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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리 Dec 30. 2023

속절없이 눈이 온다고 그가 말했다


하염없이 눈 멍을 하고 있다

종일 내리면 종일도 바라볼 수 있겠다

좋은 걸 보면 왜 슬픈지 모르겠다

지나친 감수성을 염려하며 남편은 책을 그만 보라 했고

친구는 슬픈 음악을 듣지 말라 했다


꾸역꾸역 한해를 잘 살아냈다

잘한 일이 두어 개 있고

못한 일이 하나 있다

잘한 일을 생각하면 마음에 솜 같은 예쁜 눈이 내리고

못한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눈 녹은 진창 같다


속절없이 눈이 내린다고 그가 말했다


딱히 급히 할 일은 없지만 

눈 때문에 일이 손에 안 잡힌다는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저 눈만 보고 앉아있는 것이 얼마만의 일인가

나도 눈처럼 속절없이 앉아있다


눈이 다 그치면 집에 가서

슬픈 음악 들으며 책이나 읽어야겠다

슬픔과 조우하는 순간엔 마음이 맑아지는 것도 같다

슬픔은 연민과 닿아있다

연민할 때 나는, 내가 사람 같아서 좋다, 슬프고 좋다


내년에도 눈물의 온도만큼만 따숩게 살아야지

사랑이 많은 다정한 사람으로


오늘은 특별히 마침표를 찍고 싶지 않다

가끔은 그럴 때가 있잖아

속절없이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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