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에 가고 싶다.
엄마는 울진군 죽변면 송정에서, 아버지는 화성리 용장에서 나고 자랐다. 아버지는 동자승같이 말간 얼굴의 이름난 천재였고, 마을 명의인 할아버지 밑에서 아이 때부터 곧잘 한약을 지어내 명성이 자자했다. 엄마는 중학교를 겨우 나왔던가. 어린 시절부터 본가를 떠나 삼척의 큰오빠 집에서 더부살이, 식모살이를 하며 못된 올케의 구박 속에 눈물겹게 자랐다. 집안의 어른들이 엮어주어 얼굴도 보지 않고 부부가 되었다. 사는 동안 내내 남처럼 살았다. 미워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언제나 엄마보다 열두 걸음쯤 앞서 걸었다. 엄마는 열두 걸음 뒤에서 아버지를 추앙했다. 때로는 비루했고, 때로는 그 잘난 남편이 우쭐했을 것이다. 그 간격은 아주 가끔 눈물로 터져 나왔다. 곡소리 같은 엄마의 울음을 새겨들었다. 저절로 착한 딸이 되었다.
부모님이 나고 자란 울진이었지만 자라는 동안 울진은 시야 안에 없었다. 설에도, 추석에도, 집안 제사에도 울진에 간 기억이 없다. 책 속에 모든 게 다 있다고 말씀하시던 아버지는 어디에도 오 남매를 데려가지 않았다. 엄마도 아버지도, 고향에 가지 않았다. 엄마에겐 가고 싶어도 못 가는 곳이었고, 아버지에겐 그저 책 밖의 세상에 불과했던 걸까. 적어도, 내 기억 속의 팩트는 그렇게 정리돼 있다.
대학생이 되고 집안도 좀 여유로워져 난생처음 여름휴가를 떠났다. 엄마와 큰언니, 큰 형부와 울진에 가며 왈패 같은 친구 여럿을 함께 몰고 갔다. 외사촌 오빠 부부가 우리를 잘 챙겨주었다. 초대형 아이스박스 안에 온갖 먹거리가 구비돼 있었다. 후정 해수욕장과 봉평 해수욕장에서 나와 내 친구들은 온갖 주책으로 엄마를 웃게 했다. 엄마와 웃고 떠들고 놀아본 기억은 그게 다가 아닌가 싶다. 엄마는 늘 사는 일에 골몰했으니까. 나의 첫 울진의 기억은, 웃옷 앞섶을 적당히 풀어 헤치고 시름없이 환히 웃던, 너무 늦게 고향에 돌아온 울 엄마 얼굴.
엄마와 다시 울진에 갔다. 엄마가 아팠다. 어찌해 볼 도리가 없게 됐을 때 엄마는 울진에 가자고 했다. 일상이 그나마 가장 만만하던 막내가 함께 했다. 엄마의 친정인 송정엔 엄마의 올케언니, 그러니까 내게 외숙모인 팔순 어르신이 굽은 허리로 살림을 살고 계셨다. 오지에 가까운 시골 마을에 어린 동생을 보내며 언니들은 안쓰러워했다. 가는 길엔 겁이 났다.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7번 국도의 풍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외숙모님은 제철의 신선한 재료들로 건강한 식사를 지어주셨다. 밭에서 갓 뽑은 싱싱한 배추를 막된장에 찍어 먹던 맛을 잊을 수 없다. 읍내에 사는 사촌오빠들이 그날 잡힌 가자미회를 사 오기도 했다. 외숙모와 엄마는 시시때때로 서로의 등을 훑었다. 고단한 시절을 헤쳐 온 동지애였을까. 한 사람은 몸이 삭았고, 한 사람은 몸이 접히도록 늙었다. 자주 가슴이 싸했다.
해가 좋은 날은, 마당 평상에 올라앉아 오래도록 엄마와 볕을 나눴다. 읍내 미용사를 모셔 와 머리를 잘라 드리기도 했다. 평상 위에 신문지를 넓게 깔고, 낮은 의자에 엄마를 앉혔다. 샤삭샤삭. 햇살이 가위 날에 닿아 이따금 반짝이고 엄마의 머리카락이 고요히 바닥에 내려앉았다. 작고 굽은 모습으로 고향 집 마당에서 머리를 자르는 엄마. 미용사 아주머니가 엄마에게 노래를 권하니 엄마는 마다치 않고 애창곡을 한 소절 뽑았다.
“너~무나도 그 니이이임을, 사~랑 했기에, 그리움이 변해서 사~무친 미움~~”
엄마는 ‘동숙의 노래’를 겨우 몇 구절 불렀고, 나는 엄마의 또 다른 애창곡 ‘찔레꽃’으로 화답했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 언덕 위의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고향의 햇빛과 바람도, 제철의 건강한 음식도 유효기간이 있는 걸까. 조금씩 기운을 차리셨으나 오래 버티진 못하셨다. 돌아가는 길엔 구급차를 탔다. 흔들리는 구급차 안에서 잘한 일과 잘못한 일을 하나씩 꼽아봤다. 잘한 일은 금방 동이 났다. 덜컹덜컹. 간이침대가 불규칙적으로 벽에 부딪혔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다시 울진에 갔다. 아토피로 고생하는 딸아이에게 덕구온천이 잘 맞았다. 남편이 바쁘면 친구가 동행했다. 뭘 해도 나보다 능숙한 H가 더 어린 둘째를 도맡아 씻기고 입혔다. 먹이고 재우는 일도 엄마보다 나았다. 원 팀이 되어 우린 수시로 울진에 다녔다. 죽변항에 회센터가 들어서기 전, 허름한 시장 골목 일출식당에서 회를 먹거나 대게를 먹었다. 둘째는 늘 친구의 무릎에서 놀았다. 일출식당은 회센터 내에 여전히 성업 중이나 그때의 기분은 느낄 수 없다.
사촌오빠가 온양리 바다 앞에 낡은 집 한 채를 사서 별장처럼 쓰실 때쯤 아이들이 자라 초등학생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과 그 집을 드나들었다. 울진에 동행하지 못한 사람은 나의 지인이 아니라고 말할 만큼 자주. 한때, 그 집에 책방을 열고 싶다는 바램을 갖기도 했는데. 지금은 누군가에게 연세를 받고 집을 내주었다고 들었다. 기회가 된다면 오롯이 혼자 며칠 머물고 싶다. 그런 날도 있을 것이다.
한동안 H와 소원해졌고, 어느 날 H가 먼 길을 떠났다. 힘들 때마다 H가 울진에 자주 갔다고 가까이 있던 친구들이 말해 주었다. 늦은 저녁 퇴근해 먼 길을 달려 덕구온천 아래 허름한 모텔에 하루를 묵고, 이른 아침 온천욕을 한 후 불영사에 들려 서울로 돌아가곤 했단다. 나도 다시 울진을 찾았고 비슷한 길을 오갔다. 대부분은 혼자였고, 한두 번쯤은 같은 것을 잃고 같이 아픈 사람들이 동행하기도 했다. 부처님의 그림자가 어린다는 불영사 연못엔 어리연꽃이 피어 있고 이따금 다른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울진에 가고 싶다. 비도 오고 기분도 그렇고 해서, 울진에 가고 싶다. 비 오는 날 노천탕에 몸을 담그고 싶다. 가자미회도 먹고 싶다. 읍내에 가면 삼십 년 이상 드나든 칼국수 식당이 있다(상호도 그냥 ‘칼국수식당’) 근 오십 년 가까이 운영해 오신 주인 할머니 안부가 궁금하다. 이 집은 자연산 회와 회국수가 일품이다. 가격도 저렴하고 포장해 가기도 좋다. 엄마가 즐겨 드셨던 가자미회도 사촌 오빠들이 이곳에서 사 나른 것이었다. 그래도 영순위는 무조건 칼국수다. 씹을 틈도 없이 툭툭 끊어지는 국수 가락과 뜨끈한 멸칫국물은 언제나 눈물겹다. 지금 나에게 울진은 그 맛이다. 2일, 7일 오일장 날엔 일찍 문을 닫기도 하고, 카드 ‘비’가맹점이라고 빨간 글씨로 ‘비’를 강조해서 써놓으셨으니, 현금을 지참해야 한다. 메뉴에 쓰여 있진 않지만, 맥주 값이 다른 식당에 비해 일이천 원쯤 싸다는 게 숨겨진 장점.
국수 한 사발 하러 울진에 함께 가겠는가. 나와 어울려 울진에 간 적이 없으면 나의 지인이 아니란 말이 있으니 참고하시길. 하여튼 오늘은, 비도 오고 기분도 그렇고 해서. 울진에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