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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리 May 30. 2024

네모, 안녕

오래고 친한, 사물과의 이별

물건에 이름 붙이는 일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물건뿐 아니라 사람의 이름 혹은 애칭을 바꿔 부르는 일에도 익숙지 않다. (허나 요즈음 내가 나를 ‘김보리’로 바꿔 부르고 있으니 다소 이율배반적임을 인정하며 글을 시작한다) 예를 들어 유치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시절, 선생님들이 아가야들을

“아들~! 오, 우리 딸~!”

이라 부를 때 그 부자연스러움에 거북했을 정도니 애인에게 애칭을 사용한 일도 없을뿐더러 내 아이들도 ‘아둘~ 따알~’이라 부른 적이 없다. 그저 또박또박 이름대로만 불렀을 뿐.


연애 시절 그렇게나 ‘오빠’ 소리를 듣고 싶어 했던 남편을 ‘내 오빠가 아니니 오빠라 부를 수 없소’와 같은 강직함으로 끝까지 ‘정X씨’라 불렸던 남편은 아직껏 정X씨라 불리고 있으며 나 역시 ‘여보, 당신’  아닌 ‘남희야’로 불리고 있다. 간혹 물건에, 특히나 자동차에 깜찍한 이름을 붙여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좀 간지럽다고나 할까.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러던 내가 올해 초쯤 내 차에 이름을 달아주었다. 네모. 네모. 네모야~!     

각 진 모양에 짤뚱한 몸체는 네모라는 단어와 맞춤했다. 함께 달린 지 12년쯤 되었고, 거리로는 28만 킬로미터 정도 된다. 흔히 하는 비유로 지구 한 바퀴가 4만 킬로미터라니, 일곱 바퀴쯤 달렸다 할 수 있겠지. 고장 없이 잘 달려 주었다. ‘자전거는 못 타도 운전은 잘한다, 맛있는 밥은 못해줘도 아이들 픽업만은 일류다, 오래 달리기는 못해도 종일 운전하기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등등 운전에 관한 자부심이 제법 높은 지라 네모에 대한 나의 애정은 내가 가진 물건 중 가히 최고라 할 것이다.  

    

외관에 비해 내부는 적당히 크고, 뒷좌석을 뒤로 젖히면 큰 짐 싣는 데도 무리가 없어 여행은 물론 장성한 아이들의 자취방 이사에도 부족함이 없다. 네모지고 새빨간 색이 예쁘다며 차에 탈 때마다 신나 하던 어린 아들은 이미 군대도 다녀오고 여자 친구 생일날 미역국도 끓여줄 만큼 컸으니 아이들의 성장 과정의 반쯤을 네모가 함께 했다고 할 수 있다. 딸에게 운전을 가르쳐 주던 날엔 첫 뒤집기, 첫걸음마, 첫 자전거 타기 등등 나를 감동으로 내몰던 아이의 ‘첫’ 성취를 다시금 지켜볼 수 있어 뿌듯했다. 지금은 딸도 능수능란하게 네모를 잘 다루어 둘이 다닐 땐 대부분 딸이 운전하고, 친구들을 태워 강릉 속초로 여행을 다니거나 네모를 몰고 와 고주망태가 된 나를 주워가는 날도 더러 있으니 2대에 걸쳐 충성하는 차라고 추켜세우고 싶다.     

 

화나 눈물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나를 받아준 것도 네모다. 네모 안에서 가장 많이 울지 않았나 싶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뒤척이던 시절, ‘월요방랑’이란 이름을 달고 나만을 위한 길을 오간 적이 있다. 때론 당일치기로, 때론 일박이일로 정한 데 없이 떠돌 때에도 네모 안이라 편안했다. 혼자 여행에 익숙해진 것도 듬직하고 편안한 네모 덕이었다 하면 과장일까.     



뒤늦게 차에 이름을 지어줌은 이별 의식의 하나라 할 수 있겠다. 미주알고주알, 글로 남기는 일도 회자정리를 받아들이는 과정 중 하나다. 빨간 네모에게 빨간 불이 켜진 지는 여러 달 되었다. 둔한 나보다 딸이 먼저 알았다. 12년 간 별 탈 없던 네모가 이제 슬슬 아프다고 표를 낸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늙었냐, 나도 늙었다.     

이별을 준비하란다. 헤어지려니 더 예쁘다. 이름을 주고 싶었다.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폐차 직전의) 똥차에 불과하지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십 년 이상을 함께 한 벗이요 형제가 되기라도 할 것처럼, 나는 빨간색 닛산 큐브를 ‘네모’라 부르기로 했다.


그때부터 사물 의인화가 시작되었다. 차에 타고 내리며 조그맣게 부른다. ‘네모야~ 우쭈쭈쭈, 네모야~’     

‘네모를 타고 안 가본 데가 없지’ 생각하다 보니, 가봤으면 좋았으련만 가보지 못한 곳이 떠오른다. 제주. 네모랑 제주에 가고 싶다. 요즘은 내내 그 생각에 골몰하고 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제주의 자리마다 네모를 세워 놓고 사진에 담고 싶다. 와흘 메밀밭, 세화 앞바다, 성산일출봉, 군산오름, 모슬포, 오조리, 서귀포 검은여, 동복리 해녀 잠수촌. 빨간 네모는 어느 자리에나 맞춤할 것이다.   

   

그림은 선명하게 그려지는데 현실적인 과정을 꼼꼼히 살펴보니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네모의 왕복 배 삯이 삼십만 원을 넘긴다. 내 배 삯과 목포나 완도까지 왕복하는 기름 값을 생각하면 그 역시 적지 않아 교통비만 오십만 원을 넘게 생겼다. 게다가, 네모의 체력이 버텨줄지도 의문이다. (지나친 의인화, 죄송합니다) 더는 비행기 못 탄다는 시어머니 억지로 끌고 장거리 해외여행 가자고 우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흘간 들떠 알아보다 내내 포기하고 사는 중인데, 그래도 여전히 네모 타고 제주를 누비고 싶다. 잔꾀를 부려봐야겠다. 언니, 오빠, 친구 등 지인을 동원해야 하나. 그러자니 또 아쉽다. 이별은 둘만의 일이니까.


오래된 물건 앞에 오래 서있게 된다. 올레를 걷다 오래된 집 앞에 서면 호흡도 느려진다. 시간에 담긴 사람을 생각하고 이야기를 궁금해한다. 가장 오래고 가장 친밀하던 물건과 헤어지려니 지나온 시간, 시간이 품고 있는 추억과의 이별 같아 서글프다. 지나치게 센티해지는 나이 탓을 해본다. 네모, 안녕. 근데, 삼십만까지 어케 한 번 달려보면 안 될까?



빨간 네모 만큼이나 오래된, 빨간 캐리어. 이름은 없다만, 어디든 함께 안 간 곳이 없다. 제주에서 함께 이별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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