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도 모두 ‘은중과 상연’ 만큼의 서사가 있으니-
키대로 정해지는 출석번호의 경우, 13번과 45번은 친해지기 어려운 번호다. 앞에 두 줄은 대개 모범생 과, 뒤의 두 줄은 대부분 왈가닥 아이들이 열 지어 앉기 쉽다. 13번 보리와 45번 꽈리는 꽤 오래 서먹했다. 한두 번의 에피소드가 있긴 했으나 친해지는 계기가 될만한 일은 아니었다. 우연히 키 큰 꽈리가 키 작은 보리를 내려다보며 “어라? 너 머리에 피나는 거 같아!”라고 말했다. 그럴 리가. 가르마를 타려는데 빗이 없어 다 쓴 줄 알았던 사인펜으로 쓰윽 빗어 내린 게 빨간 줄을 남긴 모양이다. 45번 꽈리는 이때부터 13번 보리를 남다르게 보았다고. 별난 우등생, 그런 느낌이랄까.
보리에게 꽈리는 좋은 첫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빌려 쓴 이어폰 한쪽에서 소리가 나 지 않는데 그리 미안해하지 않는다. 가끔 빌려 간 돈 100원 200원을 잘 까먹는다는 말도 돌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빌려준 돈도 잘 까먹는 친구였다. 사는 곳이 지척이었다. 어느 날 등교 봉고차가 다니기 시작했고, 꽈리와 보리도 그 차를 이용했다. 봉고차 기사님은 재미를 아는 분이셨다. 가끔은 팔달산으로 일부러 차를 돌려 드라이브를 시켜 주기도 했고, 최신 유행가를 때맞춰 틀어주셨다. 기사님이 왁자지껄하니, 차를 타고 학교 가는 내내 수다가 끊이지 않았다. 꽈리와 보리도 말을 자주 섞으며 대 화를 주로 이끌어갔다. 지금으로 치면 꽈리는 이영자 류의 개그를, 보리는 이성미? 유재석? (착각일 수도) 같은 개그를 구사했다고나 할까. 꽈리는 누가 봐도 웃기는 왈 패, 보리는 의외로 웃기는 범생이. 그런 조합이었다.
등교를 같이 하니 하굣길도 자연스레 함께 하게 되었다. 버스를 타면 30분 안에 돌아 올 길을 학교 담벼락을 따라, 수원 화성 자락을 따라 한 시간 이상 걸어서 돌아왔다. 동네 ‘PINK’라는 이름의 레코드 가게 언니는 ‘투투’의 황혜영처럼 예뻤다(투투는 물론 훨씬 후에 데뷔한 그룹이긴 하다). 작은 가게 구석의 언니 자리는 부뚜막처럼 따스했다. 언니만 한 덩치의 아이들 서넛이 궁둥이를 들이밀고 앉으면 언니는 언니 자리를 잘도 내주었다. 남자친구 얘기를 자주 해주었는데, 턱 괴고 귀 기울여 들었던 언니의 낭만적인 남자친구는 지금 돌이켜 보면 건달이 아니었나 싶다.
담벼락을 따라 걸으며 자주 노래를 불렀다. 어둠이 가려주니 큰 목소리를 내도 부끄럽지 않았다. 박선주의 ‘귀로’를 가장 많이 불렀다. 애절함에 애가 닳았다. 남친이 있거나, 그런 (예쁜) (매력적인) 여고생은 없었다. 청춘 영화라 치면 여주인공에게 연애편지 잘 전해주게 생긴 마음도 몸도 수더분한 그런 여학생들. 그중에도 꽈리는 이영 자, 이수지만큼 덩치가 컸다. 나는 버섯 머리, 바가지 머리에 얼굴도 몸도 동그랬다. 우리는 3년 내내 유쾌했다. 철물점 아저씨는 까르르 거리며 지나가는 고 3 우리들에게, “니네 고삼 아니지?” 묻더니 “맞는데요!”하는 대답에 혀를 차셨다. 어찌 인생이 그리 즐겁기만 하냐고 허허허 웃으셨다. 같이 있으니까요. 그렇게 우린 등하교 길 만 큼은 필사적으로 붙어 다녔다.
결정적으로 보리가 꽈리에게 마음을 내준 것은 꽈리의 가정사를 다 알고 나서였을 것이다. 꽈리는 감추지 않았다. 엄청난 비밀일 수도 있는 일을 무심하게 드러냈다. 알고 나니 애틋하지 않을 수 없었다. 꽈리의 부모는 꽈리가 돌도 되기 전에 이혼했다. 그리고 꽈리를 맡아 키우지 않기 위해 싸우고 또 싸웠다 했다. 아비는, 어미를 닮아 못 생겼다며 꽈리를 미워했다. 친할머니 밑에서 오래 자랐고, 가끔 부자인 외할머니 집에 갔다가 어미를 만난 적도 두어 번 있다고 했다. 빵구 난 양말을 신고 온 꽈리를 보곤 ‘불쌍하게 보여서 용돈 받아 가려고 일부러 해진 양말을 신고 온 거냐’며 어미는 아이를 때렸다고 했다.
할머니는 억척스러운 생활인이었고 돈 버는 사이사이 생기는 스트레스와 할아버지와 사 이 안 좋아 생기는 온갖 화를 가끔씩 꽈리에게 퍼부었다고 했다. 꽈리와 국민학교를 같이 다녔던 친구에게 전해 들은 바로는 학교 가자고 부르면 꽈리는 “어, 나 조금만 맞고 갈게!”라고 천연덕스럽게 말했다고 했다. 그 할머니에게도 사랑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할머니가 싸준 도시락을 여니 생선 머리가 들어있더라는 에피소드가 갑자기 떠오른다. 어찌 됐든 도시락 싸주며 키워주신 게 할머니셨고, 제법 정스럽기도 하셨던 분으로 기억된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고모 집에 살게 되었다고 했다. 고모와 고모부는 학비와 생활비를 대주고, 대신 꽈리는 사촌 동생들을 돌보고, 수시로 집안일을 하고, 손님 잦은 고모 집의 갖은 손님맞이를 다 해낸다고 했다. 고모부의 인품이 훌륭하셨던 걸로 기억한다. 그 덕에 그나마 덜 눈치 보고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수원 남문에서 신발 가게를 하는 아비에게 아주 가끔 들러 용돈을 받아 온다고 했다. 아비는 재혼해서 아이 둘과 함께 제법 단란하고 유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꽈리는 흔하게 동생들 얘기를 했다. 그 어떤 원한이나 애증도 없이, 내가 지금껏 그 동생들 이름이 어렴풋이 떠오를 만큼 자 주. 꽈리에게는 생을 나눌 결정적인 찐 혈연이 없어 오히려 모든 혈연을 챙기려 들었다. 꽈리는 죽을 때까지 그랬다. 때론 지나쳤다. 부족해도 나누려 들었다.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이 어찌 저리 사랑이 많을까. 나 역시 그에 지지 않고 사랑을 주려 애썼다. 아니, 애쓸 이유도 없었다. 우리의 애착은 너무나 자연스러웠으니까.
가정사와 관계없이 꽈리는 구김이 없었다. 꽈리와 보리는 원팀이 되어 학교 친구들을 웃기곤 했다. 보리의 대본에 따라 꽈리가 개그를 한다고나 할까. 꽈리는 노래도 춤도 학교 원탑이라 소방차 정원관에 비교되곤 했다. 날날이 친구들과도 이따금 어울렸다. 하교 무렵, 드라이로 머리를 손보고 갈아입을 옷을 챙겨 그 친구들을 따라가는 꽈리를 보면 붙잡고 싶기도 했으나 그러지는 못했다. 그중 어떤 인연은 훗날 꽈리의 발목을 잡기도 했다. 보리는 지금도 그 인연을 저주한다.
보리는 대학생이 되었고, 꽈리는 회사원이 되었다. 한국 내쇼날 플라스틱, 수원 지부 사무소. 보리와 꽈리의 무리는 8명에 달했고, 한두 해 지나며 꽈리를 뺀 모두가 대학 생이 되었다. 보리는 꽈리를 의식해 대학 생활 얘기는 가급적 안 하려 했지만, 부러 저러나 싶게 그 얘기만 줄곧 하려 드는 친구들도 있었다. 꽈리는 풀 죽지 않았다. 보 리는 그런 꽈리가 좋았다. 속마음은 사실 그렇지 않았다고 꽈리가 훗날 털어놓기도 했다. 보리가 다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이었다. 대학 생활은 정말 시시하고 별 볼 일 없다고 말해 주었다. 보리의 대학 생활은 실제로 그랬으니까.
보리는 꽈리와 노는 게 더 좋았다. 무리와 어울려 남문 지동시장에 가서 순대를 사 먹고 집까지 걸어 돌아가는 시간을 좋아했다. 더는 길에서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노래방에 자주 갔다. 가끔 락카페에 가고, 나이트에 가기도 했으나 늘 어색했다. 아줌마 들처럼 노래방이 더 편했다. 바구니에 동전을 스무 개씩 넣어두고, 두 개씩 네 개씩 더 늘려가며 노래를 불렀다. 꽈리는 진추하의 ‘One Summer Night’과 패티김의 ‘사랑을 남기고 간 사람’을 즐겨 불렀고, 전수경의 ‘말해’, 진주의 ‘난 괜찮아’, 보아의 ‘넘버원’을 가수 이상으로 잘 불렀다. ‘애인 있어요’도 애창곡 중 하나였다. ‘그 사람, 나만 알 수 있’는 그런 애인이 진짜로 있었다는 건 한참 후에나 알 수 있었다. 그녀 가 죽고 난 후에야, 뒤늦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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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은중과 상연] 15회 차를 하루에 다 몰아보고 나서, 우리에게도 ‘OO와 OO’ 라 할 만한 서사가 있지 생각하며 끄적여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