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복잡하게 꼬이다가 돌연, 실상사에 김장 하러 가고 싶어졌다.
두 해 전인가. 실상사에 일주일을 머물렀고, 그중 사흘이 김장이었다. 절에 들기 전 두 밤 묵었던 게스트하우스 주인장님이, ‘어머, 실상사 아마 며칠 안에 김장 할 텐데’ 라고 말씀하실 때도 믿기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일복이 있는 편이 아니라는, 대체적인 내 운세를 믿고 싶었으나 일복은 일주일 내내 따라다녔다. 화요일 절 입소. 수요일 저리고, 목요일 씻은 배추를 평상에 올리고, 금요일 대대적으로 속을 넣었다. 오후엔 화장실 청소나 공양간 일을 했다.
700포긴가, 800포긴가. 세다가 포기하고 말 포기들. 세상이 사라지고 '배추와 나', '사과와 나', '양념과 나'만 남은 것 같은 초집중의 시간을 경험했다(속 양념에 사과를 갈아 넣더라). 멀뚱히 있는 시간이 뻘쭘해 계속 움직이니, 보기와 달리 일 잘한다고 칭찬도 받았다. 김장을 한다는 들썩임이 나를 품어 주었고, 혼란하던 머릿속이 혼란한 채로 차분해졌다. 그러다 혼돈도 사라지고 일과 나만 남았다. 아무 연도 없이 홀연 나타나 묵묵히 김장에 몰입한 나를 다들 어여삐 여겨준다는 기분에, 혹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김장을 마치고 허리를 펴니 무지개가 떴다. 모두가 들떴다. 와, 와. 선물 같은 무지개.
낯설어지는 것은 무구해지는 것일까. 그때 나는 능수능란한 어른에 둘러싸인 아이가 된 듯 눈이 여려지고, 자꾸 웃고, 모래성 쌓는 아이처럼 어설프게 오래 집중했다. 사흘이 나를 살렸다. 사람과 배추와 공기와 언어가 다 청량하게 느껴졌다. 생기가 돋고, 마음이 순정해졌다. 복잡함이 단순해졌다. 오늘 그래서, 실상사에 김장하러 가고 싶다. 11월 19, 20, 21일. 이미 지나간 날짜. 그래도 가고 싶다고 우긴다. 무리에 끼어 혼자 낯설어지며, 무구한 마음으로 정직한 동작을 반복적으로 오래 하여 결국 모래성과 나만, 일과 나만 남고 싶다. 단정해진 마음과 마주하고 싶다.
12월이 머지않다. 마지막 남은 한 달은 분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방에 불빛이 좋다. 음악도 나긋하다. 공부 빼곤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시험 전야라 공부 대신 글을 끄적인다. 김장하러 가고 싶은 마음은 단순함에 대한 바램이었구나. 복잡함의 끝에 서있다. 곧 건너간다. 담담한 시간으로. 담백한 마음으로. 담대한 기세로. 실상사로 김장하러 가듯, 홀연히.