾸렸다. 시부모의 사랑에 그런 식으로 보답하는 미련한 며느리였다. 때때로 시부모는 선을 넘었다. 옹색하나마 내 것 같은 공간이 있으면, 당신들의 취향대로 쉬이 바꿔버렸다. 그것도 사랑이라면 사랑이었다. 돈 없어 원껏 치장 못하고 사는 며느리를 위하는 마음. 단순하고 고즈넉함을 지향하는 나의 공간은 늘 구불구불하고 반짝이는 것들이 차지했다. 친구는 우리 집을 방문한 순간 그런 느낌을 받았다 했다.
아이고, 여기 있다간 김보리 숨 막혀 죽겠네.....
그래서였나. 자연스레 책방을 꿈꾸게 되었다. 집에서 꾸릴 수 없는 ‘자기만의 방’ 욕구의 확장이라고나 할까. 일을 빌미로 나만의 공간을 외부에서라도 꾸려보고 싶었다. 책방을 여는 사람들 중 책으로 돈 벌려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 역시 그랬다. 그저 책과 나로 이루어진 공간을 가지고 싶은 것일 뿐.
서울에서 공간을 찾아보는 일은 엄두가 안 났다. 아이들이 다 커 반쯤 독립했던 차, 한 주를 반으로 나눠 집과 지방을 오가며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었다. 천에 오십,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기준은 대략 그 정도. 거리는 삼백 리, 대략 120km. 집에서 두 시간 안 쪽 거리라 할 수 있다. 춘천, 당진, 서천, 괴산 등을 훑었다. 제주도도 돌아보았다. <천에 오십, 책방 찾아 삼백리>라는 밴드 폴더를 만들어 두고 차곡차곡 사진을 모아 두었다. 딸과 들러 실제적인 문제를 고민한 곳도 두어 곳 있다. 그때는 이 제목으로 책을 낼 궁리까지 해 두었었는데.
생각만 많지 늘 실천이 따르지 않는 편이라 이런저런 구실로 책방을 열고 싶다는 바람을 미루고 있던 차에, 목호 ‘잔잔하게’ 책방 주인 브루스 님(채지형 작가님의 남편님)의 말씀은 뒤통수를 쳤다. 온 데를 다 다니다 이렇게 정착하시니 답답하지 않냐 여쭈니, 다닐 만큼 다 다니고 나니 이제 고요히 한 곳에 머무는 일도 나쁘지 않다고 하셨다. 나는 어떤가. 열이면 열, 엄청난 역마살을 타고 난 사주라고들 했으나, 아이들을 키우고 (불량주부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부와 며느리 노릇을 해내느라 스무 해 넘게 일상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채 살지 않았나. 이제 비로소 타고 난 사주대로 살 만한데, 한 공간에 묶여 산다는 게 과연 행복할까? 만족할 수 있을까?
책방을 하고 싶다는 욕구는 어느덧 사그라졌다. 자기만의 방에 대한 욕구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던지라, 그러던 어느 날 딸의 충동질에 힘입어 자기만의 방을 구했다. 방은 의외의 곳에서 나타났다. 간절하면 방이 나를 부른다. 부암동에 내 방이 있을 줄은 몰랐다. 대단한 공간도 아니다. 나이 오십 넘어 하던 일의 정점에 이른 후 멋지게 물러나며 자기만의 근사한 공간을 꾸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그저, 계획한 대로 천에 오십 수준의 작은 방 한 칸을 구했을 뿐이다.(보증금을 올려 월세를 제법 내리긴 했다) 주부란 직종은 퇴직금도 없고, 그렇다고 뒤꽁무니로 몰래 모아놓은 돈도 하나도 없어서. (쓰기도 바쁘더라)
부암동 작업실은 그렇게 저절로 구해졌다. 그간 꽤 오래 이런저런 공간을 봐왔던 이력이 있어서 명쾌하게 결정할 수 있었다. 딸이나 나나, 공간에 대한 관점은 비슷하다. 좋은 공간이란. 주인을 닮은 공간, 주인의 취향이 드러나는 공간이었으면 좋겠다. 반드시 큰돈을 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돈으로만 해결하면 주인의 취향이 드러나기 어렵다(돈 없는 자의 합리화라고 본다면, 그것도 맞다).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진 게 아닌, 가꿔온 시간이 느껴지는 공간이면 좋겠다. 편의성도 충분히 갖추어야 한다. 도보 거리 내에 자연적, 문화적 환경이 좋았으면 좋겠다. 작가입네, 하는 사람이라면 읽고 쓰기에 집중하기 좋게 꾸려져야 함도 당연하다.
부암동 삼층서가는 그에 꼭 맞다. 반듯한 모양에 화장실과 주방도 방 안에 잘 갖춰져 있다. 창문이 세 개나 있어 볕이 잘 든다. 은행나무와 마주한 창이 있어 고요하다. 정지되어 있어 고요한 창 밖 풍경은 나를 잘 붙잡아준다. 가끔 고개를 빼고 역동적인 도시 풍경을 훔쳐보기도 한다. 눈 온 날의 은행나무는 감격이었다. 주변엔 소풍 갈 만한 곳이 수두룩하다. 세검정, 홍제천, 백사실 계곡, 북한산 둘레길, 윤동주문학관, 청운문학도서관 등을 수시로 누리고 있다. 지하철 역세권이었다면 이 돈 주고 못 구했을 터, 김밥천국만큼 좋은 버스천국인 것도 인정.
딸에게 공간으로 위로받고 싶다고 해, 나를 가장 잘 아는 딸이 공간을 잘 꾸려 주었다. 내가 또 나를 닮은 물건들로 조금씩 채워가고 있다. 책을(술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적당히 나눠가고 있는 중이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 방한화보다 따숩고 아늑한 ‘방 하나’를 갖게 되었다. 최초의 자기만의 방, 보리만의 방 삼층서가. 책과 음료를 본격적으로 팔 요량은 아니니 돈 벌긴 글렀다. 그냥, 같이 익어가는 거지, 뭐. 나는 또 역마살 붙은 여행자이기도 하니, 자주 떠나고 자주 돌아올 것이다. 월세가 아까워 결국 빠르게 돌아올 수밖에. 어쩌면 현실에 나를 묶어두는 것은 집보다는 월세 내는 ‘자기만의 방’일지도. 부암동에 방 나온 게 되게 많던데, 이웃 하실라우? 술친구도 될 수 있다면 더욱 좋겠구려.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 385, 303호 [삼층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