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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리 Jul 04. 2024

박문자 여사를 소개합니다

박문자 여사를 뵙고 왔다. 일구이구 기사년생, 향년 구십 육 세. 나의 시어머니다, 아니, 큰 시어머니다. 시아버님의 형수이며, 시어머님의 손윗동서이자 남편의 큰어머니다. 노환이 깊어 입원 중이며 지난 주말부터 중환자실에 머물고 있다. 그녀와 나의 인연은 멀고 가깝다.      


평안도 태생인 여사는, 스무 살 나이에 고모 댁으로 심부름 가던 중 피난길에 휩쓸렸다. 부산에서 홀로 정착해 악착같이 돈을 모으다 계주에게 그 돈을 다 떼고, 죽으려다 죽지 못했다. 이후 수원에 정착한 연고는 알지 못한다. 상처한 정치인과 부부의 연을 맺었다. 전처의 딸 셋을 거뒀고, 당신 자식은 두지 못했다. 남편은, 그러니까 시 큰아버지는 1972년에 심장마비로 명을 달리하셨다. 나머지 삶은 외롭고 고독했다.    

 

스무 다섯 해 전이었던가. 오래 소식이 끊겼던 그녀가 시가와의 연을 다시 이었던 게. 꽃처럼 곱고, 사리에 밝은 노인이었다. 전처의 자식 누구도 그녀를 찾지 않아, 긴 세월을 홀로 지냈다. 워낙 따뜻한 사랑을 주셔서, 며느리가 아니지만 며느리 비슷하게 살필 수 있었다. 어버이날에 꽃을 달아드리거나 때마다 맛있는 음식을 사드리고, 팔순 생신 상을 차려드리기도 했다. 시어머님과 함께 여행길에도 자주 모셨다. 호탕하게 먼저 지갑을 여시고, 유쾌한 농담도 할 줄 알며 이따금 날 선 잔소리를 날리기도 하는 총기 밝은 어른이었다. 다 가진 것 같은 손아랫동서(시어머니)에게는 가끔 샘을 냈고, 눈치가 빠른 나는 그럴 때 더 잘해 드렸다. 잘 먹고 잘 걷고 잘 웃으며 이야기도 많은, 요양시설에서 단연코 돋보이는 여사, 박문자였다.      


어느 날 뇌졸중을 앓았다. 산뜻하고 유쾌하던 그녀는 없다. 총명함도 시들었다. 먹고 싶은 게 떠오르지 않고, 먹어도 맛을 몰랐다. 눈을 마주치고 웃지만 나를 알아보는지 모르겠다. 희로애락도 흐릿해져 버렸다. 기쁘지도 않지만, 화도 나지 않는다. 그리움도 없고 쓸쓸함도 없다. 시설 노인들의 챙김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정기적으로 병원을 오갈 때 누군가 동행해야 했고, 자연스레 나는 그녀의 보호자가 되었다. 이따금 응급실로 호출받아 가기도 했다. 가는 길은 걱정 반, 짜증 반이었다. 내 몫이지 생각하다가도 이게 왜 내 몫인가 싶기도 했다. 시든 얼굴로 누워있는 노친네 얼굴을 보면 막상 짠하고, 두고 나올 땐 찔끔 눈물도 났다. 피도 세월도 추억도 섞이지 않은, 고작 나란 사람이 그녀가 기다리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징글징글했다. 무슨 이런 인연이 있고, 이런 삶이 있을까. 그 세월이 십오 년이 넘었고 그녀는 어느새 구십을 한참 넘겼으며 중환자실에 누운 지 닷새쯤 되었다.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다. 식당으로, 옷 가게로, 시장으로 시 큰어머니를 모시고 다닐 때면 많이들 묻곤 했다. 

“아이고, 으르신 엄청 고우시네. 친정엄마? 아니면 시어머니?”

엄마이거나 혹은 시어머니로 보이고 싶으셨을 그 마음을 훤히 알면서도 나는 시험 문제 답하듯 꼬박꼬박 정답을 말했다.

“아니요. 시 큰어머니세요.”

사람들 앞에서 ‘어머니’로 불리고 싶었을 그 마음도 가늠이 되었지만, 언제나 따박따박 ‘큰어머니!’라 불렀다. 이제야 고백한다. 나의 가식과 위선을.

‘나, 그런 사람이에요. 시어머니도 아니고 시 큰어머니를 깍듯이 모시는 그런 사람.’ 

알게 모르게 그렇게 나를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다. 참으로 옹졸하고 유치한 마음이었다.

       

결국 ‘어머니’라고는 한 번을 부르지 못했다. 아니, 않았다. 일생 외로웠던 당신 삶을 두고두고 애달아했으면서, 고작 그만큼의 선의도 나는 베풀지 않았다. 이제 여사님은 눈을 꼭 감고 힘겹게 숨만 쉬며 중환자실 침대에 누워 있다. 내가 누군지, 네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무어라 불리든 이제 와서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 그래도 ‘어머니!’라 거듭 불러 드렸다. 얼굴도 쓰다듬어 드렸다. 외로운 인생, 사느라 애쓰셨다고 말씀을 건넸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지안의 할머니가 영면하셨을 때, 삼 형제는 화환과 조문객으로 상가를 가득 메워 드렸다. 쓸쓸하게 살아온 인생, 가는 길이라도 외롭지 마시라고 모든 성의를 다해 장례를 치러 드리는 마음. 이 글은 그런 마음을 조금 닮았다. 삼형제 같은 호기를 부릴 수야 없지만, 상가를 가득 채울 인맥도 없지만 북에서 홀로 내려와 스무 살부터 아흔 여섯 그 이상까지 외롭게 살아온 박문자 여사를 누구든 잠깐이나마 떠올려 주면 좋겠다. 그때가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따스한 마음을 얹어 보내드릴 사람이 하나라도 더 있으면 좋겠다. 

‘문자씨, 애쓰셨어요. 여기서도, 거기서도, 더는 외롭지 마세요.’


그래서 당신도 이제, 박문자 여사를 아는 사람. 외롭지 않게 보내드릴 수 있는 마음이 조금 늘었다. 상가는 외롭겠지만 그런 마음을 잘 모두어 안고 가실 것이다. 지금도 힘겹게 숨 쉬고 계실 박문자 여사님. 시 큰어머니. 어머니. 이런 인연으로 만나, 조금이나마 좋은 사람으로 살게 해주셨음에 감사드려요. 덕분에 가끔 내가 좋은 사람인 것 같았으니까. 우린 또다시 만나게 될 거에요. 그땐 누가 누굴 보살피지 않아도 좋은 사이로, 다정한 친구 사이로 만나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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